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예식과 연도-old

연도의 역사와 현재-생활성서기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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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윤석 [drhur] 쪽지 캡슐

2003-10-11 ㅣ No.20

제목: 죽음 너머의 희망을 노래하다

 

-연도의 역사와 현재

 

우리나라 천주교회의 상제례 문화는 연도의 문화이다. 예로부터 초상이 나면 ?연도났다?고 하고, 문상을 갈 때도 연도하러 간다고 할 정도이다. 또한 명절이나 제사 때 연도를 바친다. 이렇게 우리는 연도라는 말로 상제례를 대신할 정도로, 연도는 우리 신앙 생활에 토착화된 기도이며 노래이고 봉사의 행위와 함께하는 상제례문화인 것이다.

  그러므로 연도에 관한 연구는 한국 교회사에 있어서 중요한 가치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이 연도 안에는 죽음의 순간에 고백되는 육화된 부활 신앙이 담겨 있으며, 신앙 선조들의 지혜와 순교자들의 희생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기 때문이다.

 

  *천주교 성교예규

 

  연도(煉禱)란 ?연옥(煉獄)에 있는 영혼을 위한 기도(祈禱)?라는 뜻으로 연옥의 연(煉)자와 기도의 도(禱)를 합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연도책은 1864년에 목판 인쇄로 발간된 〈천주성교예규〉라는 책이다. 샤를르 달레 신부가 지은 〈한국천주교회사〉의 기록에 의하면 이 책은 1859년에 다블뤼 주교가 1권과 2권으로 편집하여 1864년 옥중에 갇혀 있던 베르뇌 주교가 감수하고 인준하여 세상에 나오게 됐다.

  한국 교회사를 연구하는 최석우 신부는 다블뤼 주교가 1859년에 필사본으로 전해 내려오던 한문본 〈성교예규〉를 당시의 한국 교회실정에 맞게 간추려 번역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교회의 인쇄소가 가동된 1864년에는 〈성교예규〉 외에도 많은 예식서와 문서가 출판되었다. 당시 교회에서 발행한 공식 문서 및 출판에 대한 기록서를 보면 ?이 책은 천주교의 예식서이고 다블뤼 주교에 의해 시작되었다?라고만 되어 있다.

  다블뤼 주교는 한글본 〈성교예규〉를 출간하기 전인 1863년경에 그의 부모에게 다음과 같은 서한을 보낸다. ?조선말로 된 장례식 기도문과 예절을 공포한 뒤로 많은 신자들이 외교인을 상관하지 않고 그것을 공공연히 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곳 조선에서 대낮에 십자가를 앞세우고 참석자는 각기 촛불을 들고 성영(聖詠)을 큰소리로 외우면서 동네 길을 지나가는 장례행렬을 펼친다는 것을 상상하시겠습니까? 어떤 곳에서는 이 때문에 시비가 나고 싸움이 벌어지고 했지만 다행히도 과히 중대한 결과는 빚어지지 않았습니다. 또 다른 곳 몇 군데에서는 외교인들이 일치해서 우리 예절이 매우 점잖고 아주 아름답다고 인정했고, 이 광경을 보고 개종한 사람이 몇 명 있었습니다.?

  여기서 ?조선말?로 된 장례식 기도문과 예절을 공포했다는 것은 이미 그 이전부터 행해지던 고유의 장례 예절이 있었음을 의미하며 다블뤼 주교가 이전까지 독음(讀音)되던 임종과 장례기도문을 〈성교예규〉로 정리?편집해 출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당시에 발간된 〈성교예규〉를 보면 선소리(先唱)와 후소리(後昌)을 구분하여 시편을 노래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 또한 반드시 시편을 노래로 바치도록 되어 있다. 이미 시편기도를 위한 노래가 구전되고 있었던 것이다. 연도는 기도문이며 동시에 노래로서 이전부터 전승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한글본 〈성교예규〉가 출간되기 이전에 존재했던 한문 필사본 〈성교예규〉는 누가 만들었으며 언제부터 사용되었을까? 아쉽게도 이에 대해 설명할 만한 문헌은 아직 발견된 바 없다. 아마도 한문 필사본 〈성교예규〉에 관한 문헌을 찾는 것이 연도의 정확한 기원과 역사를 밝히는 열쇠가 될 것이다.

 

  *제사논쟁과 박해

 

  연도가 한국 교회의 창립 시기에 제사문제로 인한 박해와 관련하여 탄생하였다는 주장이 있다. 이 주장은 1985년 최창무 신부(현 대주교)에 의해 제기되었다. 다블뤼 주교가 번역?편집한 〈성교예규〉를 일반적으로 연도라고 칭하지만, 연도가 넓은 뜻에서 ?죽은 신자를 위한 기도?라고 한다면 연도의 역사는 한국 교회의 초창기인 170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700년대 조선의 많은 유학자들은 예수회 사제 마테오 리치가 지은 〈천주실의〉 등 천주교회에 대한 서적을 중국으로부터 구입하여 학문으로 연구하였다. 그리고 학문적 연구는 점차 신앙으로 발전했다. 그러던 중 1784년 이승훈이 중국에 가서 최초로 세례를 받고 돌아오면서 한국의 천주교회는 시작된다.

