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강론

연중 제23주일(가해) 마태 18,15-20; ’20/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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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20-09-01 ㅣ No.4371

연중 제23주일(가해) 마태 18,15-20; ’20/09/06

프란치스코 교황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Gaudete Exaultate) V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교황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3장 스승님의 빛 안에서’, ‘스승님께 층실하여라는 소제목에서 성덕은 일종의 무아경에 빠진다는 의미가 아니다.’라고 제시하십니다. 요한 바오로 2세 성인께서 말씀하셨듯이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한 관상을 통하여 진정 새롭게 출발한다면,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과 동일시하고자 하셨던 굶주리는 자, 목마른 자, 나그네, 헐벗은 자, 병자 및 수감자 들의 얼굴에서 그분을 뵐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마태오 복음 2535-36절에 나오는 최후의 만찬 기사 내용은 단순한 사랑의 권유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비에 한 줄기 빛을 던져 주는 그리스도론의 한 구절입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고통받는 사람들에게서 그분을 알아보라고 한이 부름은 그리스도의 마음 그 자체, 곧 모든 성인이 닮고자 하는 그분의 심오한 생각과 선택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의 이 단호한 요구에 참으로 열린 마음으로 곧 해석하려 들지 말고 이 요구를 깨닫고 받아들이라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요청하는 것이 저의 의무입니다. 다시 말하여, 그 힘을 약화시킬 수 있는 만약, 그러나라는 말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성덕이란 이러한 당신의 요구 없이는 이해되거나 실천될 수 없다는 점을 명확하게 밝히셨습니다. 자비는 복음의 뛰는 심장이기 때문입니다. 추운 밤에 거리의 노숙자를 만났을 때 그를 골칫거리, 게으름뱅이, 길을 막는 걸림돌, 양심을 찌르는 가시, 정치인이 풀어야 하는 과제, 심지어 공공장소를 어지럽히는 쓰레기로 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믿음과 사랑으로 그에게 응대할 수도 있습니다. 나아가 그 사람을 자신과 똑같이 존엄한 인간, 아버지께 무한한 사랑을 받는 피조물, 하느님의 모상, 예수 그리스도께 구원받은 형제자매로 여길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의 존엄에 대한 이 생생한 인식 없이 과연 성덕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인식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건전하고도 끊임없는 불편함을 수반합니다. 비록 단 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으로 우리가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고 정당화하더라도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예로서, 캐나다 주교단은 성서적으로 이해되는 희년이란 단지 어떤 선행을 베푸는 것을 넘어선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이 점을 명확히 하였습니다. 이는 사회 변화를 추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음 세대들의 해방을 위해서도 분명히 공정한 사회 경제 체계의 회복을 목표로 해야 했습니다. 그럼으로써 더 이상 배척은 존재하지 많을 것입니다.”

 

복음의 핵심을 훼손하는 이념들이란 소제목에서 우리가 이념으로 인하여 빠지게 되는 두 가지 해로운 오류에 대해 언급하십니다. 하나는 복음의 이러한 요구들을 자신이 주님과 맺는 개별적 관계, 주님과의 내적 결합, 주님 은총에 대한 열린 마음과 분리시키는 그리스도인들의 오류입니다. 그렇게 하여 그리스도교는 일종의 비정부 기구로 변질됩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 빈첸시오 드 폴 성인, 콜카타의 데레사 성녀, 그 밖의 다른 많은 성인들이 자신들의 삶으로 증언한 빛나는 영성이 빠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 위대한 성인들에게 기도, 하느님 사랑, 복응봉독은 그 무엇도 이웃에 대한 그들의 열정적이고 효과적인 헌신을 방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였습니다.

 

