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곡성당 자유게시판

영웅과 역적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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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진석 [ryu4337] 쪽지 캡슐

2014-09-08 ㅣ No.11312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요즈음 명량이라는 이순신장군 영화가 대한민국의 모든 영화의 역사를 바꾸고 있다.

1000 관객이면 엄청난 흥행이라고 인정하는데 1700만을 넘어 1800만을 향해

돌진하고 있다.

얼마전에 심야극장에서 영화를 보았지만 흥미상,내용상으로 800 정도의 관객이

오면 적당한 영화이지 이정도로 흥행을 보일 영화는 아니었던것같다.

아마도 시절이 어수선하고 민심도 팍팍하고 마땅한 지도자도 없어 답답해 하는

민초들의 갈증이 극에 달할때 개봉한 것이 크게 작용한 측면도 있지않을까

생각이 든다.

요즈음에서 이순신 장군이 부각되는 것이 무척 새삼스럽지만 12척의 적은 배로

훌률한 작전을 세우고 군사들에게는 싸우면 이길수 있다는 전투의지를 고취

시킨후 해전에서는 선봉에 나서서  12척의 배를 조직적으로 지휘하여 31척의

왜선을 격파,기적같은 대승을 거둔 것은 주목할 필요가있다.

133척의 왜선중 격파한것은 31척이고 나머지는 전의를 상실하여 도주했다는 것이

역사의 정설로 나와있다.

12척의 배로 31척의 배를 격파한것이 무슨 대승이냐고 의문이 들수있지만

우리 수군의 피해가 배는 부서진것이 없고 2명사망에 2명부상뿐이어서

이러한 일방적인 압승은 세계 전투사에도 찾아보기 힘들다.

이는 이순신 장군이 얼마나 전투를 착실히 준비하고 치밀하게 작전을 세우고

주도면밀한 지휘를 했는지를 보여주는 반증이다.

그는 당시의 임금(선조)에게 충성을 바치기 위해서 이렇게 철저히 전투를

준비하지 않은것같다.그러기에는 선조가 이순신 장군을 너무 미워했고 배척한것이

역사서 곳곳에 나타난다.

허긴 신사임당,율곡이이,이황,허준,이순신등 한국의 지폐의 80% 이때의 인물

이었는데 이러한 기라성 같은 위인들을 제대로 활용치 못하고 나라를 말아먹고

백성을 쑥대밭 만들었으니 얼마나 한심한 임금인가??

이순신장군은 백성들의 안위를 위하여 이렇게 목숨걸고 악착같이 싸웠던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그를 영웅이라 칭하며 그러한 영웅이 없는 현대의 삭막한 세상을

개탄하는 것이다.

요즈음 제일 유명한 장군인 김관진 안보실장에게 12척과 군사를 주면서

일본군 133척과 싸우라면 어떻게 하시겠는가??

아니 이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당신이 이순신장군의 입장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적은수의 배도 문제지만 불과 한달전의 칠천량 전투에서 대패한 군사들의

패배의식은 더욱 문제여서 내가봐도 정말 답이 안나오고 한숨만 터져나온다.

아마도 매일 고민하면서 정자안에서 술과 함께 한숨쉬다 병사들과 같이

싸우다 바다에 수장되었을 것이다.

이순신장군은  백성들의 안위를 위하여 계속 방법을 연구했고 이길수 있는 작전을

세우려 무수히도 노력했으며 단기간의 기강확립을 위하여 도망자를 직접 참수하는

악역마저 자처했다.

이순신장군도 우리보다 그렇게 잘난분은 아니어서 난중일기 상당부분이 쓰기 싫어

몇월며칠 누구와 밥먹었다 ,몇월며칠 날씨가 좋았다..,식이다.

우리와 다른점은 백성를 궁휼히 생각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맘이 더욱 간절해 전투를

이기려는 의지가 너무 강했고 그것을 철저하게 실천했다는 것이다.

요즈음의 우리네 지도자들 중에서 이러한음을 가지고 실천을 하시는 분이 과연

명이나 되는것인가의 물음에 고개가 절로 가로 저어진다.

 

영화 명량에서 이순신 장군과 사사건건 대립, 결국 이순신장군의  암살을 시도하다

실패하자 거북선에 불지르고 도망치다가 활에 맞아 죽은  배설이라는 역적이

나온다.

역사서에는 그가 이순신장군에게 개기거나 암살을 시도한 내용이 없으며 더군다나

거북선을 불지른 내용은 더더욱 없다.

다만 이분은 안좋은 이름답게 배신도 잘하고 잔머리도 잘굴리고 겁이 엄청많으며

눈치도 빠른 분인 같다.

그런 얄팍한 성격으로 줄을 잘못탄 것이 오늘까지 한심한 장군으로 낙인찍혔으니

본인한테 안된일이고 후손한테도 크나큰 비극이다.

임진왜란(1592) 합천군수로 있었는데 왜군과 싸워서 보기드문 대승을 거뒀음에도

불구하고 죽을까봐 겁이나서 잔당들을 추격하며 소탕하지 않아 관찰사에게

엄청 얻어터지고 좌천당했다.

15977 칠천량 해전때 원균과 함께 왜선과 마주하며 싸웠으나 전황이 어렵다는

것을 감지하여 12척의 배를 이끌고 자기맘데로 도망쳐서 목숨을 부지했다.

1597 8 이순신장군에게 12척과 군사들을 바쳤는데 그것으로 명량해전의

대승을 거뒀으니 정말 아이러니하다.

이순신장군이 12척으로 133척의 왜선과 싸우려하자 배설장군은 매우 무모하다고

생각했을것이다.아니  미친짓이라고 생각했을것이다.

결국 그는 목숨을 부지하려 명량해전 2일전에 탈영을 했고 전국을 떠돌며 도망다니다

권율장군의 수배병들에 의해 1598 선산근처에서 체포되어 1599년에 반역죄로

처형됐다.

2명만 죽은 명량해전에서 그는 전멸을 예상했고 그러면 자신의 탈영사실도

묻힐것이라는 얄팍한 판단으로 도망을 했지만 의외의 대승으로 역적으로 낙인찍혀 버렸다.

배설 자신도 그당시에 무척 황당했을것이다.

어쩌면 이부분에서 세월호 선장과 흡사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어떻게 보면 명량해전의 근간인 12척과 수군들을 제공한 일등공신인데…..

그놈의 그릇된 판단때문에 역사의 패배자로 남게됐으니 영웅과 역적은 한끗수차이라

말할수 있겠다.

배설장군의 후손들이 명량의 상영금지를 요청하며 시위에 나섰다는 기사를 보았다.

물론 거북선을 불태우거나 동료들을 이간질하고 이순신장군을 암살해려 했다는

내용등이 후손들을 엄청 화나게했을것이다.

그러나 자기살려고 탈영한 것은 사실이고 그로인해 역적으로 처형된것도 엄연한

사실이니 후손들도 이상의 문제제기는 어려울듯하다.

아무튼 조상의 잘못된 행동으로 인하여 후손들이 피해를 입고 수모를 겪고있으니

나자신 똑바로 행동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분들에게 갖는 안타까움은

금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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