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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 훈화(Allocutio)의 진정한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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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윤석 [drhur] 쪽지 캡슐

2003-12-03 ㅣ No.51

  훈화(Allocutio)

 

훈화(訓話)내지는 알로꾸시오(Allocutio)라고 통상적으로 지칭되는 레지오 회합시의 영적지도자나 단장의 연설은 그 단어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를 역사적의미에서 구체적으로 알 때  비로소 그 가치를 더 잘 인식할 수 있으며 훈화의 방법과 내용선정등을 더 잘할 수 있다.

그러면 훈화(訓話)라고 번역된 알로꾸시오(Allocutio)의 자원(字源)을 통해 그 의미를 알아보자!

알로꾸시오(Allocutio)라는 단어는 알로꾸오르(Alloquor)라는 단어의 명사형이다.

알로꾸오르(Alloquor)라는 단어는 두개의 단어가 합성된 단어이다.

알로꾸오르(Alloquor)는 ‘말하다, 떠들다,이야기하다, 수작을 부리다’ 등의 의미를 갖은 동사 로꾸오르(Loquor)와 ‘날개,어깨,도움,격려,기병대’라는 뜻을 갖은 알라(Ala)라는 단어가 합성된 단어이다.

 로꾸오르(Loquor)는 일반적 대화와 발설이외에 단순히 목적없이 사람이 입을 통해 말을 방출하는 의미등의 넓은 뜻을 갖고 있다. 의미없이 던지는 농담이나 집단적으로 떠드는 소리,수작을 부리다등의 비속어도 포함된다. 이 로꾸오르(Loquor)의 명사형이 로꾸시오(Locutio)이다.

이 두개의 단어의 합성으로 된 알로꾸오르(Alloquor)의 뜻은 다음과 같이 다양하게 해석된다.

1.구체적 대상에게 이야기를 하다. 2. 연설하다. 감동시키는 교훈을 이야기 하다.훈화하다. 3.위로의 말을 하다. 4. 군인들을 격려하다. 5. 신에게 감사하다. 청원하다.

이렇게 다섯 개의 의미들을 동시에 담고 있는 알로꾸오르(Alloquor)의 명사형이 알로꾸시오(Allocutio)이다.

즉 우리가 훈화(訓話)라고만 번역하여 사용하는 이 알로꾸시오(Allocutio)의 뜻은 매우 구체적인 의미와 목적, 그리고 대상을 갖고 있다. 훈화(訓話)라는 말은 알로꾸시오(Allocutio)가 갖고 있는 한가지 의미를 나타낸다. 훈화(訓話)는 알로꾸시오의 부분집합적인 의미이다. 그러면 구체적인 뜻을 하나 하나 풀어보도록 하자!

알로꾸시오(Allocutio)는 그 첫째의 뜻에서 보듯이 구체적 대상에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로꾸오르(Loquor)가 특정대상이 아닌 불특정 대상 ,고정적이지 않는 대상을 갖는 반면 알로꾸시오(Allocutio)는 바로 고유한 대상자만을 청중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일반 불특정자가 들었을 경우 이해할 수 없는 고유한 그들만의 정신과 내용이 생겨날 수 있다.

둘째 알로꾸시오(Allocutio)는 특정 공동체에게 하는 법적인 연설로서 감동을 일으키는 긍정적인 효과를 그 목적으로 한다. 공동체를 향해 하는 공인(公人)으로서의 연설이기 때문에 규범적인 양식과 법적 근거에 준해야 한다. 레지오 마리애에서 행해지는 모든 알로꾸시오의 법적인 근거와 규범은 바로 교본이다. 따라서 레지오 마리애에 있어서 알로꾸시오(Allocutio)의 내용을 교본으로 삼고 또한 교본이 알로꾸시오(Allocutio)을 이해하는 척도와 도구가 되고 교본의 지시사항과 정신의 실천과 경험들이 단원들에게 용기와 활력을 고무시켜는 것이다.

