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강론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경축이동 마태 10,17-22; ’21/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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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21-06-23 ㅣ No.4705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경축이동(나해)

마태 10,17-22; ’21/07/04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는 최초의 한국인 신부님이며, 어릴 때의 이름은 '재복'이었고 보명은 '지식', 관명은 '내선', 본관은 '김해'입니다.

 

신부님은 1821(순조21) 821일 충청도 솔뫼(현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에서 김재준과 상흥 고씨 우르술라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증조 할아버지 '김진후' 때부터 천주교회에 입교, 순교하였으며, 아버지 '제준'1839년 서울 서소문에서 참수 순교함으로써, 103위 성인 중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신부님의 가계는 순교자들로 일가를 이루었습니다.

 

모방 신부님은 183645일 부활절에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의 공소를 순방하던 중 골배마실에 인접한 '은이 공소'를 방문하고, 김대건을 신학생 후보로 선발하여 세례를 주었습니다. 모방신부님은 박해 때문에 국내에서는 조선인 성직자 양성교육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래서 김대건 안드레아와 함께 최양업 토마, 최방제 프란치스코 신학생을 파리 외방전교회 동양대표부가 있는 마카오로 보냈습니다. 세 신학생들은 순명 서약을 하고, 183767일 마카오에 도착했습니다.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님들은 파리 외방전교회 동양 대표부에 조선인 신학교를 세워 교육했습니다. 그런데 마카오에 민란이 일어나 18378월과 19394월 두 차례나 필리핀의 마닐라로 피신하였습니다. 그때마다 신학생들은 그곳에서 몇 개월 동안 공부하다가 마카오로 다시 돌아오곤 하였는데, 이런 와중에 신학생인 최방제가 18381127일 열병으로 죽었습니다. 두 신학생은 184111월 철학 과정을 마치고 신학 과정에 들어갔습니다

 

1842년 아편 전쟁이 끝날 무렵, 두 신학생은 아직 수학 중이었지만, 프랑스 함대의 함장 세실이 마카오 대표부를 방문하여 조선 원정 계획을 알리면서 조선인 신학생 한 명을 통역으로 동행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몇 년 째 조선 교회로부터 소식이 끊겨 있었던 터라 대표부 신부님들은 이번 일을 하느님이 주신 기회로 여겼습니다. 김대건은 조선 포교를 지망한 메스트르 신부님과 함께 215일 에리곤호를 타고 마카오를 출발하였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함대는 1842829일 남경조약이 체결되자 조선 출동을 중지하고 마닐라로 회항하였습니다. 그래서 김대건은 하선하여 강남교구장 베지의 도움을 받아 중국 배를 타고 귀국길에 오릅니다.

 

102일 상해를 떠난 그는 1023일 요동 땅에 도착하여 백가점에 머물면서 3차에 걸쳐 의주 변문을 통한 잠입로를 개척하고자 시도했으나 실패하였습니다. 그리고 18434월부터 거처를 소팔가자로 옮겨 최양업과 같이 신학 공부를 계속하였습니다. 이곳에는 1841년부터 페레올 신부님이 머물고 있었습니다. 김대건은 184312월 양관에서 있은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님의 성성식에 참석한후 주교님의 지시를 받고 184412월 두만강을 통하여 입국을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소팔가자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해 12월 최양업과 같이 소정의 신학 과정을 마치고 삭발례부터 부제품까지 받았습니다. 그들은 사제품의 법정 연령이 만24세 미만이었기 때문에 사제품을 받지는 못하였습니다.

 

김대건 부제님은 184511일 변문을 지나 15일 서울에 도착한 뒤 선교사들을 영입하기 위하여 상해로 도항할 준비를 하고 43011명의 조선인 선원들과 작은 목선인 라파엘호에 승선하여 제물포를 떠나 64일 상해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817일 상해 연안에 있는 금가항에서 페레올 주교님으로부터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그런 다음 페레올 주교님과 다블뤼 신부님과 함께 830일 상해를 출발 40여일 만인 1012일 강경 부근의 황산포 나바위에 도착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의 사목활동 기간은 1년 남짓했습니다. 신부님은 조선 교구 부교구장으로서 선교사의 입국 통로를 개척하는 일에 충실했습니다. 신부님은 1846514일 주교님으로부터 시해 해로를 통한 선교사 영입 방도를 개척하라는 지시를 받고 백령도에서 중국 어선에 편지와 지도를 탁송한 후 순위도로 왔다가, 거기서 65일 관헌들에세 체포되어 10일 해수 감영을 거쳐 다음 달 21일 서울 포도청으로 압송되었습니다. 신부님은 포청에서 3개월동안 40차의 문초를 받고, 915일 반역죄로 사형이 선고되어 16일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그때 나이 26세였습니다. 신부님의 사체는 모래사장에 가매장되었는데 40일후 이민식(빈첸시오)에 의하여 미리내에 안장되었고, 1901년에는 용산 성직자 묘지로 옮겨졌다가, 1951년에는 신부님의 두개골을 혜화동 가톨릭대학에 옮겨 보관하고 있습니다. 1857년에 '가경자', 192575일에 '복자'로 되었다가 198456'성인품'에 올랐습니다. 이상이 김 신부님의 일년 남짓한 사목생활의 선교적인 측면의 공식 기록입니다.