또 다른 유해한 이념적 오류는 다른 사람들의 사회 참여를 피상적, 현세적, 세속적, 유물론적, 공산주의적, 대중 영합적인 것으로 보고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납니다. 그들은 마치 더 중요한 다른 문제들이 있다는 듯이, 자신들이 수호하는 특정윤리 문제나 명분만이 그들의 유일한 관심사라는 듯이, 이러한 사회 참여를 상대화 시키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명확하고 단호하며 열정적으로 무죄한 태아를 수호해야 합니다. 발달 단계와 무관하게 언제나 신성하고 모두가 사랑받아야 하는 인간 생명의 존엄이 위험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미 태어난 가난한 사람들의 생명도 마찬가지로 신성합니다. 곧 극도로 가난한 이들, 버림받은 이들, 혜택받지 못한 이들, 은밀하게 안락사에 노출된 취약한 병자들과 노인들, 인신매매 희생자들, 신종 노예살이의 피해자들, 갖가지 형태로·거부당한 이들의 생명도 신성합니다. 일부 사람들이 흥청망청 쓰고 버리며 오로지 최신 소비재에 빠져 살아가는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멀리서 이를 바라보기만 하며 자신의 삶전체를 절망적 가난 안에 살아가는 곳인 이 세상의 불의에 눈 감는 관념적 성덕을 이상적이라고 여기면 안 됩니다.

 

아울러 생명 존중의 윤리만큼이나 이민 문제도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고 하십니다. 구약성경도 한 때 이집트에서 이방인이었던 이스라엘을 상기시킵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주 하느님의 요청을 듣습니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너의 틴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리라.”(이사 58,7-8)

 

하느님께서 마음에 들어 하시는 예배라는 소제목에서 단순한 예배 참여와 기도 그리고 윤리 규범을 준수하는 것만이 아니라, 너그러운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그리고 우리가 받은 하느님 은총을 우리 형제자매에게 헌신으로 증언한다면, 우리의 예배는 하느님 마음에 들게 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기도를 바쳤는지를 확인하는 식별의 기준은 우리가 얼마나 더 자비로운 마음을 지니게 되었는지를 보면 안다고 하십니다. “자비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베푸시는 것일 뿐 아니라, 참된 히느님 자녀의 식별 기준이 되는 것이기때문입니다. 자비는 교회 생활의 토대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저는, 자비가 정의와 진리를 배척하지 않는 것이 산실이며, “무엇보다도 자비가 정의의 완성이며 하느님의 진리를 가장 찬란하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자 합니다. 자비는 천국의 열쇠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희생 제물을 필요로 하지 않으시지만, 우리 신심을 북돋우고 이웃에게 보탬을 주고자 당신께 그 희생 제물을 봉헌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이들을 비참에서 구하는 자비야말로 하느님께서 더욱 기꺼이 받으시는 희생 제물이 되는 것이고, 우리 이웃의 행복에 더욱 직접적으로 이바지하는 것입니다.”라고 강조합니다. 콜카타의 데레사 성녀는 이점을 명확히 깨달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저에게는 수많은 인간적 약점, 인간적 결핍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굽어보시어 우리, 곧 여러분과 제가 죄와 어려움과 약점들을 가졌음에도 세상에서 당신 사랑과 연민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에 대한 당신 사랑을 보여주라고 맡기셨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만 지나치게 관심을 쏟는다면 남을 돌아볼 시간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소박한 생활을 증진하고 소비 사회의 수요 열풍에 저항하지 않는다면,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진정한 관심을 기울이고 실천하기 어렵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소비 사회에서 모든 것을 소유하기를 열망하지만 만족하지 못하고 피폐해지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피상적 정보, 즉각적 커뮤니케이션, 가장 현실 등에 사로잡힌다면 우리는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우리 형제자매들의 고통받는 현실에서 멀어져 버릴 수 있습니다. 이 소용돌이의 한가운데서도 복음은 우리에게 다른 삶, 더욱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약속하며 새롭게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성인들의 힘 있는 증언은 참행복을 실천하고 최후의 심판을 위한 기준을 따르는 데에서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몇 마디의 단순한 말씀을 주셨지만 이는 모든 이에게 실제적이고 유효합니다. 그리스도교는 무엇보다도 실천에 옮기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연구와 성찰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이 또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복음을 더욱 잘 실천하도록 도움을 줄 때에만 가치가 있습니다. 이 위대한 성경 본문을 자주 읽고 기억하며 기도하고 실천하려 노력할 것을 권고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선하게 해 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참으로 행복하게 해 줄 것입니다.

 

주님의 무한하신 자비로 죄사함을 받고 살아가는 우리가 주님 사랑에 보답하는 의미로 어려운 형제자매들과 함께하는 노력을 기울여 우리 가운데 하느님 나라가 설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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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3주일 꽃꽂이

http://bbs.catholic.or.kr/home/bbs_view.asp?num=1&id=180042&menu=frpeterspds2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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