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 게시판

내 추억 속의 김수환 추기경님 - 30대가 되어 기억하는 나의 10대, 그 한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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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준섭 [pcsearch] 쪽지 캡슐

2009-02-19 ㅣ No.758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께서 선종하셨다. 아무 것도 모른 채 퇴근하고 집에 와서 컴퓨터를 켜자마자 접한 갑작스러운 소식이었다. '김수환 추기경, 2월 16일 저녁 6시 10분경 선종, 향년 87세.' 1998년 서울대교구장직에서 은퇴하신 후에도 활발하게 활동하시던 이 시대의 巨木이셨다. 최근 2~3년간 건강이 크게 나빠지셨다는 소식을 간간이 듣기는 했으나, 이처럼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실 줄은 몰랐다.

돌이켜보니 저녁 6시 10분경이면 사무실에서 한창 바빴을 시각이다. 게다가 거래처의 답답한 카운터파트와 악악대며 싸우고 있었다. 아... 그 시각에, 추기경께서 '고맙다. 사랑하고, 용서하고, 화해하라'는 말씀을 남기시고 평화롭게 선종하시던 그 시각에, 나는 오늘도 하루의 살이에서 용서와 평화와는 매우 거리가 먼 언행을 하고 있었구나...... '우리 추기경님'이 하느님 품으로 돌아가신 그 시각에 나는 하늘의 일과는 거리가 먼, 땅의 일로 부산을 떠느라 아주 잠시라도 그 분의 영혼을 떠올리지 못했다.

사실 굳이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추기경께서는 비단 가톨릭 신자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에서 '진정한 어른'으로 존경받던 분이면서도, 동시에 사회각계각층에서 따뜻하게 사랑을 받던 분이다. 마치 이웃집 할아버지 같은 이미지를 간직했던 성직자라고나 할까? 그 때문인지 오늘 추기경께서 선종하시던 그 시각 즈음에 아무런 소식조차 알지 못하고, 악악대기만 했던 내 자신이 정말이지 안타깝다 못해 처량해진다.

글쎄... 나만의 생각이고, 나만의 느낌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김수환 추기경님께 상당한 친밀감을 가지곤 했다. 얼핏 들으면 자랑 같지만, -그래도 유년 시절의 소중한 추억이기에-, 국민학교 4학년 때 성당에서 본 서울대교구 교리경시대회에서 1등을 차지해 추기경상을 받으면서, 한 번도 직접 뵙지 못한 분인데도 내 나름대로는 그 분과 대단히 친밀한 관계가 된 것마냥 생각했던 것 같다.

추기경님에 대한 친밀감이 더욱 높아진 직접적인 계기가 된 사건은 아마도 고덕동성당 신축성전 축성미사가 아니었던가 싶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축성식... 1991년 9월 20일. 신자들의 봉헌금을 조금씩 모아 어렵게 부지를 매입하고, 그보다도 더 험난한 과정을 거쳐서 드디어 '우리 성당'을 완성하여 꿈에도 그리던 축성미사를 올리던 그 날! 축성미사의 주례사제는 당연히 서울대교구장이시던 김수환 추기경님이셨다.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축성미사 전야의 떨림!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한 10대이었기에 드디어 '우리 성당이 생겼다'는 기쁨은 무척 컸다. 사실 지하터를 파고 겨우 콘크리트로 뚜껑을 덮은 벙커같은 지하성당의 기억을 넘어, 주일아침 중고등부 미사가 끝나고나서 트럭에 실려온 벽돌을 다른 친구들과 신나게 나르던 기억이나, 겨울방학 때 부족하게나마 일손을 도와보겠다고 건축용 목자재를 나르다가 공사판에 나뒹구는 못에 발을 찔려 파상풍 주사를 맞으러 급하게 실려갔던 일, 그리고 2층 대성당의 외벽을 쌓아올리고도 한겨울이라 미처 지붕을 올리지 못해 비닐로 덮어놓은 저 높은 천장을 세차게 펄럭이며 들어오는 바람소리를 들으며 올리던 성탄전야미사까지, 그간의 기억만으로도 떨림은 컸다.

