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사진 자료실

[성당] 원주교구 용소막 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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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03-26 ㅣ No.1209

 

[믿음의 고향을 찾아서] 원주교구 용소막 성당 (상)

100년 풍상 이겨낸 '신앙 못자리'

 

 

(사진설명)

1. 1915년에 세워진 용소막성당 전경. 지붕 경사가 가파른 것은 건축 당시 기술자였던 중국인이 도면대로 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기둥의 길이를 잘라내고 지었기 때문이다.

2. 용소막성당 내부는 고딕 양식을 변형시킨 소규모 벽돌조 성당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3. 용소막본당 수녀들과 신자들이 성당 뒷동산에 조성된 십자가의 길에서 기도를 바치고 있다.

 

 

강원도에서 가장 오래된 본당인 풍수원본당(1888년 설립)도 그렇거니와 강원도 세번째 본당인 용소막본당(1904년)을 찾아갔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성당이 참으로 외진 곳에 있다는 점이다. 근처에 고속도로가 시원스레 뚫린 지금도 한적한 시골에 불과한데, 100여년 전에는 얼마나 구석진 골짜기였을까. 유서깊은 성당이 왜 이런 시골에서 먼저 지어졌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알고 보니 풍수원본당과 마찬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즉 병인박해(1866년) 당시 멀리 수원 지방에서 피난온 몇몇 신자 가족이 강원도 평창 지역에 몰려 살다가 박해가 뜸해지자 용소막(龍召幕)에서 멀지 않은 황둔과 오미 마을에 정착했고, 이들이 용소막을 중심으로 모여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서 용소막이 자연스레 신앙 못자리가 된 것이다. 한국교회 초기에 설립된 많은 본당들과 사연이 비슷하다.

 

얼마 전 중앙고속도로가 개통된 이후 용소막성당(강원도 원주시 신림면 용암2리 소재)은 쉽게 찾아갈 수 있는 명소가 됐다. 서울에서 영동고속도로로 가다가 원주 못미쳐 만종분기점에서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제천 방향으로 20여분 달리면 신림 톨게이트가 나온다. 거기서 빠져나와 배론 성지쪽으로 5분 정도 달리면 오른쪽으로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의 종탑을 지닌, 작지만 아름다운 성당이 쉽게 눈에 띈다. 야트막한 뒷동산을 배경으로 아름드리 느티나무 몇 그루에 둘러싸여 있는 용소막성당. 처음 와본 사람들도 전혀 낯설지 않을 만큼 포근한 느낌을 준다.

 

지금 성당이 세워진 것은 1915년이고, 용소막공소가 본당으로 승격한 것은 그로부터 11년 전인 1904년이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업적을 남긴 이가 바로 최도철(바르나바, 1848∼1931년)이라는 인물로, 그의 인생사가 곧 초기 용소막본당사나 다름 없다. 19살 때 병인박해를 만나 이곳저곳 숨어 다니며 신앙을 지키던 그는 풍수원본당 르메르 신부에게서 전교회장으로 임명돼 활발한 전교활동을 벌인다. 1898년 용소막에 정착한 그가 그해 마련한 초가 10칸 짜리 경당은 용소막본당의 실질적 출발이다. 이듬해 오미에 살던 백씨네와 행주에 살던 선씨네가 이주해옴으로써 용소막은 본격적인 교우촌을 이루게 됐고, 1904년 마침내 본당으로 승격하는 기쁨을 맛보았다. 풍수원·원주(현재 원동)본당에 이어 강원도 세번째 본당이 탄생한 것이다.

 

초대 주임은 1903년에 입국한 프와요(파리외방전교회) 신부였다. 본당 설립 당시 관할지역은 원주군·영월군·평창군·제천군·단양군 등 무려 5개 군이었으며, 공소는 17개나 되었다. 사방 300리에 흩어져 사는 신자 수는 864명. 용소막본당은 프와요 신부와 최도철·최영식 부자의 헌신적 노력에 힘입어 1910년 무렵에는 신자 수 2000여명의 대형 본당으로 급성장했다.