 알로꾸시오의 내용이 교본에만 너무 집중된다면 그 주제가 너무 한정적이며 틀에 박혀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을 자연스럽게 제기할 수도 있겠다. 너무 이론과 규범중심이 아니겠는가? 혹은 다양한 훈화의 화제가 많고 변화되는 사회와 사건속에서 재미있고 감동적이며 교훈적인 내용을 담은 복음적 소재나 묵상이면 교본의 언어와 상관없이 그 내용으로 삼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질문 또한 대두될 수 있다. 휴머니즘에 바탕을 둔 감동적 수필단편같은 글역시 괜찮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질문들은 세가지점을 먼저 숙지한 질문인가를 검토하여야 한다. 첫째, 레지오 마리애의 교본은 먼저 규범과 이론이 먼저 제시되고 이것을 실천하는 일반적인 의미의 교과서적인 교본이 아니라는 것이다. 보통 단체나 어떤 규범의 교본이라 함은 매우 유통성 없는 단일한 행동과 규범의 사례들만을 나열한 지침서를 쉽게 떠올린다. 하지만 레지오 마리애의 교본은 이와는 다른 여러면을 갖고 있다. 교본은 바로 일치된 성모님의 정신안에서 기도와 봉사의 삶이 먼저 수행되었고 이 삶의 자리에서 기도를 통한 성찰이라는 경험이 축적되어 생겨진 살아있는 책이라는 점이다. 레지오 마리애의 교본은 그 탄생에서부터 선실천 후이론정립의 수순을 밟아 가장 많은 교회의 인준을 받았으며 시대의 증표에 대처하는 보완을 거듭하였다.

 둘째 레지오 마리애의 교본이 담고 있는 정신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인 참여와 연대의 표어를 앞서 주창한 선구자적 개척정신이다.

레지오 마리애의 교본이 쓰여진 당시에는 평신도가 교회의 선교와 교육등의 중추적인 활동에 있어서 주변인으로서의 인식만이 강했던 소극적 시대였다. 이를 과감히 탈피하고 평신도 사도직의 개념을 넓게 확산시키며 성모신심을 통한 복음화의 등불을 지핀 것이 바로 레지오 마리애이다. 레지오 마리애의 교본처럼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토착화된 언어로 체계적으로 보담고 있는 서적은 매우 드물다.

교본은 매우 많은 지면을 통해 공의회의 정신을 담고 있어서 교본을 평신도 사도직 분야를 가장 잘 설명한 제2의 바티칸 공의회 문헌 해설서라고 까지 한다. 레지오 마리애의 교본은 따라서 내용상 단순히 하나의 성모신심 단체의 지침서의 차원을 넘어선 가치와 내용을 담고 있다.

 필자는 소년레지오 시절부터 교본연구를 시작하여 신학과 대학원에 이르러 레지오 마리애의 교본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막힘 없이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만큼 레지오 마리애 교본은 체계적인 교회의 정신과 역사에 대한 지식과 영성적인 지식과 더불어 봉사의 실천적 경험이 겸비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따라서 교본을 중심으로 하는 알로꾸시오를 통해 단원들의 교회의 사명과 역사 특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과 평신도 사도직의 의미와 실현 방법, 그리고 성모님을 닮으려는 영성의 고양(高揚)과 봉사의 구체적 원리를 알게 된다. 교본은 매우 다양하고 체계적이며 현대적이고 선구자적이며 복음적이며 영성적이기 때문에 몇 번 교본을 읽고 나서 교본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는 것은 매우 섣부른 생각이며 교만한 언급이다. 특히 한국 실정이나 현대에 상황에 맞지 않는다면서 레지오 마리애의 성격을 매우 맹종적이며 고착적인 면으로 오도(誤導)한다면 이것은 무지에서 오는 커다란 착각이다.

