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강론

연중 제15주일(가해) 마태 13,1-9; ‘20/07/12

인쇄

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20-07-10 ㅣ No.4314

연중 제15주일(가해) 마태 13,1-9; ‘20/07/12

 

 

 

 

 

사람은 누가 무슨 말을 하든, 자신이 알아듣는 만큼만 알아듣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똑 같은 말을 들어도 자신의 귀에 들어오는 만큼만 알아듣는 경우가 있고, 다른 생각을 하다가 잘 못 들은 경우도 있고, 제대로 알아듣기는 해도 그 말을 듣고 자신에게 들려주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기꺼이 받아들이고 변화되는 새로운 삶을 살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과는 전혀 관계없는 객관적 대상으로서의 영화나 작품을 바라보듯이 한 걸음 떨어져 평가하고 분석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군중들에게 말씀하십니다.

,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마태 13,3-8)

그러시고는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9)라고 덧붙이십니다.

 

어떤 사람은 이 복음 말씀을 들으면서,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말씀을 해 주실 때 다 똑같이 좋은 말씀으로 들려주시도록 전해주시지, 왜 어떤 사람에게는 길이나 돌밭이나 가시덤불에 떨어지는 것처럼 형편없이 들리도록 전해 주시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15)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군중들이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하십니다. 그러시고는 제자들에게 따로 이 비유의 말씀을 풀어서 설명해 주십니다.

 

누구든지 하늘 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 길에 뿌려진 씨는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19)

어떤 사람은 좋은 집에 살면서 물질적으로 풍요하고, 출세를 해서 여러 사람을 거느리고 사는 것이 행복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생각을 품은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이 전혀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웬 딴 나라 이야기인가 싶기도 하고, 오히려 비웃을지도 모릅니다.

 

돌밭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그러나 그 사람 안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그는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20-21)

어떤 이들 중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의미 깊게 받아들이기고 그 말씀에서 새생명의 빛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깨달음과 감격은 머리 속에서만 이루어질 뿐 현실의 각박함이나 이해관계 속에서 곧 묻혀지고 맙니다. 하늘 나라나 영원한 생명에 대한 절박함이 없거나 간절함이 없으면 예수닝의 말씀은 그저 값비싼 골동품이요 도서관의 귀중한 자료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다른 이들을 말을 무시하라고 하지는 않으십니다. 모든 말들과 문화들과 사상들을 존중하지만, 선택의 귀로에서 상대화되거나 열등의 순위에 머무르시기는 원치 않으십니다. 다른 아버지가 그럴싸해 보인다고, 우리 아버지를 다른 아버지와 바꿀 수 없은 것처럼 말입니다.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22)

세상 경험이 많다고 여기고, 굴곡진 인생을 산 사람들 중에는 적당히라는 말을 즐겨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좋은 줄은 알지만 세상에 사람을 감격하게 하고 혹하게 하는 것이 너무 많아서 예수님의 말씀을 그런 좋은 명언 중의 하나로만 여기고 말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장 먹고 사는 것이 급한데, 일단 나 먹고 산 다음에 여유가 있어야 선택할 만한 이웃 사랑이니, 다른 이의 행복을 위한 양보니, 인류 구원을 위한 희생이니 거론할 단계가 아니냐고 반문할지도 모릅니다.

물론 살다 보면, 활동하다 보면 적당히 할 수밖에 없는 상황도 마주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한 번에 한 사람을 통해서 모든 것을 싹 하루 아침에 다 바꾸시려고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반쯤 허리를 빼고 예수님의 말씀을 저울질하거나, 다리를 반만 걸치고 시작도 하지 않은 채 비교만 하면서 어떻게 다가올지도 모를 안 좋은 상황을 미리 가정하고 걱정하며 지레짐작으로 주저앉고 만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일 수 있습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19-23)

이렇게도 살아보고 저렇게도 살아보고 나니, 예수님의 말씀이 진정 생명의 빛이더라.”고 선택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여기 저기 그럴싸한 것들과 곳들을 다 거치고 나서, 결론적으로 찾는 주 예수님께 대한 신앙고백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배냇신자로 어려서부터 아무런 의심이나 흔들림 없이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곧게 살아온 순수하고 충실한 주님과 교회의 사람으로서 묵묵히 걸어가며 성취해가는 복음의 길도 있습니다.

 

주님에게서 새생명의 말씀이라는 같은 선물을 받으면서도, 어떤 이는 자신에게 아주 귀한 것으로 여겨 감격하여 받을 수 있고, 어떤 이는 그렇게 귀하지 않은 것으로 여길 수도 있고, 심지어는 하찮은 것으로 여길 수도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떤 학자는 행복이 기대와 욕망 분의 성취도라고도 말합니다. 자신의 기대와 욕망이 크면 클수록 행복이라는 성취도는 작아질 수 밖에 없겠습니다. 그런가 하면, 자신의 기대와 욕망이 복음 말씀과는 전혀 다른 방향과 목적에 있다면, 영적인 어둠과 죽음의 그늘 아래 헤매일 수도 있겠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세상의 창조주이시며 주관자이시며 우리 인류를 구하시고 이끄시는 주 하느님의 말씀에서 인생의 길을 찾고 진리를 발견하며 영원한 생명의 길로 접어들 수만 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여러분은 복음 말씀을 통해 들려오는 주님의 사랑을 기쁘게 받아들입니까?

여러분은 복음 말씀을 통해 들려오는 주님의 사랑에 큰 감동을 받으십니까?

여러분은 복음 말씀을 통해 들려오는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그 말씀대로 살려고 하십니까?

주님의 복음 말씀이 여러분 삶에 참으로 기쁜 소식이길 바랍니다.

주님의 복음 말씀을 통해 들려오는 주님의 사랑이 여러분에게 새생명의 빛이시기를 바랍니다.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마태 13,16)

 

---------------------------------------

연중 제15주일 꽃꽂이

http://bbs.catholic.or.kr/home/bbs_view.asp?num=1&id=179645&menu=frpeterspds2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6 0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