 

제2대 기요 신부가 시작한 성전 신축 공사는 제3대 주임 시잘레 신부에 의해 마무리된다. 장티푸스에 걸려 앓고 있는 가족을 끌고 나와 밤샘 작업을 할 만큼 열성을 보였던 최도철 회장과 신자들이 적극 나서서 성당 신축 공사를 열심히 도운 결과, 공사에 들어간 지 3년 만인 1915년 가을 마침내 아담한 벽돌 양옥 성당을 완공했다.

 

용소막성당은 지붕 경사가 상당히 가파른데, 건축 기술자였던 중국인이 도면대로 짓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기둥 길이를 2자씩 잘라내고 지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1939년 춘천교구가 서울대교구에서 분리됨에 따라 용소막본당은 춘천교구로 이관되어 골롬반외방선교회 선교사들 관할에 들어갔다. 10대 주임으로 부임한 주재용 신부 때는 한국전쟁으로 말미암아 성당도 큰 피해를 입었다. 성당은 공산군 식량창고로 전락했고, 성당 내부 성모상이 총탄을 맞아 목과 전신이 파손됐을 뿐 아니라 천장도 총탄 세례를 받아 크게 훼손됐다. 성당이 완전히 파괴되지 않고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이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랄까.

 

용소막본당은 1965년 원주교구가 춘천교구에서 분리되면서 다시 원주교구 소속이 된다. 이후 용소막본당은 관할 지역 분할과 주민들의 도시 진출 현상으로 교세가 크게 감소했다. 한때 신자 수 3000여명을 자랑했던 신앙의 요람 용소막본당. 설립 100주년을 맞는 올해 신자 수는 870여명으로, 100년 전 본당 설립 당시 신자 수와 거의 일치한다. 우연치고는 기막힌 우연이다. 용소막본당 신자들은 설립 당시 그 마음으로 돌아가 새출발하라는 하느님 뜻으로 담담히 받아들인다.

 

<평화신문, 제761호(2004년 2월 22일), 남정률 기자>

 

 

[믿음의 고향을 찾아서] 원주교구 용소막 성당 (하)

5월 본당설립 100돌, '100년 전 신앙공동체' 재현

 

 

(사진설명)

1. 성당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고해소. 수염 긴 외국 사제가 금방이라도 뛰쳐나올 것 같다.

2. 성당 바로 옆에 있는 선종완 신부 유물관 내부. 고인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유품 380여점과 서적류 300여권이 전시돼 있다.

3. 본당 신자들이 국산 콩만 사용해 일일이 손으로 만드는 용소막 메주를 자랑하고 있다.

 

 

용소막성당 입구에 있는 안내 표지판은 성당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앞면 가운데 돌출한 종탑을 둔 장방형 평면의 벽돌조 건물로, 벽체는 붉은 벽돌로 쌓고 버팀벽은 회색 벽돌을 사용했다. 창 형태는 모두 둥근 아치형이며, 테두리는 회색 벽돌로 장식했다. 고딕양식을 변형시킨 소규모 벽돌조 성당의 전형적 형태이다."

 

1986년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06호로 지정된 용소막성당은 교회 건축물로서는 그다지 특이할 게 없다. 흔히 생각하는 뾰족탑 성당 건물을 떠올리면 거의 그대로다. 하지만 음식으로 치면 밥과 김치 같다고나 할까. 처음 봐도 낯설지 않고 포근한 느낌을 주는 건 건물 모습이 흔한 것이기도 하지만 100년 풍상을 견뎌온 세월의 이끼가 외할머니 주름살처럼 성당 곳곳에 배어 있기 때문이리라.

 

용소막성당을 빛낸 인물로는 선종완(1915∼1976) 신부가 단연 첫손에 꼽힌다.  성당 바로 앞마당 터에서 태어난 선 신부는 1960년 성모영보수녀회를 설립하고 한국교회에서는 처음으로 구약성서를 우리말로 옮기는 데 혼신의 힘을 쏟는 등 한국교회사에 큰 족적을 남긴 거목. 용소막성당을 찾는 이라면 성당 왼편에 있는 '사제 선종완 라우렌시오 유물관'을 지나쳐서는 안될 것이다.

