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온전한 봉헌과 온전한 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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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윤석 [drhur] 쪽지 캡슐

2007-06-09 ㅣ No.411

"가치를 아는 사람은 아름다움을 아는 사람이고 진정한 아름다움을 아는 사람은 진정한 가치가 되는 사람이다."

 

오늘 예수님은 과부의 동전 두닢과 부자들의 봉헌을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주의해야할 것은 예수님께서 과부의 온전한 봉헌을 강조하기 위해 결코 부자들의 봉헌을 비난하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복음에서 분명 "많은 부자들이 큰돈을 넣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봉헌을 받으실때 절대적인 가치로 평가하지 않으시고 그 사람의 처지를 바탕삼아 그 봉헌의 가치를 판단하십니다.

 

얼마나 그것이 받는 사람에게는 수고로움이겠습니까?

 

일일히 봉헌한 이의 처지를 기준으로 봉헌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한사람 한사람의 처지를 개별적으로 잘알고 그 마음또한 헤아려야합니다.

 

이일은 분명 하느님의 전능하심과 무한한 사랑이외에 그 어떤 사랑이 가능할것인가?

 

과부의 온전한 봉헌은 바로 그 처지를 알아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에서 비롯한 온전한 수용력을 통해 그 봉헌이 가치를 발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오늘 과부의 온전한 봉헌을 온전한 수용으로 받아들이십니다.

 

또한 주목하여야 할점이 있습니다.

 

과부의 아름다운 봉헌을 칭찬하실때 많은 사람들이 듣게 큰소리로 선포하신 것이 아니라 상황을 고려하여 "가까이"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성서 원문에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는 말은 신중한 배려로 인식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서에 언급된 데로 "많은 부자들이 큰 돈을 냈다."을 생각하시고 제자들에게 조용히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만약  큰소리로 과부의 봉헌만을 칭찬하는 말씀만 하셨다면 편가르기식 행동이었을 것입니다.

 

이것 역시 모든 처지를 고려한 처신입니다.

 

과부의 봉헌만 뿐아닐 부자들의 그 얼마도 소중히 여기신 그분의 처신은 봉헌에 대한 온전한 수용능력을 드러냅니다.

 

주는 것보다 받는것이 더 어렵다고 합니다.

 

주는 가치보다 받는 가치는 더 소중하다고 느껴집니다.

 

온전한 봉헌과 온전한 수용이 만나는 오늘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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