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강론
연중 제26주일(다해) 루카 16,19-31; '25/09/28 |
---|
연중 제26주일(다해) 루카 16,19-31; '25/09/28 저는 어릴 때 부모님의 사랑을 담뿍 받고 자랐습니다. 필요할 때마다 모자라지 않게 먹을 것, 입을 것을 다 채워주셔서 풍요롭게 자라던 저에게도 아쉬움은 있었습니다. 그것은 저도 다른 아이처럼 정규적으로 용돈을 받고 싶다는 복에 겨운 바람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부자와 가난한 라자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부자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루카 16,19)는 데 반해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20-21절)라고 둘을 비교하여 전합니다. 부자는 이름도 없고 가난한 자는 그대로 이름이 있습니다. 둘 다 죽었는데, 라자로는 천사들이 아브라함 곁으로 데려갔고, 부자는 땅에 묻히고 저승에서 고통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브라함 곁에 있는 라자로를 보면서 부자는 지금 자신이 처해있는 고통에 대해 하소연을 합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25-26절)는 되돌이킬 수 없는 사후세계의 냉엄한 판결을 내려버립니다. 더 이상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에서 벗어날 희망이 없다고 느낀 부자는 말합니다. “그렇다면 할아버지, 제발 라자로를 제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저에게 다섯 형제가 있는데, 라자로가 그들에게 경고하여 그들만은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27-28절) 부자는 자신이 고통의 늪에서 건져지는 것은 안 되더라도 자신의 남은 가족이라도 죽음의 길에서 건져보려고 절박하게 청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29절) 라고 말하며 그 청을 냉정하게 잘라버립니다. 부자는 자신의 어리석었던 과거를 떠올리며, 자식들에게 강력한 경고를 전해주어야만 한다고 생각하고는 “안 됩니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가야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30절)라고 또 청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현세 인간들이 복에 겨운 상황에서도 불평불만을 하고 고집스럽게 주 하느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사실을 정확히 직시하시고는 마치 벌이라도 내리시려는 듯이 선언합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31절) 우리는 이 부자와 라자로의 사후세계와 거기서 만난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 할아버지의 예화를 통해 몇 가지 성경의 가르침을 접하게 됩니다. 첫 번째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부자의 선심공덕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이 땅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재물을 가지고 가난한 이들과 나누지 않고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끼리 흥청망청 부족함 없이 살던 이들은 죽은 후에 땅에 묻히고 저승에 가서 고통을 겪게 될 것이라는 사후세계에 대한 경고와 그에 따라 현세 생활을 고쳐먹어야 한다는 회개에로의 초대입니다. 오늘 미사의 첫 번째 독서에서 아모스 예언자는 가난한 이들과 나누지 않고 흥청망청하는 부자들의 방탕을 질타합니다. “불행하여라, 시온에서 걱정 없이 사는 자들,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 놓고 사는 자들! 그들은 상아 침상 위에 자리 잡고, 안락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양 떼에서 고른 어린양을 잡아먹고, 우리에서 가려낸 송아지를 잡아먹는다. 수금 소리에 따라 되잖은 노래를 불러 대고, 다윗이나 된 듯이 악기들을 만들어 낸다. 대접으로 포도주를 퍼마시고, 최고급 향유를 몸에 바르면서도, 요셉 집안이 망하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제 그들이 맨 먼저 사로잡혀 끌려가리니, 비스듬히 누운 자들의 흥청거림도 끝장나고 말리라.”(아모 6,1.4-7) 두 번째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희망과 위로입니다. 이 땅에서 어려움과 고통을 겪던 이들은 죽은 후에 땅에 묻혀 저승으로 가지 않고, 천사들의 손에 안겨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곁으로 가서 이 땅에서의 아픔에 대한 위로와 보상을 받을 것이라는 희망입니다. 세 번째는 믿음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믿고 따르려는 선한 이들은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따르면 됩니다. 그러나 믿고 따르려고 하지 않는 이들은 누가 가서 무슨 말을 해도 믿거나 따르지 않을 것임을 자성적으로 깨닫게 됩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삶은 세상의 여타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우리의 나약한 신앙 때문에 얼굴이 붉어집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신 복음의 비유를 통해, 자신이 처한 현실에 대해 감사할 줄 모르고, 물질적이고도 현세적으로 더 높이 오르고, 더 많이 가지고, 더 오래 풍족하기만을 바라는, 인간의 끝없는 욕망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우리의 어리석음을 돌아봅니다. 아울러 자신이 가지고 있다고 여기는 재물이 실제로는 사회의 생산과 분배의 제도를 통해 주님께서 자신에게 맡겨놓으신 것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적절하게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재물 관리행태를 되돌아 봅니다. 또 우리보다 경제적으로나 현세적으로 더 낮거나 더 적거나 더 부족한 현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들과 삶을 나누도록 우리에게 형제자매를 보내준 사실을 망각하고, 우리 눈에 띄는 것 자체를 불쾌해 하고 피하려 하며 굳이 외면하며 살아가면서도, 마치 당연한 것처럼 여기는 우리 사회의 만연한 죄악의 상황을 가슴 아프게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성경은 부자들의 사치스러운 행태, 아니 동료 이웃을 돌보지 않는 삶을 질타합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의 전승 안에 땅과 그 땅에서 나온 재물은 하느님께서 그 민족의 풍요를 위해 나누어 주신 선물이라는 사상에서 근거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다같이 살라고 맡긴 그 재물은 이스라엘 전체 공동체와 나누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이를 따르지 않아 동생 아벨을 죽이고 저주 받은 카인의 복에 겨운 항변을 너무나도 잘 기억합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창세 4,9) 오늘 두 번째 독서에서 성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권고합니다. “하느님의 사람이여, 의로움과 신심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 없고 나무랄 데 없이 계명을 지키십시오.”(1티모 6,11.14)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노고를 잠시라도 멈출 필요는 없겠지만, 복에 겹게 다가오는 하느님의 선물을 형제들과 공유함으로써,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 13,34)는 주님의 새 계명을 충실히 지키는 신실한 주님의 자녀가 되어, 이 땅에 함께 하느님 나라를 이루기로 합시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루카 16,25) ----------------------------------------------- 연중 제26주일 꽃꽂이https://bbs.catholic.or.kr/home/bbs_view.asp?num=2&id=202658&PSIZE=20&searchkey=N&menu=frpeterspds2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