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선물

파리의 역사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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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윤석 [drhur] 쪽지 캡슐

2003-09-03 ㅣ No.161

파리라는 명칭은 기원전부터 이곳에 살던 갈리아족(族)의 한 부족인 파리시이(Parisii) 부족의 이름을 딴 것이다. 로마인들은 지금의 시테섬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부락을 루테티아(Lutetia)라고 불렀으며 파리라는 이름은 3세기부터 사용되었다. 갈리아 지방을 원정하였던 카이사르에게 점령된 다음부터 로마화(化)가 진행되어 목욕탕·투기장(鬪技場)·주피터신전 등이 축조되었다. 4세기에 게르만족의 침입, 5세기에는 훈족의 침입으로 대부분 어민·선원인 마을 사람들이 섬에 유폐되기도 하였으나 6세기 초 메로빙거왕조의 수도가 된 이후(10∼11세기경 랭스로 옮겼던 때를 제외하고) 정치중심지가 되었다. 그 당시에 훈족의 공격으로부터 파리를 지켰던 성녀 준비에브는 파리의 수호신이 되었다. 그뒤 9세기에 북방의 해적이었던 노르만인(人)들이 침입해왔을 때 그들을 무찔렀던 파리 백작 위그 카페가 카페왕조를 세운 곳도 파리였다.

 

로마의 지배 밑에서는 선원조합이 생기고 상업이 활발하였으나 6∼10세기의 파리는 사제(司祭)의 도시로 바뀌었다. 1000년경부터 두번째 성벽이 축조되고 시정(市政)도 정비되었다. 그러나 중세 도시로서의 체제를 갖춘 것은 필리프 2세(재위 1180∼1223) 때이다. 이때 축조된 성벽의 이름이 지금도 두 군데에 남아 있다. 십자군이 활발하였던 시대에 파리에서는 노트르담대성당의 건설이 진행되고 신학 중심의 소르본대학이 창설되었다. 교황과 국왕이 세력다툼을 벌였던 14세기 초 필리프 4세(재위 1285∼1314)는 삼부회(三部會)를 소집, 시민들의 재력(財力)을 그의 편으로 끌어들이려 하였다.

 

백년전쟁(1337∼1453)이 한창이었을 때 상인조합(길드)이 선출한 시장 에티엔 마르셀은 국왕에게 반기를 들고 시정의 독립을 꾀하였다. 이 당시 파리는 3개의 도시가 결합된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즉, 시테섬은 왕과 사제의 도시(궁전과 노트르담대성당), 우안은 좁은 길을 따라 펼쳐져 있는 상인의 도시(항구와 조합), 좌안은 문교도시(소르본대학)였다. 15세기 전반에는 아르마냐크파(派)와 부르고뉴파의 싸움이 계속되었으며, 파리 시내는 치안이 극도로 문란해져서 살인과 숙청이 잇따르고 시내는 무법천지가 되었다. 잔 다르크의 노력 등이 주효하여 샤를 7세는 파리로 돌아왔으나, 중앙집권 체제를 확립한 루이 11세는 파리를 좋아하지 않아, 어용금(御用金) 징수 때나 봉건 영주에게 파리를 점령당할 위험이 있을 때에만 나타났다.

 

16세기부터는 이탈리아와의 전쟁을 계기로 르네상스 문화가 유입되는 등 궁중문화가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고 시민들도 이것을 지지하였다. 고딕 양식 대신에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이 등장하기 시작하여 생퇴스타슈·생테티인뒤몽 등의 성당도 세워졌다. 이와 함께 인구도 늘어나고 상업이 번창하는 한편 좁고 불결한 저지대에는 프랑수아 비용이 그림으로 묘사한 파리가 출현한다. 종교전쟁(1559∼1598) 때에는 비극의 현장으로 바뀌었으며, 루이 13세와 재상(宰相) 리슐리외는 파리를 절대왕정(絶對王政)의 본거지로 삼았다. 생루이섬을 정비하여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저택을 세우고 마레·생제르맹·포부르 지구는 귀족들의 주택지로 만들었다. 리슐리외가 나중에 팔레 루아얄이 된 팔레 카르디날을 세운 것도 이때이다. 루이 14세는 파리에 살지 않았으나, 콜베르가 중상주의(重商主義) 정책을 실시함으로써 국력은 강화되고 고전문화가 번창하였으며 파리의 인구도 50만으로 팽창하였다. 이와 함께 생 뱅상 드 폴 등의 노력으로 복지사업이 발전하였다.

 

18세기는 경제적 발전기로, 파리는 계몽주의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카페에는 필로조프(哲人)들이 모여 새로운 사상·학문·예술의 발전을 논의하였다. 그러나 혁명중에는 건설보다 파괴가 더 많았고, 특히 교회는 폐허로 변하였다. 나폴레옹전쟁 중에도 틈틈이 지역 확장이 이루어졌고 새로운 가로망이 구축되었으며 수도설비를 개선하는 등 위생과 안전에 특히 심혈을 기울였다. 왕정이 복고되었을 때에는 지사(知事) 샤브롤의 노력으로 시청사를 개축하고, 새로운 다리가 가설되었으며 화랑이 문을 열기 시작하였다. 7월왕정(七月王政) 시대에도 120km에 이르는 새로운 하수도가 축조되고 많은 도로가 포장되었으며, 콩코르드광장에는 오벨리스크(方尖塔)가 건설되기도 하였다. 최후의 성벽(티에르 성벽)은 1845년에 완성되었으며, 그 자취는 지금의 외곽도로(불바르 에크스테리외르)이다.

 

그러나 지금의 파리 모습은 제2제정(帝政) 시대에 오스망의 개조로 이루어졌다. 그는 파리에서 실직을 없애고 살기 좋고 청결하며 교통이 편리할 뿐만 아니라 싸움과 혼란이 없는 파리를 만드는 데 뜻을 두었다. 생미셸·세바스토폴·리볼리·도메닐·라스파유 등의 큰 거리가 개통되고, 주변 건물이 헐리면서 개선문·노트르담대성당·오페라극장 등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또한 중앙시장이 정비되고 주위에 철도가 부설되면서 가스등에 불이 들어왔으며, 이에 따라 파리는 면목을 새롭게 하였다. 시가지가 확장되어 몽수리·뷔트쇼몽 등의 공원도 조성되었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파리코뮌(1870∼1871)으로 파리는 많은 피해를 보았으나 그 와중에도 오페라극장이 완성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때에는 체펠린비행선의 폭격을 받기도 하였으나 피해는 작았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독일군에게 점령되었으나 비무장 도시이어서 큰 파괴는 면할 수 있었다. 드골 정권이 들어선 뒤 파리의 건물들은 말끔하게 정돈되어 ‘하얀 파리’가 되었다. 지금도 도시계획이 진행되고 있는 파리는 변모를 계속하고 있다. 1814년 나폴레옹이 전쟁에 패배하여 연합군에게 포위되었을 때와 1944년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이 밀어닥쳤을 때, 파리는 붕괴되거나 잿더미가 될 위기에 직면했으나 다행히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역사상 이 도시에서 개최된 중요한 회의도 무수히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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