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강론

부활 제6주일(나해) 요한 15,9-17; 15/05/10

인쇄

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15-05-09 ㅣ No.2862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부활 제6주일(나해) 요한 15,9-17; 15/05/10


어떤 사람이 마음에 들거나 좋은 감정이 생길 때, 스스로 물어야 할 지 모릅니다. 내가 좋아하는 이유가 ‘그 사람의 생각과 행동 방식, 삶의 스타일 중의 일부가 나와 비슷하고, 나의 취향에 맞으며, 나와 공유하고 있는 것이라 좋은 것인지?’ 아니면 ‘그 사람의 전체가 좋은 것이라 나도 좋은 것인지?’ ‘그가 무엇을 바라며, 누구를 위해, 무엇을 하며 사는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한 가지 더 살핀다면, 그가 추구하고 사는 삶이 현세에 국한되지 않고, ‘현세에 살면서도,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을 간직하고 영원한 생명을 염두에 두고 살아가고 있는지?’ 여부를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앞으로 어디가 살면서 배웠다고 하는 (율법)학자들과 내노라 하는 권세가들과 현실 생명을 좌우하는 것처럼 보이는 정치가들과 대립하거나 싸우지 마라. 결국 죽기밖에 더 하겠니!” “나처럼 고집부리다가 죽지 말고, 사람들이 원하는 것도 들어주면서, 적당히 타협하고 살아라.” “하느님 때문에 싸우는 것보다 하느님의 뜻을 저버리더라도 사이 좋게 지내는 것이 좋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다가 죽는 것보다, 일단 살아남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겠니!”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지상을 떠나는 마지막 날까지 제자들에게 이렇게 강조하셨습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8-20)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루카 24,46-48)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현실 생명을 부정하거나, 미래에 다가올 하느님 나라에서의 삶과 현세 삶이 전혀 다른 것처럼 말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가난한 이들과의 관계를 언급하실 때, 미래의 하느님 나라에서 우리가 놓이게 될 처지와 연관시켜 자주 말씀하십니다. (죽어서 저승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부자에게)“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루카 16,25)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간다.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한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19-21)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35-36.40)


그러시면서도 예수님께서는, 오늘 두 번째 독서에서 나오듯이, 목숨을 바치시면서까지, 현실에서 죄악의 굴레 속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우리를 살려주셨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1요한 4,9) 그 사랑은 주 하느님께로부터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1요한 4,10)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귀하고 아쉬워서 우리를 구해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착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해서 우리를 구해주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께서 우리를 만드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죄악의 노예로 살고 있는 것을 너무나 안타까워하셨습니다. 그래서 죽음으로 대표되는 죄악에게, 우리의 몸값으로 주님 목숨을 지불하시면서까지 우리를 구해내신 것입니다. “의로운 이를 위해서라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혹시 착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누가 죽겠다고 나설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로마 5,7-8) 이렇게까지 하시면서 우리를 구해내신 주님의 사랑이 바로 아버지 하느님의 뜻이었습니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7.8)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요한 15,9-10) 예수님께서 지상생애를 살아가시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신 것은 아버지와의 일치와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아버지의 뜻을 지키셨을 때 예수님의 마음 속에는 기쁨이 샘솟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11절)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느님과 일치하면서 누리신 충만한 기쁨은 바로,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할 때 얻을 수 있는 충만한 기쁨이며,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충만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길을 계명으로 삼아 알려주십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12-13절) 그렇게 주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면, 우리는 더 이상 주님의 도움만 바라고 주님의 은총만을 구하는 나약하고 부족한 인간이 아니라, 주님의 협조자가 되고 친구가 됩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14절)


주님께서는 처음부터, 우리를 주님의 도우심만을 간절히 청하는 피조물로 머무르도록 부르신 것이 아니라, 주님의 구원 사업을 이어 이 땅에서 하느님 나라를 건설할 복음화의 사도로 부르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16절ㄱ) 그러기에 우리가 성령의 도우심에 힘입어 주님의 사명을 수행하며 청하는 하느님 나라를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16절ㄴ) 그리고 우리가 청하는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방법이자 사명은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명령인 ‘사랑’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17절)


목숨을 바치시면서까지 우리를 살려주신 주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합시다. 이제 우리도 마냥 철없는 어린아이처럼 계속 이것 저것 달라고 청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주님의 희생으로 살아난 보답과 주님 사랑의 결실로서, 이 땅에서 주님 사랑의 사업을 이어 나갑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1요한 4,7)




51 0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