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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2주간 목요일 ’21/03/04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1-5차 선교 귀국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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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21-02-19 ㅣ No.4553

사순 제2주간 목요일 ’21/03/04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1-5차 선교 귀국여행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은 한시라도 빨리 조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1842년부터 5번의 걸친 귀국을 시도했지만 다 실패로 돌아가고, 184912월이 되서야 귀국하게 됩니다. 오늘은 다섯 번에 걸친 선교 귀국여행을 통해 최 신부님의 선교 열정을 살펴보기로 합시다.

 

첫 번째, 18427월 제1차 선교 귀국길은 마카오에서 출발하여 상해와 태장하를 거쳐 소팔가자로 가게 됩니다. 최양업 신부님은 조선에 통상조약을 맺으러 가는 프랑스 함선에 통역사로 승선합니다. 신부님은, 그때의 심정을 르그레즈 신부님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루하루 그 군함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의 동포들이 마침내 시온성으로 회두하여 우리의 창조주이시요 구세주이신 하느님을 찬송할 날이 언제쯤 올 것인가요.”라고 기술합니다. 하지만, 영국과 청나라가 아편전쟁을 끝내고 남경조약을 체결하면서, 프랑스 함대는 멈추어 서버립니다. 최 신부님 일행은 김대건 신부님과 메스트르 신부님과 합류하여 태장하를 거쳐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가 있는 소팔가자로 돌아가게 됩니다.

 

두 번째, 18461월 제2차 선교 귀국길은 소팔가자에서 훈춘까지 갔다가 소팔가자로 되돌아갑니다. 18433월 김대건 신부님이 변문에서 조선 밀사 김 프란치스코를 만난 후 소팔가자로 와서, 1839년 기해박해로 앵베르 주교님과 모방·샤스탕 신부님뿐 아니라 최양업의 부모인 최경환(프란치스코)과 이성례(마리아) 등 많은 신자가 순교했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최 신부님은 언젠가 좋으신 하느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저의 동포들을 만날 행운이 저에게 다가오기를 하루하루 바라면서 머물러 있습니다.저의 부모와 형제들을 따라갈 공훈을 세우지 못하였으니 저의 신세가 참으로 딱합니다. 그리스도 용사들의 그처럼 장렬한 전쟁에 저는 참여하지 못하였으니 말입니다. 정말 저는 부끄럽습니다.”라고 1844519일자 편지에서 스승 르그레즈 신부님께 안타까움을 표합니다. 184412월 김대건 신부님과 최양업 신부님은 부제품을 받고, 18461월 두만강 얼음을 타고 훈춘에 도착하지만, 만주군에게 잡혀 3일 동안 감금되었다가 풀려나 소팔가자로 돌아갑니다.

 

세 번째, 184612월 제3차 선교 귀국길은 소팔가자에서 변문까지 갑니다. 소팔가자에서 신학생을 지도하다가, 184612월 말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압록강 귀국로 탐사차, 변문(邊門)을 통한 귀국 여행길에 오릅니다. 최 신부님은 여행 중에, “지금까지도 저는 우리 포교지 밖에서 떠돌고 있으니 저도 매우 답답하고, 신부님의 마음도 괴로우실 것입니다. 저는 이제야 겨우 저의 동포들한테로 가는 도중입니다. 인자하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저로 하여금 저의 신부님들과 형제들을 반가이 만나 포옹할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시기를 빕니다.”라고 심양에서 르그르즈와 신부님께 편지를 씁니다. 이어서 최 부제님은 이번 3차 선교 여행이 성공할 수 있기를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제 발걸음은 가볍게 뛰어 달리고 있으나, 얼굴은 무겁게 푹 수그러지고 있습니다. 죄악의 막중한 무게에 짓눌리고 극도의 빈곤과 허약으로 시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풍요한 자비심에 희망을 갖고, 하느님 아버지의 섭리에 저를 온전히 맡깁니다...... 매일 두렵고 겁이 납니다만, 하느님께 바라는 희망으로 굳세어져서 방황하지 않으렵니다. 바라건대 지극히 강력하신 저 십자가의 능력이 저에게 힘을 응결시켜 주시어, 제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 않게 하시기를 빕니다.” 하지만, 압록강 변문에 도착한 최 신부님과 메스트르 신부님은 1846년 기해박해로 조선의 국경 감시가 너무 엄중해 입국하지 못하고 되돌아갑니다.