  그 당시의 중국 천주교회는 상제례 문제로 인해 갈등을 겪고 있었다. 중국이 2천여 년 간 유교문화를 생활신조로 해온 국가인 까닭에 예수회는 유교문화를 연구하고 이해하는 방향에서 선교를 하였으나,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가 진출하면서 유교식 상제례 문제로 갈등을 빚어 교황청 사도좌에 이의를 제기하는 등 많은 문제들이 야기되었다.

  1742년 7월 11일, 사도좌 신앙포교성성은 제의에 관한 논쟁을 일절 허락하지 않는 엄격한 금지령을 반포하게 된다. 제의에 관한 논쟁을 허락하지 않는다 함은 결국 유교식 제사에 대한 금지령을 내린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중 한국 교회는 1789년 10월에 윤유일 등을 중국에 보내 평신도가 성사집행을 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고 즉시 가성직제도를 폐하였다. 또한 제사가 부당하고 미신적 행위로 금지된 것을 확인하게 된다.

  가성직제도는 폐하면 되지만 조상의 위패를 모시고 사는 전통과 제사를 폐하게 된 것은 크나큰 문제였다. 그러나 선조들은 이러한 신앙교리를 주저없이 받아들이며 오랜 풍습과 전통마저 포기하였다. 이런 단호한 행위로 인해 천주교 신자들은 주위 사람들에게 쉽게 발견될 수밖에 없었고, 무부무군(無父無君) 무군멸친(無君滅親)한 사악한 사람들로 오해를 받아 박해 받는 원인이 되었다.

  따라서 신자들은 신자로서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방법을 찾아 인륜에 해당되는 장례와 제사를 새로운 의식으로 진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한국에서 연도가 탄생하게 된 역사적 배경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연도가 1700년대 제사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여전히 추측일 뿐, 이를 뒷받침할 만한 정확한 문헌은 없다. 하지만 이를 간접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문헌으로서 예수회 디아즈(E. Diaz,1574-1659) 신부가 저술한 한문 기도서 〈수진일과(袖珍日課)〉과 있다. 수진(袖珍)이란 소매에 숨겨서 휴대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일과(日課)는 일상적으로 받치는 기도라는 뜻이다. 마치 지금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이 가지고 다니는 수첩처럼 몸에 지니기 편하도록 만들어진 연중기도서이다. 이 기도의 내용은 많은 부분 〈성교예규〉의 한문필사본과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다. 〈수진일과〉에는 〈성교예규〉와 같이 임종에서부터 장례까지의 모든 기도문이 수록되어 있다. 이 기도문에 대한 기록은 〈사학징의(邪學徵義)〉라는 책에 남아 있는데, 〈사학징의〉는 신유박해(1801)때 사학교도라고 칭한 천주교인들로부터 압수한 물건과 문서에 대한 목록이 적혀 있다. 즉 우리 선조들은 박해시대에 이미 연도책을 소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자들은 수진일과에 있는 임종과 장례 기도문을 잘 알고 있었으며 실제 장례에서 사용하였을 것이다. 물론 박해 상황에서 현재와 같이 집단적으로 응답의 노래를 기도로 드렸는지 알 수 없지만 기도문으로서 그 실천 가능성은 높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관련해서 신유박해 때 체포되었다가 배교하고 귀양간 윤석춘의 공초기록이 주목된다. ?제 어머니는 경술년(1790년)에 처음 저의 외숙모에게 천주교를 배웠고 제게도 역시 배울 것을 권했습니다. 제가 묻기를 ?천주교를 하면 이익되는 바가 무엇입니까? 하니 어머니는 ?천주교를 배우면 평소에 모르는 사람이라도 정이 지친(至親)한 사람과 같아서 어려움을 당하면 서로 구해준다(患難相求). 너는 형제도 없는 외로운 사람이니 이것을 배워 무방하다?라고 하였습니다. … 다음해(1791년) 3월 저의 집안은 여러 달 병에 걸렸고 또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이른바 천주교 사람들은 한 사람도 와서 조문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다시 어머니에게 묻기를 , ?일전에 천주교를 하는 사람들은 어려움이 있으면 서로 돕는다고 했는데 지금 부친상을 당해도 위문하는 자가 없는 것은 어째서입니까?하니, 어머니가 답하기를 ?저들은 반드시 몰랐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윤석춘의 어머니는 주문모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다가 1801년 4월 2일에 순교한 정복혜이다. 그리고 윤석춘은 부친상을 당했을 때 위문하고 장례절차까지 돕는 것을 환난상구로 이해한 듯하다.

