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성당 게시판

[연탄길] 마음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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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이 [pear] 쪽지 캡슐

2001-05-19 ㅣ No.4611

김씨가 인형장사를 시작하고 나서 6개월쯤 지난 어느 날이었다.

밤 10시쯤, 한 중년의 사내가 김씨의 인형 좌판으로 다가왔다. 그는 김씨 앞에 놓여진 인형들 앞에 말없이 쪼그려 앉았다. 검게 때가 앉은 와이셔츠 위에 허름한 양복을 입고 있는 그의 얼굴엔 근심이 가득했다.

 

 " 이 인형 얼마에요? "

 

 " 신랑 신부 인형이요? 삼천원인데요, 손님. "

 

 " 하나 주세요. "

 

 " 네. "

 

 " 장사는 잘 되나요? "

 

 " 왠걸요. 하루에 서너 개도 팔지 못할 때가 많아요.  그나마 인형이라도 팔아서 이렇게 살아갈 수 있으니 다행이지요. "

 

 " 많이 파셔야 할텐데...삼천원이라고 하셨지요? "

 

 " 네.  손님."

 

 " 여기 있는 신부의 모 습이 꼭 아내를 닮아서요. "

 

 그렇게 말하며 천원짜리를 세 장을 건네주는 사내의 눈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는 봉지에 담긴 인형을 꺼내 양복 바깥 주머니에 넣고는 총총히 사라졌다.

 

 김씨가 사내를 다시 본 것은 그로부터 열흘이 지나서였다. 점퍼차림의 사내는 양손에 가득 짐을 들고 김씨에게 다가왔다. 전과는 달리 그의 얼굴은 매우 밝아 보였다.

 

 " 안녕하세요? 저 알아보시겠어요. "

 

 " 그럼요. 저번에 밤늦게 오셨던 분이시잖아요."

 

 " 그 때 사간 신랑신부 인형을 한 쌍 더 사려구요."

 

 " 아, 그러세요? "

 

 김씨는 신랑신부 인형 한 쌍을 봉지에 넣어 사내에게 주었다.  그런데 사내는 신부 인형을 꺼내 다시 김씨에게 건넸다.

 

 " 저는 신랑만 필요하니까 신부는 여기 두고 가도 되겠지요?  사실은 집에 있는 신부인형이 얼마전 가지 신랑을 잃어버렸거든요. 그래서 신랑 인형만 있으면 돼요. 그래서 신랑 인형만 있으면 돼요. "

 

 " 그럼 인형 값을 다 받기가 죄송한데......"

 

 " 무슨 말씀이세요. 마땅히 받으셔야지요. 신랑 인형만 가지고 가는 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러는건데요  뭐........."

 

 " 그래도 미안해서.................."

 

 김씨는 아무리 생각해도 미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그 때 사내는 바닥에 놓았던 보따리 안에서 물건이 담긴 검정색 봉지를 꺼냈다.

 

 " 이리고 오다가 길에서 과일 좀 샀어요. 별 거 아니지만 집에 있는 아이들 갖다 주세요. "

 

 " 왜 이런 걸.......? "

 

 " 감사의 표시니까 그냥 받아주세요. 그리고 인형 많이 파세요. "

 

 사내는 김씨에게 연거푸 감사하다며 머리 숙여 인사까지 하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 김씨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다. 그런데 그가 주고 간 과일 봉지 안을 살펴보니 그 안에는 편지 한 통이 들어 있었다.

 

  ’ 열흘 전, 나는 밤거리에서 당신을 처음 만났습니다. 그 날 나는 세상에서의 마지막 하루를 보내며 밤길을 서성이고 있었습니다. 죽기 위해 미리 봐두었던 한강으로 가는 길에서 당신을 만났던 것입니다.  무심코 당신이 있는 곳을 보았을 때 당신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인형들을 앞에 놓고 지나가는 사람돌과 일일이 시선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당신의 그런 모습에 이끌려 신랑신부 인형을 샀습니다.   

 나는 사업에 번번이 실패했고, 오랫동안 빚쟁이들에게 쫓겨다녔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은 살아갈 자신이 없어서 차라리 죽음의 길을 택하려 했던 것입니다.   

 한강에 도착한 것은 새벽 2시가 다 될 무렵이었습니다. 죽음을 향해 가는 동안 여러 번 갈등도 했고, 아내와 자식들 생각에  절망도 여러번 했습니다. 하지만 그 곳에 도착했을 때,  이상하게도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다리의 난간위로 한 쪽 발을 올려놓았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한 쪽 발을 땅에서 뗐을 때, 온 몸이 떨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눈을 꼭 감고 뛰어 내리려는 순간, 첨벙하는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고통이 내 귀를 파고들었습니다.  두려움에 깊이 찔린 나의 몸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그만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내가 떨어진 곳은 강물이 아니라 다리 위의 콘크리트 바닥이었습니다.  나 자신도 그 순간을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나보다 먼저 어떤 물건이 강물로  떨어지며 들려준 아주 작은 소리가 내 의식 속을 송곳처럼 찌르고 지나갔습니다.

 나보다 먼저 물 속으로 뛰어든 것은 내 주머니 속에 있던 인형이었습니다.  만일 그 인형이 나보다 먼저 떨어지지 않았다면, 나는 강물로 몸을 던지고 말았을 겁니다.

 다리 난간에 기대어 한참을 울었습니다. 그 순간 아내와 아이들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왜인지는 몰라도 당신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가난하지만 세상을 증오하지 않고 거리에서 인형을 팔며 세상을 끌어안으려는 당신의 모습이 선뜻 내 앞으로 스쳐 지나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그 날 밤 당신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겁니다. 당신께 무어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참, 그리고 저도 내일부터 장사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거리에서 양말이라도 팔아보려고요. 오늘은 공장으로 직접 가서 양말을 사 가지고 오는 길입니다.  저에게 이런 용기와 희망을 주신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

 

 그의 편지를 읽고 난 김씨에게도 무어라 말할 수 없는 힘이 솟아났다.  오늘 하루 하나 밖에 팔지 못한 바닥의 인형들을 바라보며 그는 아내와 딸아이의 소중한 꿈을 생각했다. 그리고 장사를 시작하고 나서 하루하루 안으로 기어들어가기만 했던 목소리에 기운이 실려 우렁차에 밖으로 터져 나왔다.

 

 " 인형 사세요!   예쁜 인형들 사가세요! "

 

사람은 누구에게나 마음의 정원이 있다. 그 정원에 지금 무엇이 심어져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런데 사람들은 끊임없이 계획을 세운다.

 ’사과나무를 심었으니 다음엔 포도나무를 심어야지. 그리고 그 다음엔 소나무를 꼭 심고 말거야......"

 

 무엇을 심을까 고민하는 한 그 사람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마음만 있다면 풀 한포기만으로도 아름다워질 수 있는게 우리의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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