 

현재 이 유물관에 전시된 유품은 고인이 사용하던 낡은 책상을 비롯해 손목시계, 우산, 지팡이, 제의·제구들, 의류 등 유품 380여점과 각종 서적류 300여권. 선 신부의 생생한 숨결을 느끼게 하는 다양한 전시물들은 한평생을 오롯이 하느님께 바친 고인의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평소 이 유물관은 잠겨 있는데, 실망하지 말고 수녀원(033-763-2342)으로 전화하면 얼른 달려나와 문을 열어준다.

 

용소막성당을 성지순례 코스로 주저하지 않고 추천할 수 있는 것은 성당도 성당이거니와 승용차로 10분 거리(제천 방향)에 묘재와 배론성지가 연이어 있기 때문이다. 황사영이 숨어서 백서를 쓴 토굴과 최양업 신부 묘소,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 신학교인 성요셉 신학당 터가 있는 배론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는 성지 중의 성지. 또한 묘재는 남종삼(요한) 성인의 부친 남상교(아우구스티노)가 관직에서 물러나 신앙생활에 전념하던 유택이 있는 곳으로, 이왕 나선 걸음이라면 묘재와 배론 모두 둘러보기를 권한다. 성지순례라는 다소 무거운 분위기에서 벗어나 봄나들이로도 그만인 아름다운 풍광이 멀리서 온 순례객들을 반길 것이다.

 

용소막성당도 여느 시골 성당과 마찬가지로 노인 신자들이 대부분이고, 본당 재정 또한 넉넉지 않다. 열악한 본당 재정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 것이 바로 피정의 집 운영과 20년 넘게 해오고 있는 메주 판매다. 특히 용소막 메주는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한해 평균 콩 250여가마를 사용하는데, 전국적으로 20여개 본당이 이곳 메주를 주문한다고 한다. 김순녀(마리아 막달레나, 47, 본당 성모회장)씨는 "국산 콩만 쓰고 본당 신자들이 재래식으로 만드는 용소막 메주를 한번 맛본 사람은 반드시 다시 찾을 정도로 최고의 맛과 품질을 자랑한다"면서 용소막 간장·된장과 함께 메주를 적극 권했다. 구입 문의 : 033-763-5330

 

지난해 이학근 신부를 주임으로 맞은 용소막본당은 5월5일로 예정된 본당 설립 100주년 행사 준비에 여념이 없다. 이 신부는 100주년 준비 일환으로 지난해 뒷산에 십자가의 길을 조성한 데 이어 비만 오면 질척거렸던 성당 앞마당에 잔디를 심고 벽돌길을 새로 만들었다. 또 바깥에서 미사를 봉헌할 수 있도록 야외제대를 마련했으며, 메주 공장도 깨끗이 단장했다. 뒷산에는 조만간 로사리오 동산을 만들 계획이다.

 

이 신부는 이같은 외형적 준비 못지않게 코를 풀어도 '100주년!'하고 풀라고 할 만큼 신자 개개인의 내적 준비를 강조해왔다. 이 신부가 부임 이래 지금까지 각종 피정과 교육, 미사 강론 등을 통해 강조한 100주년 정신은 바로 본당 설립 당시의 정신, 다시 말해 초대 교회 정신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이 신부는 "지금 본당 형편이 어렵다고 한들 아무렴 100년 전만큼 힘들기야 하겠냐"고 반문하면서 하느님을 중심으로 한마음 한뜻으로 똘똘 뭉쳤던 100년전 신앙공동체를 꼭 재현해보고 싶다는 강한 의지를 내비쳤다.

 

"처음 부임했을 때는 어떻게 준비하나 막막하기만 했는데, 지금은 신자들이 너무 잘 도와줄 뿐 아니라 활기가 넘칩니다. 공동체가 기도로 하나될 때 다 이루어진다는 진리를 체험하고 있는 거죠. 내적으로나 외형적으로나 순례객들 발길을 끄는 용소막성당으로 이끌어 나가겠습니다."

 

<평화신문, 제762호(2004년 2월 29일), 남정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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