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강론

사순 제4주일(나해) 요한 3,14-21; ’20/03/14 성 요셉의 해 교황교서 ‘아버지의 마음으로’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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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21-02-25 ㅣ No.4576

사순 제4주일(나해) 요한 3,14-21; ’20/03/14

성 요셉의 해 교황교서 아버지의 마음으로’ II

 

 

 

 

 

오늘은 아버지의 마음으로두번째 순종하는 아버지수용하는 아버지를 봅시다.

 

3. 순종하는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당신 구원 계획을 마리아에게 보여주실 때 하셨던 것처럼, 요셉에게도 당신의 계획을 드러내 보여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꿈을 이용하셨습니다.

 

요셉은 마리아의 신비스러운 잉태로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요셉은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마태 1,19)

 

첫 번째 꿈에 나타난 천사는 요셉의 중대한 문제를 해결하도록 도움을 줍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태 1,20-21) 요셉은 바로 응답하였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마태 1,24) 요셉은 순종함으로써 자신이 처한 극적인 사건을 헤쳐나가고 마리아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 꿈에 나타난 천사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마태 2,13) 요셉은 자기가 직면하게 될 어려움에 대해서는 물어보지도 않은 채 주저하지 않고 천사의 말에 순종하였습니다.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마태 2,14-15)

 

이집트에서 요셉은 집으로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다는 천사의 말이 있을 때까지 인내하며 믿음을 갖고 기다렸습니다. 세 번째 꿈에 나타난 천사는 그 아기를 죽이려는 자들이 죽었으니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로 돌아가도 된다고 알려 주었습니다(마태 2,19-20 참조). 요셉은 이번에도 바로 순종하였습니다. “요셉은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갔다.”(마태 2,21)

 

돌아가는 길에 아르켈라오스가 아버지 헤로데를 이어 유다를 다스린다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 가기를 두려워하였다. 그러다가 꿈에 지시를 받고, 갈릴래아 지방으로 떠나 나자렛이라고 하는 고을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마태 2,22-23) 이는 네 번째 꿈이었습니다.

 

루카 복음사가의 이야기로는, 요셉이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호적 등록 칙령에 따라 본향에 호적 등록을 하러 나자렛에서 베들레헴까지 길고 험난한 여정을 하였다고 합니다. 바로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예수님께서 태어나셨고(루카 2,1-7 참조), 예수님께서도 다른 모든 아기들처럼 황제의 등록소에 등록되었습니다. 루카 성인은 특히 예수님의 부모가 율법의 모든 규정, 곧 예수님의 할례식, 해산 후의 마리아의 정결례식, 하느님께 첫 아기 봉헌식(루카 2,21-24 참조)을 지켰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자 하십니다.

 

요셉은 모든 상황에서, 주님 탄생 예고 때의 마리아와 겟세마니 동산에서의 예수님처럼 그대로 이루어지소서.”(fiat)라고 말하는 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역할인 가장으로서 예수님께 하느님의 계명에 따라(탈출 20,12 참조) 부모에게 순종하도록(루카 2,51 참조) 가르쳤습니다. 나자렛에서의 감추어진 기간 동안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법을 요셉에게서 배웠습니다. 그분의 뜻은 일용할 양식이었습니다(요한 4,34 참조). 겟세마니에서 가장 힘겨운 시기를 보내고 있을 때조차, 예수님께서는 당신 뜻보다는 아버지 뜻을 따르기로 하시며,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8) 그래서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서간을 쓴 저자는 예수님께서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히브 5,8)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이 모든 사건을 통하여 성 요셉은 직접 자기 부성의 실행을 통하여 예수의 인격과 사명에 봉사하도록 하느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았다.”는 것과, 이렇게 하여 충만한 때에 위대한 구원 신비에 협력하였다.”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4. 수용하는 아버지

요셉은 아무런 조건 없이 마리아를 받아들였습니다. 요셉은 천사가 전해주는 말을 믿었습니다. “요셉은 마음이 고귀해서 자신이 율법에서 배운 것보다 사랑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여성에 대한 정신적, 언어적, 신체적 폭력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는 오늘날 요셉은 존경할 만하고 섬세한 남성상으로 제시됩니다. 비록 요셉은 모든 내용을 알고 있지는 않았지만, 마리아의 명성, 존엄성, 삶을 보호하기로 합니다. 요셉이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지를 고민하고 있을 때, 하느님께서는 그의 판단에 빛을 비추시어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벌어지는 일들의 의미를 종종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첫 반응은 흔히 낙담과 저항입니다. 요셉은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아무리 이해할 수 없는 일처럼 보일지라도, 그 일을 받아들이고 그에 대해 책임지며 자기 역사의 일부로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이력과 화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기대와 그에 따르는 실망감의 인질로 남아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걸어간 영적 길은 설명이 아니라 수용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수용하고 화해할 때만 우리는 더 큰 역사와 더 깊은 의미를 엿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힘겹게 견디고 있는 악에 저항하라는 아내의 권유에 욥이 한 말이 울려 퍼집니다. “우리가 하느님에서 좋은 것을 받는다면, 나쁜 것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소?”(2,10) 요셉은 수동적으로 굴복하지 않고, 용기 있게 굳건한 의지로 상황을 주도하는 사람입니다. 수용은, 성령께서 주시는 불굴의 용기로 삶을 통해 드러납니다. 삶에 모순과 좌절과 낙담이 존재할지라도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에 필요한 힘을 주시는 분은 오직 주님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신 것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로서, 우리 저마다 자신이 걸어온 길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해 줍니다.

 

하느님께서 요셉에게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아라.”(마태 1,20)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요셉이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아라.”라고 말합니다. 모든 분노와 낙담을 떨쳐버리고, 우리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더라도, 단념하지 말고 희망과 용기를 가지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시다. 우리가 복음에 따라 살아갈 용기를 찾으면, 기적적으로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잘못되고, 되돌이키지 못할 것 같아도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바위틈에서도 꽃을 피우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단죄할지라도,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보다 크시고 또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3,20)

 

존재하는 것은 무엇도 버리지 않는 그리스도교 현실주의로 다시 돌아갑니다. 신비하고 되돌이킬 수 없는 복잡한 현실은, 모든 빛과 그림자를 가지고 있는 실존적 의미를 지닙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28)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심지어 악이라고 불리는 것도”(etiam illud quod malum dicitur)라고 덧붙이십니다. 이러한 전체적인 관점에서 신앙은 기쁜 일과 슬픈 일 모두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믿는다는 것은 손쉽고 편안한 해결책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신앙은 요셉 성인에게서 우리가 본 것입니다. 요셉 성인은 손쉬운 방법을 찾지 않으셨고, 열린 눈으로 현실을 직시하시고 그 현실에 대한 책임을 직접 짊어졌습니다.

 

요셉의 수용하는 태도는, 예외 없이 다른 이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환대하며, 약한 이들에게서 특별한 관심을 보이라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약한 것을 선택하셨고(1코린 1,27 참조), “고아들의 아버지, 과부들의 보호자”[시편 68(67),6]이시며, 우리 가운데 있는 이방인을 사랑하라고 요청하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돌아온 탕자와 자비로운 아버지(루카 15,11-32 참조) 비유에 관한 영감을 요셉 성인에게서 받았다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전문: https://cbck.or.kr/Notice/20210030?gb=K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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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4주일 꽃꽂이

http://bbs.catholic.or.kr/home/bbs_view.asp?id=181932&menu=frpeterspds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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