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강론

주님 세례 축일(나해) 마르 1,7-11; ’21/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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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21-01-01 ㅣ No.4500

주님 세례 축일(나해) 마르 1,7-11; ’21/01/10

 

 

 

성탄을 맞으며, ‘주 하느님께서 왜 오셨을까?’ ‘주 하느님께서 세상을 만드시고 인간에게 그 관리를 맡기셨으면 되었지, 굳이 인간으로 오셨어야 했을까?’는 질문들을 던져 봅니다.

 

사실 주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만드시고 나서,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그가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집짐승과 온갖 들짐승과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것을 다스리게 하자.”(창세 1,26) 라고 하시고는,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이렛날에 다 이루셨다. 그분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창세 2,2) 라고 합니다.

 

그런데 자식을 키우는 우리가 잘 알다시피, 자식을 세상에 내 놓고는 그냥 그것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성인이 될 때까지 끊임없이 먹이고, 재우고, 돌봐 주어야 합니다. 또 성인이 되었다고 해도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신경을 쓰고 마음이 갑니다. 심지어는 자녀들 간의 관계마저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이 부모의 처지이기도 합니다. 쉴 틈이 없습니다.

 

이처럼 주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좋은 곳으로 지어내시고 피조물들이 서로 돌보며 사이 좋게 살도록 하셨지만, 피조물들은 각자의 이기적인 태도와 조급하고 탐욕스러운 습성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과 의심 때문에, 지구라는 공동의 유산을 유지하며 공존하며 살지 못해왔습니다. 그 때마다, 주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해 거듭 달래고 경고하며 일러주셔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뿐! 우리는 잘 잊어버렸고, 주 하느님과 같아지려던 첫 사람 아담과 하와 이후에도 우리의 탐욕은 커져만 갔습니다. 악마가 우리 마음 속에 심어준 탐욕은 인간에게 죄를 짓도록 충동하였고, 인간의 죄는 점점 커져 마침내 악의 세력을 형성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 죄악의 세력은 인간을 죄악의 굴레에 가두고 노예로 만들기까지 하여, 급기야 사회구조악이라고 표현됩니다. 이 구조화되기까지 한 원죄의 유전 정도는, 주 하느님께서 창조 때에 심어 주신 하느님의 모상과 주 하느님의 은총으로 누리는 자유와 기쁨을 손상하는 정도까지 다다랐습니다.

 

심지어는 주 하느님을 섬기는 종교 자체도 인간 조건과 환경에 맞춰져 제도적으로 구조화되어, 주 하느님을 섬기는 순수함과 진실성이 표출되지 못하고, 마치 의무방어전을 치루는 듯 일정 기간과 방식에 따라 예식화되고 규격화되는 이른 바 하나의 체계와 체제가 되어 버렸습니다. 제도와 규정은 그 안에 내재화된 마음과 정성을 바탕으로 하지만, 규격화 됨으로써 어딘지 모르게 진실성과 열정을 약화시키는 부작용마저 가져왔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런 종교체제하의 유다인 신앙생활에 대해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에게 다가오고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고 나에 대한 그들의 경외심은 사람들에게서 배운 계명일 뿐이니”(이사 29,13) 라고 지적합니다.

 

그럼으로써 율법과 예언서를 통해 형성되고 축적된 유다 종교는 사람을 죄악에서 해방시켜 자유롭고 기쁘게 살도록 하는, 본연의 생명을 살리는 일에 지속적으로 헌신하는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또 하나의 굴레처럼 사람들을 종교 계율과 규범 속에 가두는 현상마저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 하느님의 사랑을 담고 사는 사람악마에게 영혼을 빼앗긴 사람이라는 구분이 아니라, ‘종교 규율을 지키는 사람종교 규율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라는 구분을 가져오는 오류마저 생겨났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에게 다시 주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며 생생하고 기쁘게 살도록 하는 사목적 접근이 아니라, 그 접근법 중 극히 작은 일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종교 규율을 잘 지키도록 하는 방법에 치중하는 아쉬움마저 가져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종교 체계와 신앙 생활에 대해 여러 번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 2,27)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사랑이신 주 하느님의 품 안에서 점점 떨어져 나가고 회복될 수 없을 만큼 죄악의 노예가 되어 버리는 것을 안타까워하셨고, 마침내 사람들을 구하시기 위해 아들 주 예수님을 인간계에 보내시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지만,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히브 1,1-2)

