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강론

연중 제4주일(나해) 마르 1,21ㄴ-28; ’21/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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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21-01-27 ㅣ No.4521

연중 제4주일(나해) 마르 1,21-28; ’21/01/31

 

 

 

 

  

예전에 제 아버님께서 어릴 때 집안에 걸어 놓으신 족자에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나는 이렇게 열심히 일해도 이 정도밖에 못 사는데, 너희는 일도 하지 않으면서 어찌하여 부귀영화를 꿈꾸느냐?” 그 정확한 말귀를 기억해 내지는 못하지만, 이 글은 세종대왕의 장인이자 영의정인 안효공 심온(沈溫)의 말입니다. 그분은 오늘 날 사람들이 말하는 불로소득과 벼락부자를 경험하지 못하신 분인가 봅니다. 사실 스스로 땀 흘려 자기 손으로 이룩한 것이 아니라면, 자신의 것이라고도 할 수 없겠습니다.

 

실제로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꿈이라면 무엇이 있을까? 그리고 그 꿈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막연히 꿈꾸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한 가장 적절한 방법을 찾아 수행하여, 스스로 이루는 길일 것입니다. 우리의 꿈은 누가 대신 이루어주는 것도 아니요,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그냥 주어지는 것도 아님을 우리는 잘 압니다. 우리는 작심삼초라는 말처럼 더 좋은 내일을 위해 계획을 하지만 마음만 잡고 실제로 스스로를 개혁하지 못하기에 그 자리에 머물고 맙니다. 또는 한 두 번 해 보고 잘 안 되거나 쉽게 목표를 달성할 수 없어서 의욕이 시들어 버리고 포기하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노력은 열심히 하지만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이루지 못할 지나치게 큰 목표를 설정했을 경우에는 절망마저 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마땅히 이루어져야 한다고 여기는 것이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않을 때는 더욱 더 심란해하고 분노마저 솟구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꿈꿉니다. 그리고 기도하며 청합니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의 무한하지 않고 유한한 존재의 인생조건과 완전하지 않고 부족한 한계를 가지고 있는 실존의 연유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의 삶을 통하여 체득한 결론,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격언을 무시할 수 없음도 기억합니다. 개인의 의지와 주변의 여건과 당사자들의 공감과 동의를 비롯한 여러 변수들에 각각 푸른 신호등이 켜졌을 때, 비로소 꿈은 서서히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그 변수들의 푸른 신호등이 하루 빨리 켜지도록 기도합니다. 그에 걸맞은 수고와 희생을 봉헌하면서 말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마르 1,21-22) 라고 전합니다. 우리는 생각과 말과 행동이 따로 노는 데 반해 예수님께서는 생각하신 바를 일러주실 뿐만 아니라 실제로 이루어내시니 그거야말로 권위가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에게는 힘들고 요원한 언행일치라고 하는 말과 행동이 같은 것을 넘어, 실제로 그 말이 지향하는 바마저 이루어내시니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던 그 유대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인 사람이 큰 소리로 외칩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24) 그의 말은 신앙고백이라고 보이기 보다는, 자신을 능가하고 자신의 존재를 방해하고 소멸시킬 존재에 대한 자기 방어와 저항의 언어로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반응을 드러내는 그에게 꾸짖으십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25) 그러자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시를 지르며 나갑니다.”(26)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27) 하며 서로 물어봅니다.

 

이 기사에서 드러난 권위는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권위입니다. 사람을 휘어잡고 사람을 노예로 삼아 사람의 삶을 지배하는 더러운 영을 몰아내고, 사람을 그 자신의 자유의지로 생각하고 결정하면서 사람답게 살도록 하시는 주 예수님께 찬미와 영광을 돌려드립니다. 그리고 그러한 권위를 사람에게 주시어 인간계로 보내주셔서 우리 인간을 구원하도록 하신 주 하느님께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주 예수님의 기적사화를 읽고 들으며 청해봅니다.

우리에게도 오셔서 주님의 거룩한 일을 하소서.

오늘 우리가 사로잡혀 있는 허황된 꿈과 허상에서 우리를 구해주십시오.

우리가 함께하는 인류공동체와 자연 피조물계와 관련이 없거나, 오히려 적대적이기까지 할 수 있는 사적이고 이기적이며 배타적인 현세의 물질적 풍요와 안녕이라는 헛되고 부질없는 욕망에서 헤어날 수 있도록 건져주십시오.

그래서 우리가 주 하느님께서 만들어 선사해주신 우리의 집인 지구를 하느님 나라로 이룰 수 있도록 깨우쳐 주시고 인도해주십시오.

 

1월 마지막 주일인 오늘은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에서 정한 해외 원조주일입니다. 29회를 맞는 해외 원조주일인 오늘의 주제는 인류는 한 가족, 우리 공동의 집이며, ‘우리 공동의 집을 치유할 수 있는 백신은 사랑입니다라는 소주제입니다.

 

한국카리타스인터내셔널 이사장인 정신철 주교님은 기후 위기의 최전선에 노출된 가난한 이들이 울부짖고 있다고 하십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처럼 전 세계적인 문제가 인류를 위협할 때 가난한 우리의 이웃들은 어떤 방패막이도 없이 그저 맨몸으로 감염병의 세계적 대유행을 맞닥뜨리고 있으며, 세계 경제 전문가들은 코로나19로 약 1억이 넘는 인구가 새로운 빈곤 계층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습니다(세계은행, 20206세계 경제 전망보고서’).”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모두는 인류는 한 가족, 우리 공동의 집을 깨우쳐야 한다고 교황님의 말을 인용하여 전하십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이러한 고통스러운 시간을 겪으면서 모든 피조물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과 인류는 진정한 한 가족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으며, 코로나19로 생겨난 새로운 빈곤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아픔은 우리의 아픔으로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으며, 서로 돕고 존중할 수 있는 새로운 형제애가 얼마나 필요한지 깨닫게 되었다고 말씀하시면서 가난한 이들을 향하여 우리의 손을 뻗으라고 권고하십니다(프란치스코, 2020년 제4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 담화 참조).”

 

이러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대책으로 정 주교님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재촉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시며, “새로운 빈곤에 맞설 사랑의 희망, 바로 그것은 한국카리타스인터내셔널이 전 세계에 전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2코린 5,14) 사랑은 우리 공동의 집을 치유할 수 있는 백신입니다. 그 사랑의 연대에 동참하여 세상의 고통받는 이웃을 기억하고 그들을 위하여 함께 기도하며 사랑과 정성을 나누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라고 여러분께 사랑의 손길을 청하십니다.

 

우리가 꿈꾸고 있는 소망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결국 우리 인류의 행복과 평화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꿈과 소망을 개인적이고 자아만족적인 것으로 국한시키거나 평가절하시키지 말고, 인류와 자연 피조물계 전체의 공존과 공생, 행복과 평화를 위해, 오늘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사랑의 나눔을 시작합시다. 나를 갖추는 만큼의 허울좋은 외적 권위와 아울러 그 누구도 침해하거나 무시할 수 없는 진정한 내적 권위인 사랑의 나눔을 실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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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4주일 꽃꽂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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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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