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강론

연중 제6주일(나해) 마르 1,40-45; ’21/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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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21-02-01 ㅣ No.4535

연중 제6주일(나해) 마르 1,40-45; ’21/02/14

 

 

 

 

 

언젠가 중증 지체 장애자 요양원에 들어가 한 주간을 지낸 적이 있습니다. 겨울방학 때는 아이들이 대부모 집이나 자매결연을 맺은 가정으로 놀러가고 남은 아이들만 한 방에 모여 있었습니다. 저녁을 먹고 방에 들어가서 아이들과 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한 아이가 저를 향해 오는 것 같았습니다. 잠깐 놀고 있는데 갑자기 방 한 가운데에서 그 아이의 울음 소리가 났습니다. 저를 향해 오던 아이가 제가 다른 아이와 놀고 있으니까, 오다 말고 선생님께로 향했나 봅니다. 그런데 선생님도 다른 아이들을 돌보고 있으니, 그야말로 그 아이는 사면초가로 자기 한 몸 둘 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는 이 선생님, 저 선생님 사이를 그야말로 맴돌다가, 갈 곳이 없으니까, 그만 울고 만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방에 들어왔을 때부터, 많은 아이들이 다 저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혹시 자기에게 오지 않나 해서 말입니다. 그 중에는 침대에 눕혀져서 주사바늘로 위에 직접 영양을 공급해 주어야만 할 정도로 증세가 심각한 아이들도 있습니다. 어린 나이에 너무나도 큰 짐을 진 아이들입니다. 애처롭다는 감상적인 표현보다는, 상대의 처분만 바라면서 자신의 원의를 너무나도 쉽게 포기하는 표정 없는 아이들의 모습이 서글프고 안타까웠습니다.

 

그 아이를 보면서 정말 몸 둘 곳이 마땅치 않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람들. 그래서 점점 이상해지고, 또 이상해지니까 더욱 더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람들. 어느 누구 하나 따뜻하게 맞아주지 않아서 맴도는 사람들. 감싸주고 안아주지 않아 방황하는 수많은 영혼들이 생각났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병환자는 주님께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 1,40) 하고 말씀드립니다.

 

저도 한 동안 매일 같은 지향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주님의 거룩한 사도로 만드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날 저는 중증 장애자 요양원의 아이들과 함께 지내면서, 그 기도는 제가 주님께 청할 기도가 아니라, 그 아이들이 주님께 그리고 그 집을 찾는 이들에게 하는 청일수도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었습니다. 제 손길이 자기에게 스쳐가기를 바라는 아이들의 마음입니다. 적극적으로 요구할 기력조차 없고, 저항하고 극복할 아무런 희망조차 간직하지 못한 아이들. 그저 남이 자기에게 다가와 먹여 주고 안아 주기만을, 그야말로 처분만 바라는 아이들이란 것을 느꼈습니다.

 

나병환자는 유다 사회에서 천벌을 받은 것이라고 간주하고 동네 밖에서 기거하도록 했습니다. 또 나병환자들 스스로도 자신들은 천형을 받은 것으로 여겼기에, 그러한 상황에 저항하거나 거부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의 처분만 바라며 자포자기해 버렸습니다.

 

저를 바라보는 이들이 떠오릅니다. 저의 처분만 바라는 이들은 장애자 요양원에서뿐만 아니라 본당의 교우들 그리고 본당 관할구역 내에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가슴 속에 익명으로 남아 호소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당을 향해 거는 지역사회의 기대들. 정의와 진실 그리고 선행은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더욱 더 절실히 요구되는 것 같습니다. 얼마나 할 일이 많은지!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새로 나게 하시어, 가난한 이들의 사도로 삼으실 수 있나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이들을 고쳐 주시고, 그들을 다시 사회에 복귀시키기 위해서 누구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44) 라고 엄하게 이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 종교지도자들의 잘못을 아주 엄중히 지적하시면서도, 그들의 역할을 무시하거나 축소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사회에서 밀려난 그들에게는 그러한 사정이 있어 배려해준다고 하더라도, 복음서 곳곳에서 예수님께서는 조금이라도 더, 한 명이라도 더 알려서 예수님을 믿게 해야 하는데, 거꾸로 알리지 말라고 하니 무슨 의도이실까?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에게 와서 병을 고치고 주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주 하느님의 뜻대로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이들이 아니라, 병만 고쳐주기를 바라면서 오는 이들을 반가워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구세주 하느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는 이들이 아니라, 병을 고치는 의사나 능력자나 기적자로 비춰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어쩌면 그들을 보면서 다 부질없는 일!’ 이라고 실망하거나, 오히려 역효과를 낸다고 여기실지 모릅니다.

 

그 때 어린 환우들을 바라보면서 이 구절을 떠 올리며 기도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이 아이들을 정상으로 되돌려주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환우들과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을 다 되돌려주실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은 주님이십니다. 언제 어떻게 되돌려주실지, 아니면 그냥 그대로 살면서 나름대로 주님 사랑을 느끼도록 하실지는 주님께서 하실 일임을 압니다. 정상으로 되돌아오는 것만이 선하고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압니다. 자신이 처한 위치와 처지 속에서도 주님 사랑을 느끼고 행복하게 살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주 하느님의 뜻과 말씀을 따르려고 하기 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방법대로 하기를 원해서 그런지, “그러나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셨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그분께 모여들었다.”(45) 라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기적을 행하는 이를 알고 있다는 것이 마치 자신이 기적을 베푸는 이들에게 가는 지름길이요 통로라고 착각하며 제시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자신이 기적을 베풀 수 있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신도 할 줄 아는 것 마냥 착각하기도 합니다. 운동을 하는 법을 안다고 해서 운동을 잘 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구원의지에 따른 행위를 받아들이고, 그 듯을 헤아리며 새로운 삶을 살아가려는 변화의 노력없이, 그저 자신들의 현세적인 탐욕만을 바라는 이들 앞에 나서고 싶지 않으셨나 봅니다.

 

우리는 주 하느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스스로 희생제물이 되어,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심으로써,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선포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 와서 빌면, 현세의 입신양명이 해결된다고 하며 미신을 선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 예수님을 보내주신 아버지 하느님을 찬양하며 주 하느님의 뜻을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이 땅에서 내 몸으로 채우고 이루려고 노력합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빌면서!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르 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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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6주일 꽃꽂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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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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