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강론

연중 제3주일(나해) 마르 1,14-20; ’21/01/24

인쇄

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21-01-15 ㅣ No.4514

연중 제3주일(나해) 마르 1,14-20; ’21/01/24

 

 

 

 

비스마르크라는 독일의 재상을 기억합니다. 그분에 대해 정확히 기술하기는 어렵지만 세계사 시간에 배운 바로는, 그가 백성을 잘 살도록 하기 위하여 인간이 이성적으로 기획할 수 있는 최고의 이상을 적용하려고 애썼고, 그에 따른 규칙을 엄격히 적용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노력과는 달리 결과적으로 철혈 재상이라는, 이른바 백성을 위한다는 의도로 백성의 삶을 인정사정없이 칼로 자르듯 적용하고 심판했다는 원성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라는 라틴어의 오래된 격언을 떠올리게도 합니다.

 

얼마 전에 우리 사회는 낙태에 대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에 관한 논쟁으로 홍역을 겪었습니다. 이른바 임신과 출산을 생명의 관점에서라기 보다는 생명을 잉태하고 출산하고 양육을 전적으로 책임지게 되는 여성의 삶의 질이라는 관점에서 결정되었음을 아쉽게 바라보았습니다. 이는 현대 세계에서 여성이 겪어야 하는 차별과 일방적인 부담도 한 몫을 차지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고, 이를 탓하거나 책임을 묻고자 하는 의도는 없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이 시점에서 무엇보다도 안타까운 시선은 사람이 다른 사람의 생사전권을 결정하고 통제하고자 한다.”는 위험성입니다. 세상에 태어나는 생명이 자신의 원의와는 관계없이 기존의 생명들, 그것도 가장 사랑받고 보호받아야할 부모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결정이 대부분 부모로 대표되는 기존 생명체의 사회경제적 여건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입니다.

 

작금의 사회에서 생명의 존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두고, 혹자는 무슨 고려적 이야기를 하느냐고 할지 모릅니다. 고리타분하고 사회의 현실을 너무나 모르는 사념의 유희라고 치부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태아의 생명권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여성이 사회에서 차별대우를 받듯이, 태아도 차별대우를 받으며, 심지어는 기존의 부부도, 자녀도, 심지어는 부모도 차별대우와 학대를 받습니다. 그것도 생명이라는 관점이 아니라 사회경제적인 형편과 정도 그리고 그 역할과 사회의 유용성과 필요성에 의해 결정됩니다. 전통적인 남녀의 성 차별화에 이어 어린이와 노인에 대한 학대, 장애인과 도시 빈민, 외국인 노동자와 다문화 가정들, 부자와 가난한 자들 간의 차별과 부당한 처우 등이 심화되고 있고 또 앞으로 더 심화되리라는 우려가 생겨납니다.

 

더군다나 개탄스러운 것은 이러한 우리 사회의 차별 기준이 힘이 있느냐 없느냐’, ‘가진 것이 많으냐 적으냐’, ‘어느 정도 도움이 되느냐 안 되느냐에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마치 신의 절대권을 부정하고, 현세와 물질주의를 표방하는 공산주의의 한 단면을 보는 듯하여 무척 우울합니다. 점차로 생명에 대한 권한과 책임을 당사자 개인이나 그 가정에 국한시키거나 돌리지 말고, 인류사회의 전체적인 공동책임과 공동양육, 공동부양 등으로 풀어나가야 할 것임을 기대합니다.

 

가톨릭 신자들은 생명이 하느님에게서 왔다고 믿고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생명을 만드신 것이므로 다른 인간이 생명에 대해 결정할 수 없다는 신앙조목입니다. 이것이 인간 존엄성의 존재근거입니다. 만일 부모에게 자녀 생명의 근원과 소유권이 있다면, 우리가 요즘 비참하게 겪고 있듯이, 부모가 자녀를 학대하던 앵벌이를 시키던 시쳇말로 살리던 죽이던 누가 뭐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의식하고 있다면, “내 집인데, 내 아내인데, 내 자식인데, 네가 무엇인데 참견하고 따지느냐?”고 오히려 되물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인간 생명의 근거가 주 하느님께 있으므로, 인간과 피조물계의 모든 생명에 대한 존재 근거와 침해당할 수 없는 기본()권은 인간 사회의 필요성과 유익성과 관계없이 존엄한 것입니다. 그 생명이 태아이건, 장애인이건, 식물인간이건, 노인이건, 이방인이건, 사회에 어떤 유익을 가져가주느냐는 등의 여부에 구애받지않고, 생명은 타인에 의해 결정될 수 없는 천부적인 권한이라고 믿습니다. 심지어는 자기 자신에게까지 적용됩니다. 그러기에 스스로 생명을 마치는 행위조차도 인정되지 않는다고 하는 이유입니다. 심지어는 아우를 죽인 카인에게 “’카인을 죽이는 자는 누구나 일곱 곱절로 앙갚음을 받을 것이다.’ 그런 다음 주님께서는 카인에게 표를 찍어 주셔서, 어느 누가 그를 만나더라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셨다.”(창세 4,15) 라고까지 하시면서 생명은 하느님의 것임을 천명하셨던 사실을 기억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이 시점에서 회개할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어쩌면 평소 당연하다고 여기고 가장 이상적이라고 말하는 이성적이고,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효율적이라고 하는 우리 의식의 기준들이 과연 우리 사회와 인간과 자연 생명에 대해 어떤 영향을 끼치며,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생명의 존귀함보다 기존 생명체의 사회경제적 여건이 우선시되는 이기적이고 폭압적인 접근을 포기해야 할 때입니다.

 

아울러 해결책을 찾으려는 우리의 노력이 우리의 삶을 편하고 유익하게 보존하기 위한 입장에서, 다른 생명에 대한 배척과 제거가 아니라, 함께 살도록 기존의 생명체인 우리들에게 맡기신 다른 생명체를 맞아들이고 대하는 데 있어, 주 하느님의 사명을 어떻게 실현하여, 공존하고 공생할 것인지 고민하고 실행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 안에 들어가서 집을 짓고 살 때, 자연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자연과 융화하며 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은 지형을 되도록 그대로 살려 자연을 파괴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지세가 낮으면 연못이나 계간(溪澗)을 조성하고, 언덕에는 꽃과 나무를 심고, 인위적인 기하학적 배열로 심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함부로 전지나 전정을 하지 않고 늘 조경이 자연스러운 모습을 유지하도록 유념했습니다. 한국 조원은 음양오행사상과 풍수지리설의 영향을 받았으며, 대체로 선경(仙境)을 동경하는 신선사상의 영향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한국 건축과 조경에서 무엇보다 중요하면서도 일관된 것은 바로 자연과의 조화와 생명을 존중하는 것이며,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하나로 어울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낙태는 세계의 평화를 위협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생명 존중, 특히 태아처럼 무고하고 힘없는 이들의 생명에 대한 존중 없이는 참된 평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생명을 수호하여야 합니다. 모든 단계의 생명에 대한 공격을 막으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어떠한 평화 활동도 소용없습니다.” 라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죽음의 사회에서 생명의 사회를 건설해 나가는 선교사들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은 하느님의 것이기에 존귀하고, 인간 그 누구에 의해서도 침해를 받거나 대신 결정될 수 없음을 우리 가슴 속 깊이 각인하고 되새기며 실행합시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마르 1,17)

 

--------------------------------------------

 

연중 제3주일 꽃꽂이

http://bbs.catholic.or.kr/home/bbs_view.asp?num=1&id=181849&menu=frpeterspds2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32 0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