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강론

대림 제3주일(다해) 루카 3,10-18; 15/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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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15-12-13 ㅣ No.3015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대림 제3주일(다해) 루카 3,10-18; 15/12/13


자비의 특별 희년 선포 칙서 ‘자비의 얼굴’ (Misericordiae Vultus)2


 


 


오늘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해 제정한 자선주일에, 지난 주일에 이어 자비로우신 주님을 기리는 교황 칙서 ‘자비의 얼굴’ 9-16항을 보겠습니다.


 


9.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본성을, 온갖 반대를 물리치시고, 연민과 자비로 끝까지 용서하시는 아버지로 보여 주십니다. 되찾은 양, 되찾은 은전과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 15,1-32 참조)에서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특히 용서해 주실 때에 더욱 기뻐하십니다. 자비는 모든 것을 이겨내는 힘이며, 마음속을 사랑으로 가득 채워 주고 용서를 통하여 위로를 가져다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라고 하시며,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 18,35) 라고 말씀하십니다.


 


자비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베푸시는 것 일뿐 아니라 참된 하느님 자녀의 식별 기준이 됩니다. 거듭 용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럼에도 용서를 통해 우리는 마음의 평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증오와 분노를 버리고, 폭력과 복수를 포기해야만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행복하고 기쁨에 넘쳐 평화롭게 살기를 바라십니다.


 


10. 자비는 교회 생활의 토대입니다. 교회에 대한 신뢰도는 자비와 연민이 가득 찬 사랑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형제자매들의 나약함과 어려움을 받아들여야 할 때입니다. 용서는 우리를 새로운 삶으로 다시 일으켜 세우고 희망을 갖고 미래를 바라보게 해 줍니다.


 


11. 요한 바오로 2세 성인은 오늘날 자비라는 개념이 무색해 보이고 거북하게 느껴진다고 전하시며, “교회는 자비를 고백하고 선포할 때에 본연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자비가 창조주와 구세주의 가장 놀라운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12. 교회는 말과 행동으로 자비를 전하여 사람들의 마음속에 파고 들어가 그들이 다시 하느님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길을 찾아 나서도록 하여야 합니다. 우리 본당과 공동체, 단체와 운동, 곧 그리스도인들이 있는 곳에서는 누구든지 자비의 안식처를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13. 이 희년에 우리는 아버지처럼 자비로워지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 따라 살고자 합니다. 이는 힘들지만 기쁨과 평화가 충만한 삶을 제안하는 것입니다.


 


14. 주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게 우리에게 순례의 단계를 보여 주십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 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 6,37-38). 주님께서는 무엇보다도 심판하지 말고, 단죄하지 말라고 요청하십니다. 하느님의 심판을 피하려는 사람은 누구나 제 형제자매를 심판하여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은 심판할 때 겉으로 드러난 것만을 보지만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내면 깊숙한 곳을 보십니다. 질투심과 시기심에서 나오는 말은 얼마나 해롭습니까! 어떤 사람들을 험담하는 것은 그들을 곤란한 입장에 빠지게 하고 그들의 명예를 떨어뜨려 사람들의 구설수에 오르게 합니다. 우리가 심판하거나 단죄하지 않는다는 것은 긍정적인 의미에서 다른 사람의 장점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이는 우리의 편파적인 판단과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잘못된 생각으로 어떤 사람을 괴롭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자비를 표현하기에 부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우리에게 용서하고 자신을 내어 주라고 요청하십니다. 곧 우리가 먼저 하느님의 용서를 받았기에, 용서의 도구가 되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한없는 자비를 베푸셨음을 깨달아 우리도 남에게 관대하게 대하라고 요청하십니다.


 


15. 오늘날 이 세상에는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상황들이 너무 많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 희년에 교회는 이러한 상처들을 돌보아 주라는 부르심, 그들의 상처에 위로의 기름을 부어 아픔을 덜어 주고 자비로 감싸 주며 연대와 세심한 배려로 치유하여 주라는 부르심을 더욱 강하게 받게 될 것입니다. 모욕적인 무관심이나 우리의 정서를 마비시키고 새로운 것을 발견하지 못하게 하는 습관과 파괴적인 냉소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합시다! 눈을 뜨고 세상의 비참함을, 존엄을 박탈당한 우리 형제자매들의 상처를 보도록 합시다! 그리고 도움을 청하는 그들의 외침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깨닫도록 합시다! 우리가 그들에게 다가가 도움을 주어 그들이 우리의 현존과 우정과 형제애의 온정을 느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들의 외침이 우리의 외침이 되고, 우리의 위선과 이기심을 감추려고 기꺼이 빠지는 무관심의 장벽을 모두 함께 무너뜨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복음에서는 가난한 이들이 그 누구보다도 하느님의 자비를 더 많이 누립니다. 자비의 육체적 활동은 배고픈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이들에게 마실 것을 주며, 헐벗은 이들에게 입을 것을 주고, 나그네들을 따뜻이 맞아주며, 병든 이들을 돌보아 주고, 감옥에 있는 이들을 찾아가 주며, 죽은 이들을 묻어 주는 것입니다. 또한 자비의 영적 활동은 의심하는 이들에게 조언하고, 모르는 이들에게 가르쳐 주며, 죄인들을 꾸짖고, 상처받은 이들을 위로하며, 우리를 모욕한 자들을 용서해 주고, 우리를 괴롭히는 자들을 인내로이 견디며, 산 이와 죽은 이들을 위하여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심판받게 될 것입니다. 그 말씀에 따라 우리가 배고픈 이에게 먹을 것을 주었는지, 목마른 이들에게 마실 것을 주었는지, 나그네들을 따뜻이 맞아 주었는지, 헐벗은 이들에게 입을 것을 주었는지, 병든 이들을 돌보아 주었는지, 감옥에 있는 이들을 찾아가 주었는지 심판받게 될 것입니다(마태 25,31-45 참조). 또한 절망으로 몰아넣고 흔히 외로움의 근원이 되는 의혹에서 벗어나도록 우리가 도와주었는지,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데 필요한 수단을 갖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 특히 어린이들이 무지를 극복하도록 우리가 도와주었는지, 외롭고 고통받는 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갔는지, 우리에게 잘못을 저지른 이들을 용서하고 폭력을 낳는 온갖 분노와 증오를 떨쳐 버렸는지, 하느님께서 한없이 우리를 참아 주신 것처럼 그렇게 인내하였는지, 우리의 형제자매를 위하여 주님께 기도 드렸는지 우리는 대답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 작은 이들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바로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고문당한 이들, 상처 입은 이들, 채찍질 당한 이들, 굶주리는 이들과 난민들의 몸에서 드러나는 그리스도의 몸을 우리가 알아보고 만지며 정성껏 돌보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이 한 말을 잊지 맙시다. “우리의 삶이 저물었을 때 우리는 사랑에 대하여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16. 루카 복음 4장에 나타난 예수님의 나자렛 회당의 선포는 말과 행동으로 가난한 이들을 위로하고, 현대 사회의 새로운 노예살이에 얽매인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자신 안에 갇혀 있어 제대로 보지 못하는 이들이 다시 볼 수 있도록 하고, 존엄성을 빼앗긴 모든 이가 다시 그 존엄을 찾도록 하는 것입니다. (오늘 대림 제3주일,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해 제정한 자선주일에,)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리스도인들이 증언해야 하는 신앙에 대한 응답으로 다시 드러나게 됩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면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로마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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