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마르타와 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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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윤석 [drhur] 쪽지 캡슐

2004-10-05 ㅣ No.54

 

*마르타와 마리아


함께 하고픈 마음은 사랑의 초심(初心)이며,

그 안에 머물고자 함은 사랑의 중심(中心)이다.


중국의 명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르타는 자기 집에 예수를 모셔 들였다.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라고 나옵니다.


마르타는 도대체 예수님과 어떤 관계였을까? 지금도 본당에서 신부님을 집에 한번 모시려면 정말 어렵고 또 신부님들이 아무 때나 아무에게나 쉽게 가정방문을 가셔서 대접을 받지는 않으신다는 사실을 비추어 볼때 당시의 여성에 대한 인식과 유대문화권에서 존경받는 스승이셨던 예수님을 두자매가 자신의 집에 모셨다는 것을 참으로 파격적인 사건일수 있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는 두 자매를 지극히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마르타는 늘 함께하고픈 예수님께 대한 동경을 갖고 있었습니다.

사랑의 첫마음인 이 초심은 사랑의 시작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고픈 마음은 하느님마음이나 우리들 마음이나 인지상정인 듯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이 선교나 기적을 이르켜서 당신을 증거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것 보다 우선하여 분명히 “당신의 곁에 두게하시려고”라고 복음서는 증언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복음 마르타와 마리아의 모습안에서 우리는 자칫 마르타를 ‘봉사’ 내지는 외적인 삶마리아를 ‘기도’내지는 내적인 삶으로 대비시켜 마르타의 모습을 마리아의 모습보다 평가절하하는 이분법적인 생각을 할 유혹을 받을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복음의 진정한 주제는 “마르타는 자기 집에 예수를 모셔 들였다.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입니다. 마르타가 자기 집에 예수님을 모셔들이는 용기있고 정성어린 사랑의 초심이 없다면 마리아가 주님의 말씀을 자기안에 가장 중요한 중심으로 삼는 머무름의 단계역시 그 기회를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성사를 통해 하느님 사랑의 완전함을 위한 초심을 갖게 됩니다.

세례성사는 세례의 완성이 아니라 완성을 향해 나가가는 시작이며 우리는 삶을 일신우일신 하여 세례성사의 참다운 의미가 생활하는 영성으로 중심되는 뿌리내임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함께 하고픈 이 사랑의 초심을 좀더 완성으로 이끄시려합니다.


그것은 바로 서로의 중심안에서 둘이 아니라 하나가 되는 합일의 경지이며 이것은 바로 들음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에서 그분은 바로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말씀이 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거룩할 성(聖)자를 보면 입 구(口)자가 아닌 귀 이(耳)자가 먼저 나옵니다.

즉 거룩함이란 왕의 이야기를 먼저 듣고 (耳), 응답(口) 하는 것입니다.


성품성사나 혼인성사 그리고 종신서원 역시 사제로 부부로 수도자로서 완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고픈 초심의 뿌리내임이며 하느님이 주신 일용한 양식을 통해 하느님안에 내가 머물고 내안에 그분이 중심이 되기 위한 언약이며 중심잡기의 시작입니다.


자전거를 타는 법을 배우면 그 어떤 종류의 자전거도 두려워 하지 않는 것처럼 중심을 잡고 그안에 머물러 있다면 우리의 두손을 놓아도 그 자전거는 쓰러지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5년만에 서품받고 다시 서품식때 주교님의 발치에서 무릎꿇고 들었던 사제서품 축성의 말씀을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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