 

네 번째, 18477월 제4차 선교 귀국길은 홍콩에서 상해로의 여정입니다. 프랑스 함대가, 1838년 기해박해 때 앵베르 주교와 모방ㆍ샤스탕 신부 등 3명의 프랑스 선교사를 참수한 것에 대해 조선 조정에 보낸 항의 서한에 대한 답을 받아내려고 조선 원정길에 나서자 최 부제님과 메스트르 신부님도 동행합니다. 그런데 프랑스 함대가 조선 근해에서 돌풍을 만나 좌초하고, 현재 새만금 33센터 방조제가 들어서 있는 고군산도로 피신했다가 영국 함대의 구조로 홍콩으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그 와중에서도 최 신부님은 조선 신자들이 찾아오기를 기다렸지만 결국 수군의 엄격한 감시로 만나지 못하고 되돌아갑니다. “끝끝내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밤에는 조선 거룻배들이 사방에 횃불을 켜고 경비했으며, 낮에는 아무도 우리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금지돼 있었습니다...... 저는 고군산도에 남아 있기를 원하여 함장에게 여러 번 청하였으나 함장은 저의 뜻에 결코 동의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서원까지 하면서 간절히 소망해 마지않았고, 또 천신만고 끝에 가까스로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손안에까지 들어온 우리 포교지를 어이없이 다시 버리고 부득이 상해로 되돌아오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므로 저도 모르게 눈물을 줄줄 흘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희망을 잃지 않고 낙담하지 않으며, 여전히 하느님의 자비를 바라고, 전능하시고 지극히 선하신 섭리에 온전히 의지하고 있습니다. 저도 하느님 안에서 항상 영원히 희망을 가질 것이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려고 저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의 손에 맡겼으니 그분을 언제나 믿을 것입니다...... 주님, 보소서. 저희의 비탄을 보시고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소서. 저희의 죄악에서 얼굴을 돌리시고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의 성심에 눈길을 돌리시어, 당신을 향해 부르짖는 성인들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다섯 번째, 18495월 제5차 선교 귀국길은 상해에서 지금의 백령도인 교도까지 왔다가 다시 상해로 되돌아갑니다. 최 부제님은 1849415일 상해에서 강남교구장 마레스카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은 후 5월 메스트르 신부님과 함께 백령도로 떠납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보고에 의하면, 이 섬에는 많은 산동 어부들이 떼를 지어 모이므로 그곳에 가면 어김없이 큰 선단을 만나게 돼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곳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영국에서 만든 지도는 조선의 실제 사정과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최 신부님 일행이 도착한 곳은 전혀 알 수 없는 생소한 곳이요 지극히 위험한 곳이었습니다. 닻을 내릴 수도 없고 안내자를 부를 수도 없었습니다. 어떤 조선 사람이라도 외국인에게 심부름하기 위해 접촉하는 것이 법으로 금지돼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다시 뱃머리를 상해로 돌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죽을 고비를 넘어가며 다섯 번씩이나 실패를 거듭했지만, 최 신부님의 선교 열정은 사그라들 줄 몰랐고, 결국 여섯 번째 선교 귀국길인 1849년에서 1850년에 이르는 겨울에 어렵사리 입국하여 열정적인 선교 사목을 펼치게 됩니다.

 

- 성지순례후원회 http://cafe.daum.net/holyplacek/s8v0/1 참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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