 

주 하느님께서는 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실 때, 예수님이 죄악으로 기우는 경향을 가지고 있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거스르고 강제로 막는 초월적인 신비한 힘을 가진 능력자로서가 아니라, 보통 사람과 똑 같은 인간 조건과 처지를 가지고서도 주 하느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며 주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인간으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록 나약하고 부족한 인간 본성을 지니셨고, 또 그러기에 유혹도 많이 받으셨습니다. 하지만 여러가지 현실의 한계 안에서도 그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악마의 유혹에 타협하여 죄를 짓지 않으시고, 심지어는 심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기까지 하시면서 주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아들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을 주 하느님께서는 사랑하셨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

 

오늘 예수님의 세례 사건을 그런 의미와 시각에서 바라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로서 아무런 죄도 짓지 않으셨지만, 다른 일반 사람들과 똑같이 죄인들의 회개를 위한 세례를 받으십니다. 예수님은 굳이 요한에게 가서 세례를 받지 않아도 되지만, 하느님의 본성을 포기하고 인간이 되어 오신 것처럼, 자신의 특권을 버리시고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사십니다.

 

주 예수님은 하느님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오셔서, 사람들이 처한 조건과 처지를 그대로 받아들이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처럼 죄를 짓고 죄악의 굴레에 빠져 사회구조악 같은 죄악의 노예가 되지는 않으십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히브 3,15)

 

그래서 그분은 세상을 지배하는 죄악의 세력에 의해 죽음에 처하시게 됩니다. 사도 성 베드로는 그 날을 이렇게 회상합니다.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신 계획과 예지에 따라 여러분에게 넘겨지신 그분을, 여러분은 무법자들의 손을 빌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사도 2,23) 그렇지만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다시피 그분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십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죽음에 사로잡혀 계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24) 이것이 우리의 신앙이요 현실에서 주 예수님의 구원하심을 믿고 따르는 우리의 희망이십니다. “이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고 우리는 모두 그 증인입니다.”(24) 사도 성 베드로는 유다인들에게 잡혀 죽을 것만 같은 위기에 처하여, 우리처럼 현실의 벽 앞에 두려워하며, 다락방에 숨어있다가, 성령을 받아 과감하고 용감하게 선교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온 집안은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35)

 

사람들이 묻습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37)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이 약속은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손들과 또 멀리 있는 모든 이들, 곧 주 우리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모든 이에게 해당됩니다.”(38-39) 사도행전의 저자는 베드로의 말을 받아들인 이들은 세례를 받았다. 그리하여 그날에 신자가 삼천 명가량 늘었다.”(43) 라고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죄악에서 벗어나 다시 자유롭고 기쁘게 사는 방법은 바로 복음의 빛으로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 새로 나는 길입니다. 세례를 받고 복음이 일러주는 하느님 나라를 내 일상과 이 땅에 구현하는 길입니다. 지난 주 주님 공현 대축일에, 유다인들은 구세주가 베들레헴에서 나시기로 되어 있음을 믿고 기대하고 있었지만, 정작 동방박사가 와서 알려주기까지 눈치재지 못한 어리석음을 보았습니다. 그처럼 우리도 믿기는 믿지만, 선뜻 현세의 벽 때문에 그리고 전례와 종교계율과 머리 속에서만 살아있는 신앙 때문에, 주 예수님의 말씀을 일상에서 망설이고 주저하며 구현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도 성령의 인도하심과 이끄심에 힘입어 사도 성 베드로처럼 새로 나 복음을 전하고 이루기로 합시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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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세례 축일 꽃꽂이

http://bbs.catholic.or.kr/home/bbs_view.asp?num=1&id=181623&menu=frpeterspds2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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