  위의 여러 내용을 통해 적어도 연도가 교회 창립초기의 순교시대부터 시작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점차 조선의 상황에 맞는 연도로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앙의 자유를 얻은 뒤

 

  조선 교회는 1886년 한불조약을 계기로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 이 시기에 이르러 교회의 많은 부분이 변화되었는데 장례 봉사의 경우도 이전의 환난상구 단계에서 단체화의 단계로 변화가 나타난다. 대구의 로베르 신부는 1886년도 보고서에서 장례사업이 전교에 도움이 되고 있다고 하였고, 전라도는 1891년경 전동본당에 연령회가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또 연례보고서에 따르면 1894년 이전에 서울과 제물포에도 교회에서 장례사업을 시작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기록들은 1886년 이후 연령회가 설립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1910년대에 이르면 연령회는 좀더 다양한 성격을 갖게 된다. 노동력 제공을 주로 하던 단계에서 기도와 미사 봉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단계로 발전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1914년 로베르 신부의 보고에 따르면, ?경상남북도의 몇몇 본당에 있는 연령회는… 해마다 회비를 거둡니다. 회비는 적립하여 그 이자로 각 회원이 죽었을 때 그리고 그후 매년 기일에는 회원 각자의 몫으로 정해진 횟수의 미사를 드려줍니다.? 따라서 이 시기에 이르면 연령회는 장례봉사는 물론, 금전적인 부조를 위한 계의 형태의 조직화, 기도 및 미사 봉헌 등 오늘날의 연령회의 모습을 모두 갖추게 되는 것이다.

  1952년 목포의 현 하롤드 주교는 한국에 레지오 마리애라는 평신도 사도직 단체를 설립한다. 6?25전쟁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상황 속에서 상가 봉사와 연도는 한국 레지오의 중추적 활동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는데 외국의 레지오 마리애 활동에서는 이러한 활동을 찾아볼 수 없다. 한국 레지오의 커다란 성장요인 중 1순위는 바로 이러한 상가봉사와 연도 바치기에 있다. 레지오의 빠른 성장과 함께 연도는 각 본당에서 더 많은 이들과 함께 봉헌할 수 있는 기도로 전파된다.

 

  *영원한 사랑의 약속

 

  2002년 10월 17일 주교회의는 13년간의 산고(産苦) 끝에 〈가톨릭 상장례 예식서〉를 탄생시켰다. 이는 제사 논쟁에서 비롯되어 박해의 모진 역경 속에서 성장한 연도의 열매가 드디어 무르익었음을 전세계에 알리는 것이었다.

  천주교회의 장례예식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말씀의 전례 형태인 밤샘기도와 장례미사, 고별식과 기타 무덤 축복식이다. 이중 연도는 밤샘기도 부분에 해당한다. 나는 한국 교회처럼 많은 이들이 연도를 통해 밤샘기도를 정성껏 바치는 다른 나라의 교회전통을 들어보지 못하였다. 그리스도의 지체인 신자가 선종하였을 때 교회 공동체는 밤을 지새우며 기도하였고 이것은 1세기 초대교회부터 이어온 가톨릭의 보편적 전통이었다. 그러나 다른 나라의 경우는 이제 우리처럼 많은 이들이 밤을 새워 기도하지 않는다. 연도는 다른 나라의 교회도 본받아야 하는 가톨릭의 소중한 전통이다. 이번 여름 폭염으로 만 명 이상의 노인 사망자를 낸 프랑스는 뉴스를 통해 선진국이면서도 노인들을 방치한 자신들의 이기주의적 문화를 개탄하면서 한국의 효(孝)사상을 소개한 적이 있었다. 우리 연도에는 효(孝), 상부상조와 같은 민족 고유의 아름다운 정서들이 고스란히 살아 있다.

  형제들의 죽음 앞에서 우리는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로서 죽음이 끝이 아니고 새로운 생명으로 옮아가는 여정이며 부활의 시작임을 고백하였다. 그러므로 연도는 죽은 자들의 구원을 위한 통공이며 동시에 살아 있는 이들의 신앙고백의 장(場)이 되었다.

  현대 문화는 죽음을 경시하고 죽음을 가리고자 한다. 부활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어린 자녀들에게 죽음과 부활이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라는 신앙을 교육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연도의 역사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다. 그리고 실제로 이웃과 친지들이 상을 당했을 때 한번쯤 자녀들과 함께 연도하러 갈 것을 권고한다. 자녀들과 함께 연도를 바치는 모습! 그것은 우리가 죽음을 넘어선 희망 안에서 부활의 삶을 살아간다는 영원한 사랑의 약속을 보여주는 성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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