셋째 레지오 마리애 교본은 토착화의 모범이다. 교본의 뿌리는 이 시대를 향해 서있는 구원의 성사인 보편교회의 정신을 반영하는 것이다. 또한 그 줄기는 교회의 구원사업을 각지역과 문화권안에서 어떻게 적응하며 참여하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하는 것은 각 지역 레지오 마리애의 몫이다. 우리 지역의 특수성이나 우리 본당의 상황, 우리 쁘레시디움의 상황, 나 자신의 상황에서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복음화의 임무를 수행하는 가?하는 것! 이 개별적 방법론까지를 교본이 모두 담아낼수도 없을 것이며 담아서도 안된다. 레지오를 모르는 사람은 세속의 군대와 동일한 언로(言路)의 폐쇄성을 레지오가 갖고 있다고 믿는다. 상명하복(上命下服)이 군대의 특징이며 당연한 원칙이지만 성모님의 겸손을 바탕으로한 하느님의 군대는 자유의지와 대화의 원칙안에 천상적 유대감으로 성령으로 하나된 신비체를 이루고 있다. 이것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각 부분인 우리처럼 영적인 은혜와 성사의 신비로 우리는 하나된 것이다.

레지오의 각종 사업보고와 기타토의,교본연구와 활동보고를 통해 조직안에서 구성원 하나하나의 의견을 이처럼 존중하고 많은 기회를 통해 수렴하고 공인하며 반영하는 단체는 드물다. 이렇게 레지오의 언로(言路)의 생동적인 개방성을 레지오 마리애 내부와 외부에서도 너무 작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훈화의 내용이 너무 교본에 못박혔다는 말이나 교본이 너무 시대적으로 고착되고 구체성이 떨어졌다고 말을 하려한다면 적어도 교회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난 이후에 생각해 볼 문제이다. 위의 표현은 교회의 영성과 정신 그리고 교본 둘다를 모르고 하는 이야기다.

 알로꾸시오(Allocutio)는 셋째로 위로의 말이다. 잘못의 지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의미의 해석이며 실패한 부분에 대한 기도하는 위로의 말이 그 내용이 되어야 한다. 자꾸 단점만을 지적한다면 이것을 알로꾸시오가 아니다. 그것은 로꾸시오이다.

넷째, 군인들을 위로하는 말이다. 절박하면서도 운명 공동체인 군인들에게 지휘관이 하는 말이다. 즉 승리에 대한 보상이 있는 말이며 생(生)과 사(死)의 기로(岐路)에 있는 절박한 말이다. 이 말하나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할 수 있다. 우리는 레지오 마리애의 훈화를 들을때 과연 이러한 긴장감을 갖고 듣는가? 성모님의 전구하심 없이 그리고 예수님의 구원의지 없이 우리의 운명이 어떻게 되겠는가? 구원의 도구인 우리가 지금 게으름에 빠져있다면 어둠속의 영혼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훈화는 단순히 감동 있고 좋은 타이름과 명상의 한대목이 결코아니다. 싸움직전의 고요속에서 외치는 책임관 있는 지휘관의 유언이다.

마지막으로 알로꾸시오는 하느님께 감사하는 내용이며 청원기도이다. 알로꾸시오를 이루어 주실 분은 바로 하느님이시다.

이상에서 알아본 것처럼 알로꾸시오는 매우 비장하면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적어도 이젠 단순히 훈계어린 담화로서의 뿌연 의미에서 벗어나 구체적 의미로서의 알로꾸시오를 준비하기위해 노력하여야한다.

알로꾸시오를 준비하는 모든 지휘관들이여 여러분의 알로꾸시오는 바로 어둠과의 전쟁터에서 외치는 빛의 군대의 유언이며, 성모님 군대의 독수리와 같은 불타는 활력의 눈빛을 일으키며, 전진하는 군대의 지혜의 눈을 일깨워 주며, 처지고 나약해진 군인들의 허리를 다시 일으키는 모범이 되는 하느님의 살아있는 쌍날칼이다!

 많은 시간과 기도를 통해 성령이 깃든 알차고 감동어린 알로꾸시오를 준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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