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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2주간 수요일 ’21/03/03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어머니 복녀 이성례 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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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21-02-19 ㅣ No.4552

사순 제2주간 수요일 ’21/03/03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어머니 복녀 이성례 마리아 

 

 

 

 

 

최양업 신부님의 어머니 이성례(李聖禮) 마리아는 충남 내포의 성인 단원 이존창 루도비코 집안의 후손으로 1801년 충청남도 홍성에서 46녀 중 막내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남성처럼 씩씩한 정신을 타고났는데, 열여덟 살 때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결혼했습니다. 청양 다락골에 살면서 1821년 장남 최양업(토마스)을 낳았습니다. 가족과 함께 한양으로 이사를 했다가, 박해 위험이 있자 강원도와 인천 부평을 거쳐 수리산(현 경기도 안양시)으로 이주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고향과 재산을 모두 버리고, 극도의 궁핍과 굶주림 가운데 험한 산속으로 방황하기를 수년을 거듭했는데도 이 모든 것을 기쁘게 참아 받았습니다. 남편을 따라 먼 곳으로 이사 갈 때나 먼 길을 걸을 때 어린 자식들이 굶주림에 지쳐서 칭얼거리면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와 요셉이 이집트로 피난 가시던 이야기와 갈바리아산에 십자가를 지고 오르시는 예수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자식들에게 인내심과 참을성을 키워줬습니다. 남편이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 데도 남편을 공경하고 순종하며 부부가 한마음 한뜻으로 화목하게 살았습니다.

 

1839년 기해박해로 남편과 마을의 40여 명의 교우와 함께 포도청으로 압송된 이성례는 남편과 격리된 채 젖먹이 아들(스테파노)과 함께 여인 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잡혀 온 다음 날부터 문초와 형벌을 받아 팔이 부러지고 살이 너덜너덜하게 찢어졌지만 용감하게 신앙을 증거했습니다. 그런데 이성례를 괴롭힌 것은 자신의 죽음이 아니라 옥에 함께 있는 젖먹이였습니다. 젖은 나오지 않고 먹일 것이 없어서 막내아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남편은 매를 맞아 순교하고, 젖먹이는 더러운 감옥에서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이성례의 마음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순교하면 젖먹이뿐만 아니라, 밖에서 구걸로 연명하고 있는 나머지 4형제 모두 고아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스테파노가 굶어 죽자 이성례는 "천주를 모른다."라고 외치고 감옥에서 풀려나왔습니다. 남은 아이들마저 잃고 싶지 않은 지극한 모성애였습니다.

 

얼마 후 이성례는 큰아들 최양업이 외국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다시 압송됐습니다. 그는 옥에 갇혀 있는 신자들 격려에 힘을 얻어 전에 했던 말을 용감하게 취소했습니다. 잠시나마 배교한 것을 뉘우치고 영광스럽게 순교하기로 굳게 결심하였습니다. 둘째 아들 야고보는 감옥을 드나들며, 구걸한 돈으로 마련한 음식을 어머니께 갖다 드렸습니다. 이성례는 철모르는 어린 자식들이 부모 없이 지낼 것을 생각하자 모정에 다시 한번 몸을 떨어야 했습니다. 이성례는 문초와 형벌 끝에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감옥으로 찾아온 둘째 아들 최희정 야고보에게 형장으로 오지 말 것을 당부했습니다. 마음이 약해질 것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이성례는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습니다. "이제 그만 가거라. 절대로 천주와 성모 마리아를 잊지 말아라. 서로 화목하게 살며, 어떤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서로 떨어지지 말고 맏형 토마스(최양업)가 돌아오기를 기다려라.“ 야고보는 모정에 눈물짓는 어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한 뒤 감옥에서 나왔습니다. 야고보는 감옥 사람들에게 어머니를 마지막 순간까지 조심스럽게 지켜줄 것을 부탁했습니다야고보와 세 형제는 어머니의 말을 듣고 나와서, 구걸을 시작하여 모은 재물을 사형집행자인 휘광이에게 가져다 주면서, ”칼을 아주 잘 갈아서 우리 어머니 내리칠 때 고통스럽지 않게 한 번에 돌아가시게 해주세요.“ 라고 청했다고 합니다1840131, 이성례는 동료 신자들과 함께 형장으로 정해진 당고개(현 서울 용산구 신계동)로 끌려가 참수로 순교했습니다. 안온하고 평화로운 얼굴이었다고 합니다. 그의 나이 서른아홉 살이었습니다.

 

최경환ㆍ이성례 후손에 따르면 최양업 신부 첫째 동생 야고보는 세 동생을 친척 집에 맡깁니다. 신부가 돼 돌아온 맏형 최양업은 1849년 용인 한덕골 작은아버지 집에서 동생 4형제를 만났습니다. 몇 년 후 최 신부는 셋째ㆍ넷째 동생을 신심이 깊어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송구현 도미니코의 장녀 송 막달레나, 차녀 송 아가타와 결혼시켰습니다.

 

- 평화신문, 20121028, 남정률 기자 참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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