하지만, 내가 잠을 못 이룰 정도로 설렜던 이유는 바로 내가 축성미사에서 주례사제인 김수환 추기경님의 '목자의 지팡이'('목장 baculus'이라고 했던 것 같다)를 담당하는 복사를 한다는 데 있었다. '목자의 지팡이'는 예수께서 '하느님의 양떼를 이끄는 목자'이셨음을 기억하며, 그의 후계자이며 대리자들인 주교들이 공식적인 전례에서 지참하는 성물이라고 알고 들었다. 그러한 만큼 추기경께서 입장을 하거나 퇴장을 할 때 짚고 들어왔던 그 지팡이를 받아드는 일은, 10대 소년 복사에게는 참으로 흥분되는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2000년 12월 24일 혜화동성당에서 드렸던 성탄전야미사도 기억이 난다. 드디어 5년간의 길었던 군생활도 막바지에 이르러 전역을 1주일 남겨두고 휴가를 나온 참이었다. 김수환 추기경께서 서울대교구장직을 은퇴하시고나서 신학교가 있는 혜화동에 머무르신다는 사실을 알았으나, 그 분께서 혜화동성당 성탄전야미사를 집전하신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던 나로서는 감동이 더 컸다.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시점에서 한줄기 서광을 만난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덧붙여 그 날 미사의 영성체 시간에 추기경님께로부터 성체를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후로는 그토록 가까이서 그 분을 뵌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사제서품식에서 한두번 멀리 뵈었던 기억 뿐...... 이렇게 기억을 풀어내고 보니, 내가 특별히 개인적으로 김수환 추기경님께 친밀감을 느꼈을만한 사건은 기껏해야 세 번이 넘지 않는 것 같다. 그나마도 한 번은 직접 뵙지도 못했으니, 겨우 두 번이라고나 할까? 그나마도 이른바 '한국 현대사의 격동의 현장' 속에서 그 분을 만나뵌 것이 아니다. 그저 가톨릭 신자로서 운좋게 두어 번 가까이 했던 것뿐이다.

어찌보면 참으로 유치한 발상인지 모르겠다. '내 추억 속의 김수환 추기경님'이라니...... 마치 역사적 인물을 대단히 가까이서 모셨던, 혹은 함께 일을 도모했던 사람이 회고록 등에서나 쓸법한 제목이니까...... 그러나 30대가 되어 기억하는 내 10대의 그 한 시절에는 김수환 추기경에 대한 추억이 빛을 잃지 않고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그 분께 오랜 시간 좋은 말씀을 들었거나, 따뜻한 위로를 받았거나, 격려를 들었거나, 힘차게 악수를 나누었거나, 심지어 먼 발치에서 단지 얼굴만 뵈었을 뿐이라도 그 모든 이가 느끼는 것처럼 그 분은 '우리 추기경님' 아니, '나의 추기경님'이었으므로......

사실 김수환 추기경님은 한국 현대사에 굵직한 자취를 남긴 역사적 인물이다. 그 분이 살아오신 발자취와 여러 업적들에 대해서는 이미 수많은 언론에서 숱하게 정보를 쏟아내고 있으니 굳이 되풀이하여 거론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렇기에 추기경님의 선종 또한 한국 현대사에 하나의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되어 마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감히 그 분을 나의 추억 속의 한 인물로 기억하고자 한다. 매경의 기사글에서 어느 기자가 썼던 말처럼 김수환 추기경은, 그 분을 만난 모든 이가 편안하고 인자한 모습으로 기억하는 '이웃집 성자'였기 때문이다.

 

2009.02.17.(화) 02:15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의 선종을 애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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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2009.02.19.(목) 01:08

어제 야근이 밀려있는데도 꿋꿋이 자리를 접고, 추기경님을 마지막으로 뵈러 명동성당에 다녀왔더랬습니다. 무척 추운 날씨였는데도 참으로 많은 신자분들이 추기경님께서 하느님 품으로 돌아가시는 길을 배웅하러 오셨더군요.

저만 그렇게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기다리는 한 시간여 동안 찬바람이 모질게 부는데도 그다지 춥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당신이 그토록 사랑하셨던, 그리고 그보다는 부족하지만 당신을 무척이나 사랑했던 신자들이 하늘나라로 돌아가시는 길을 배웅하는 모습을 보시면서 추기경님의 영혼이 따뜻하고 흐뭇한 미소로 감싸안아 주셨기 때문이 아닐까요?

아무튼 어제 집에 돌아오는 길은 참 따뜻했는데, 오늘 낮에 인터넷 기사들을 보면서 한숨이 저절로 나오더군요...... (이 시대의 진정한 어르신이 가시는 길인데도 막말로 구설수에 오르는 아직도 철 안 든 '어른이라고 할 수 없는 어른'이 있더군요)

그래도 추기경님의 가르침처럼 '너희와 모든이를 사랑' 해야겠죠? 오늘 '오공의 괴수'였던 '양반'이 그래도 경건한 모습으로 추기경님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러 온 모습을 보고,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진정으로 살아가야 할 길을 다시 한 번 깨달았습니다.

이 땅에 주님의 양떼를 남겨놓고 가시는 길에도 또 한 번 가르침을 주신 데 감사드리며, 이 밤 추기경님의 영원한 안식과 평화를 위해 기도하며 잠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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