 

김대건 신부님의 사목활동의 내용을 일면 살펴보면, 김대건 신부님은 서울 한양에서 1845327일 외방전교회 대표 리브와 신부님에게 보낸 열 번째 서한에서, "조선에서는 어린 아기들의 대부분이 반점으로 얼굴이 흉해지는 병(즉 천연두)으로 죽어 가는데, 그 병을 퇴치할 수 있는 처방을 저에게 명확히 적어 보내 주시기를 스승님께 청합니다."고 적고 있습니다. 김 신부님에 이어 최양업 신부님도 "이 모든 질병이 물의 비위생 상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믿어집니다. 그러니 물을 정화하는 방법을 아시면 분명하게 일러주시기 바랍니다."고 적고 있습니다. 천주교 사목 사제인 김 신부님과 최 신부님이 선교를 하면서 스승에게 청하는 내용에서 직접 선교에 필요한 성물이나 상본 등에 앞서 일반인들의 공중 위생을 위한 물의 정화 방법을 청하는 내용은 참으로 천주교회의 사목활동과 교회의 선교에 대한 폭넓은 시각을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과 최양업 신부님은 당시 프랑스 외방선교회 선교사제들의 신학 원칙과 종교 신심에 지나치게 충실하다고들 하는 얀세니즘적인 엄격한 신학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분들이 고국에 귀국하여 선교하면서 그들에게 신학과 사목을 가르친 스승에게 이러한 청을 한다는 것은 그분들이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것을 교회 선교의 구체적이고도 직접적인 한 방편이라고 교육받았거나 그분들이 교육을 받으면서 보아온 사목의 형태를 선교지에서도 자연스럽게 적용하고자 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뿐 아니라 조선에 선교 온 매스트르 신부님도 1855년 배론에 성 요셉 신학교를 세워 신학생을 양성하기 이전, 1854년 프랑스 성영회의 재정지원으로 영애회고아원을 설립했고, 1857년에는 영애회의 어린이들과 가난한 이들을 위한 시약소를 설치 운영하였습니다.

 

그분들은 죽음을 앞둔 박해의 선교 현장 속에서도 사람들의 어려운 처지를 풀어주고 보다 나은 삶으로 나아가도록 도와주려는 노력을 교회 사목의 일차적인 선교 목표요 방법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한편 이분들이 받은 교육은 정통한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예수님도 제자들을 파견할 때 첫 번째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교리교육과 두 번째로 그 교리가 현실로 드러나는 이른바 하느님 사랑에 응답하는 이웃사랑으로서의 사회복지 그리고 세 번째로 그러한 사업을 계속할 사도양성을 지시하였습니다.(마태 9,35-38 참조)

 

1977년부터 시작된 한국 천주교회 초기, 김대건, 최양업 신부님 등의 사목자들과 신자들은 하느님께 대한 신앙이 형제들, 그 중에서도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하는 생활로 드러나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실현에 옮기며 살았습니다.

 

이러한 모습들 속에서 김대건 신부님과 후대 사목자들은 성당 건물보다 고아원이나 시약소, 양노원을 먼저 짓고 운영함으로써 사회복지 활동을 선교보다 우선시하거나 적어도 동전의 양면과도 같이 동등하게 간주하였고 평신도들도 자신들의 삶으로 이러한 신앙을 살았습니다. 이러한 교회의 활동이 고난과 박해의 피난시절과 형장에까지도 그리고 박해자들에게까지도 드러남으로써, 한국천주교회는 초기교회 때부터 사회복지로 통칭되는 이웃사랑을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응답이요 증거로 삼았습니다.

 

그러므로 교우들은 자신의 몸을 바쳐 순교하듯이 가난한 이들에게 헌신하게 된 것입니다. 비록 한국의 초기 교회가 신앙 전파와 동시에 박해가 이어져 공개적으로 신앙활동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사회복지 시설을 설립하고 운영할 수는 없어도, 이웃 사랑의 차원에서 드러나는 교회의 사목 활동은 단순히 가난한 이에게 대한 일회적인 적선으로 그치지 않고 교우촌을 이루어 공동체차원에서 한줌의 쌀운동 등을 통해 조직적으로 실현해 나갔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김대건 사제 순교자 대축일을 맞으며 우리 한국천주교회의 선교와 교회 역사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당대의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는 것을 교회 사목과 신자 신앙 생활의 한 방편으로 삼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 신앙 선조들의 이러한 신앙 형태는 오늘날 하느님께 바치는 순수하고 지고한 봉헌이 우리의 관심과 돌봄을 기대하는 이웃들에게 대한 사랑으로 드러나고 펼쳐지는 교회 사목활동과 신앙생활로 구체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각인하고 지속적인 신앙생활의 기준이요 기쁨으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마태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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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경축이동 꽃꽂이

https://bbs.catholic.or.kr/home/bbs_view.asp?num=1&id=183379&menu=frpeterspds2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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