평일강론

연중 제11주일(나해) 마르 4,26-34; 15/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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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15-06-13 ㅣ No.2883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연중 제11주일(나해) 마르 4,26-34; 15/06/14

 

 

 

사람들은 가끔 정의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정의는 사람들이 말하는 정의와는 조금 달라 보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자라나온 문화와 환경 속에서 나름대로 윤리적인 기준을 마련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모두 한 문화환경 속에서 자라나지 않고, 서로 다른 지역에서 태어나, 서로 다른 역사와 문화환경 속에서 자라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정의는, 서로 다른 문화환경 속에 처한 각기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윤리적인 잣대가 아니라, 사랑이고, 그 사랑은 바로 용서하시는 사랑이며, 자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설명하시면서,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마르 4,26-28) 라는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또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31-32절) 라고 덧붙이십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용서를 통해 사람들에게 다시 재생의 기회를 주십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만드실 때 인간 안에 하느님의 선성을 심어주셨습니다.주 하느님께서는 용서를 통해 인간의 죄악으로 손상된 선성을 다시 회복시켜 주시고 완성시켜 주려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죄인을 용서해주면, 감사할 줄 모르고 더욱 더 큰 죄를 지을 것이라고 우려합니다. 그렇지만 주 하느님께서는 죄인을 용서해주면, 주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회개에 이르는 새 인간의 길로 접어든다고 기대하십니다.


마치 사랑의 씨가 용서받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자신들도 모르게 자라나고, 오늘 용서받은 마음이 겨자씨처럼 자라나서 새로워지고, 내일 용서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어, 커다란 아량과 자비를 베풀게 되기를 기다리십니다.

 

교황님께서는 올해 12월 8일 원죄없이 잉태되신 마리아 대축일부터 내년 11월 20일 그리스도왕 대축일까지를 ‘자비의 희년’으로 선포하셨습니다.


교황님은 “우리가 죄를 고백하도록 이끄는 마음의 변화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사, 선물, ‘하느님의 작품’입니다(에페 2,8-10 참조). 우리가 비참한 처지에 있어도 사제가 우리를 하느님 이름으로 환대하고 이해할 것을 확신합니다.” 라고, 하느님의 자비와 그 자비를 믿는 우리의 회개에 대해 말합니다. 그리고하느님 앞에서 우리 변호인은 우리 죄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신 주 예수님이라고 일러주십니다.

 

교황님은 ‘용서받은 죄많은 여인’(루카 7,36-50)의 비유를 들어 하느님의 자비에 대해 설명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희망과 위로의 길을 열어줍니다. 예수님은 사랑과 심판을 대비시켜 보여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죄지은 여인을 자비롭게 사랑하셨기에, 그 여인은 예수님께 다가가 회개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그분의 발을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닦아드립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자신이 용서받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용서받고 싶었습니다. 사랑과 용서가 동시에 이루어집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께서 자비로우신 분으로 심판하시지 않으시고, 죄인인 자기를 사랑으로 이해하신다고 깨달았습니다.


예수님 덕에 하느님께서는 그 여인의 죄를 씻어주시고, 더 이상 그 죄들을 기억하지 않으십니다(이사 43,25 참조). 하느님의 용서는 위대합니다! 그 여인은 새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그 여인은 진실로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 여인은 말없이 주님께 마음을 열었습니다. 그 여인은 괴로워하며 죄를 회개하였습니다. 그 여인은 눈물을 흘리며 하느님의 선하심에 용서를 청하였습니다.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심판 이외에는 그 어떤 심판도 내려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비의 심판입니다. 심판을 뛰어넘는 자비인 사랑입니다.

 

집 주인인 바리사이 시몬은 모든 것을 염두에 두고 계산하기 때문에, 사랑의 길을 잃어버립니다. 시몬은 사랑하지 못하고, 그저 심판만을 생각합니다. 시몬은 그 여인을 심판하면서, 진리에서 멀어지게 되고 심지어 자신이 초대한 분이 누구이신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바리사이는 누가 주인을 가장 사랑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더 많이 탕감받은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시몬의 심판이 사랑으로 바뀌자, 비로소 그는 옳은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 외적인 것에 머물지 말고, 모든 사람이 얼마나 너그러울 수 있는지 보라고 하십니다.


그 어떤 사람도 하느님 자비에서 배제될 수 없습니다. 교회는 모든 이를 환대하며 그 누구도 거절하지 않습니다. 죄가 클수록, 교회는 회개하는 이들에게 더 큰 사랑을 베풉니다.


예수님께서는 얼마나 큰 사랑으로 우리를 바라보시는지요! 예수님께서는 얼마나 큰 사랑으로 우리의 죄 많은 마음을 치유하여 주시는지요!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보시고 결코 놀라지 않으십니다. 아버지는 집 나간 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들이 용서를 청하기도 전에, 그를 끌어안습니다(루카 15,17-24 참조).


예수님께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를 대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여러분이 돌아온다면 행복해 하실 것입니다. 그러한 사랑으로 여러분을 안아 주실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 안에 사랑하는 마음이 겨자씨처럼 자라났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은, 좋은 것을 좋아하는 마음에 그치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 것을 용서하고, 존중하며, 자비를 베푸는 마음입니다.


자비로운 사랑은, 이번에 용서해 주면 더 큰 죄를 짓지 않을까 두려워하거나 혹여 배신당하지나 않을까 망설이는 한계가 있는 사랑에 그치지 않고, 죄를 지은 사람을 자식처럼 끌어 안고 품어 안는 무한하고 완전한 사랑입니다.

 

교황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저는 이 희년에, 우리 모두 죄인이기에 자비가 간절히 필요한 교회가 하느님 자비를 다시 발견하여 더욱 풍요롭게 하는 기쁨을 찾게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우리는 그 자비로 우리 시대의 모든 이를 위로하여 주라는 부름을 받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두를 용서하신다는 것을,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늘 용서하신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결코 지치지 말고 용서를 청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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