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한가위- 충만한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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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윤석 [drhur] 쪽지 캡슐

2004-09-30 ㅣ No.47

 

한가위- 충만의 가운데!


한가위의 한은 충만 중에 가장 충만하다는 뜻이고 가위는 가운데라는 뜻이다.

즉 한가위는 “가장 충만한 가운데”라는 뜻이라고 한다.

자연적으로 보았을 때 한가위 추석은 결실의 충만함을 만끽하는 시간이다.

한해 동안 열심히 땀을 낸 농부의 노력과 하늘의 섭리가 어우러진 열매들은 감사와 하늘에 대한 경외의 마음을 자연스레 가슴에 담아내기에 충분하다.

이렇게 자연히 한가위에는 감사의 마음이 일어난다.

영적인 의미에서 역시 충만의 가운데에는 감사의 덕이 자리잡게 된다. 영과 육의 정서는 이렇듯 덕에 있어서 인지상정인 것이다. 영은 육에 우월하고 육은 죄의 원천이라는 이분법적인 사고는 매우 위험하다.

따라서 한가위에 하늘에 감사하고 조상과 가족 이웃에게 나눔을 통해 감사의 정을 나누는 것은 너무나 기쁜이며 자연스러운 덕의 흐름이다.

그런데 우리는 감사의 기준과 발생이 하느님께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한다.

감사의 정는 나의 기준이나 나의 마음에 있는 것이 아니다. 즉 내가 기쁘고 내가 행복한 마음이 들어 감사하는 것은 나의 이기적인 마음에 대한 자족감일 뿐이고 진정한 ‘충만의 가운데’에서 비롯된 감사의 덕이 아니다.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흉년이 들어도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다. 오히려 더 정성을 다하여 하늘에 감사를 드렸다. 욥기1장에서 욥은 “야훼께서 좋은 것을 주셨는데 나쁜 것을 주신다고 하여 내가 어떻게 야훼를 원망하리요!”라고 말한다.

욥의 마음은 영적인 충만감의 중용의 단계인 한가위의 상태에 있던 것이다.

흉년이 들면 우리 농부들은 걱정을 하며 하늘에게 더욱 정성을 드린다. 현대의 많은 이들은 만족이면 행복과 감사이고 불만족이며 불행과 열등감이라는 그릇된 정서적 오류에 사로잡혀있다. 그래서 기다림이나 재기를 위한 패기가 부족하다.

우리는 과연우리 영혼에 무엇이 가득하며 그 가득함의 가운데인 뿌리에 무엇이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감사와 기쁨인가? 아니면 걱정과 게으름, 열등감인가?

추석 한가위의 기쁨은 충만한 가운데 생성되는 감사라는 은혜로운 영성의 덕이 그 크기를 좌우하는 것이지 물질적인 수확의 양에 따라 기쁨과 감사의 정도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자는 자신의 물질적인 풍요를 기뻐하며 충만한 마음을 이기적으로 나눔보다는 자신만을 소유하는 계획을 세워 자신의 곳간을 확장하고 영혼에게 이 기쁨을 말한다.

하지만 그의 육신은 내일 영혼에게 작별인사를 고하지도 못하고 죽음을 당하게 된다.

즉 복음의 교훈은 진정한 기쁨은 내자신만의 육신적 곳간의 충만이 아니라 하늘에 있음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한가위” 이 단어는 참으로 영성적인 우리 민족의 단어이다. 영성이란 그 마음이 그 사람의 육신을 포함한 전인격적 행위를 움직이는 원동력과 판단의 길라잡이의 힘을 발휘하는 총체적 상황을 말한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 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라고 말씀하셨다. 감사할수 있는 사람은 이미 영적 충만의 기쁨 가운데 있는 것이며 기도는 절로 나오게 되는 노랫소리와 같은 것이다. 진정한 영적 충만의 감사가 자기 만족이 아닌 하느님과 우리와의 서로 내어줌의 충만의 가운데서 비롯된 기쁨임을 느낄때 위의 문장은 분리된 3중구조의 각기 다른 세문장과 덕의 항목이 아니라 하나됨의 영성임을 알게 된다.

우리가 매일 드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제사인 미사는 이런 의미에서 가장 완전한 한가위이며 완성된 제사이다. 사실 한국 교회가 사용한 미사(MISSA)라는 호칭은 다른 외국의 교회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는 말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우리가 부르는 미사를 성찬례혹은 감사제(EUCHARITIA)라고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미사라는 말보다 이 호칭들이 더 적합하게 미사를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천주교는 제사도 지낼수 있대. 미사보고 제사도 지내고 .......”

미사는 완전한 제사이며 우리민족의 제사는 참으로 예수님 제정하신 완전한 제사의 아름다운 예표이며 성체성사로 수렴되고 가톨릭의 보편적 진리성과 성사성을 증명하는 인간심성의 문화적 발의(發意)이다. 즉 두개의 제사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미사는 서양의 제사 그리고 우리 민족의 제사는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 민족이 스스로 하느님의 존재을 알아 선교가 아닌 우리의 초대로부터 우리의 순교로 이어지는 한국 교회의 역사성안에서 우리의 제사는 올바로 해석되어야 한다. 우리의 제사는 하늘과 조상 그리고 부모와 이웃에게 감사와 찬미 그리고 나눔의 정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의 성찬례의 보편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느님의 인간의 마음과 구조에 너무나 시나브로 부합되는 너른 마음과 모습과 맛을 지니시고 다가오신다. 그래서 천주교를 가톨릭이라 부른다. 넓다라는 뜻이다.

우리는 미사에서 평화의 인사를 나눈다. 평화라는 우리의 글자를 보자!

평화(平和)라는 말은 평등하다. 넓다는 평(平)과 응하다, 합치다는 뜻의 화(和)가 결합된 말이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화(和)이다. 화자는 벼리 곡식 리에 입구자가 결합되어 있다.

은총의 제물 하늘에 받쳤던 음식을 함께 나누는 음복을 나타낸다고 한다. 공동체가 모여 함께 넓게 응하며 합치되는 마음 충만한 마음과 분위기에서 음식을 나누는 모습이다.

이음식은 바로 하늘에 감사드렸던 제물인 것이다. 참으로 우리의 영성체의 모습이 아닌가?

참으로 놀라운 일치와 보편성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우리의 모습을 잠시 반성해 보아야 겠다. 과연 우리의 영성체의 순간은 이런 감사와 찬양과 나눔에서 우러진 한가위 즉 충만의 가운데 있는가?

미사보러간다고 한다. 참으로 잘못된 말이다. 미사는 구경의 대상이나 개인적 신심행위가 아니다.

우리는 주님이 기도를 미사때 봉헌하면서 일용한 양식을 달라고 기도한다.

하루 하루의 양식만을 맛나만을 원하고 얻는다. 우리는 쌓아놓는 은총을 구하는 마음이 되어서는 안된다. 일용한 양식에 만족하는 마음이 감사의 마음이고 영성체의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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