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강론

연중 제33주일 제7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 담화 요약(가해) 마태 25,14-30; ’23/11/19

인쇄

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23-10-29 ㅣ No.5576

연중 제33주일 제7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 담화 요약

(가해) 마태 25,14-30; ’23/11/19

누구든 가난한 이에게서 얼굴을 돌리지 마라”(토빗 4,7)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은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를 풍성하게 드러내는 표징이며 우리 공동체 삶의 버팀목입니다. 구약성경의 토빗은 자선을 베풀다가, 임금에게 재산을 몰수당하고, 잔칫상을 뒤로 미루기까지 하면서 길거리에서 죽어간 이를 장례 치러주고 돌아와 쉬다가, 참새의 분비물을 맞아 눈을 잃고 맙니다(토빗 2,1-10 참조). ‘선행을 하는데 벌이 따르다니 이 무슨 운명의 아이러니인가!이민족 사이에서 하느님을 섬기고 자기 목숨을 걸 정도로 이웃을 사랑하게 하는 용기와 내면의 힘을 토빗은 어디에서 얻었을까요? 성경에서 흔히 가르치듯이, 하느님께서는 의로운 이들에게 시련을 아끼지 않으십니다. 왜일까요? 이는 우리를 욕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우리 믿음을 굳건히 하려는 것입니다.

 

시련의 시기에 토빗은 자신의 가난을 발견하고는 가난한 다른 이들을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그는 하느님의 법에 충실하고 계명을 지키면서도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그는 가난을 직접 느꼈기에 실제로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을 보일 수 있습니다. 가난한 이를 만날 때마다 우리가 얼굴을 돌려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주 예수님의 얼굴을 뵙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허울뿐인 안녕을 지키려는 무관심과 빤한 핑계를 떨쳐버리고, 모든 가난한 이와 모든 형태의 가난을 알아보라고 부름받습니다.

 

우리는 가난한 이들의 필요를 특히 섬세하게 헤아리지 않는 시대를 살아갑니다. 풍족한 생활양식을 택하라는 압박이 커져 가는 반면, 가난 속에 살아가는 이들의 목소리는 무시당하곤 합니다. 우리는 불쾌하거나 고통을 초래하는 것은 모두 무시하는 반면, 신체적 특질을 삶의 우선 목표인 양 찬양합니다. 가상 현실이 실제 삶의 자리를 차지하고 점점 더 쉽게 두 세계가 하나로 합쳐집니다. 가난한 이들은 찰나의 영향을 줄 수 있는 영화의 한 장면이 되지만, 우리는 살과 피를 지닌 그들을 거리에서 마주친다면 성가셔하며 외면합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루카 10,25-37 참조)는 그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여기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저마다에게 끊임없는 도전입니다. 자선을 베푸는 일을 다른 이들에게 위탁하기는 쉽습니다. 다른 이들이 자선을 베풀도록 성금을 내는 것도 관대한 행위입니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의 소명은 자선에 직접 참여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감사드립시다. 많은 사람이 가난한 이들과 배척받는 이들을 돌보는 데에 헌신합니다. 모든 연령대와 각계각층에서 소외되고 고통받는 이들을 이해하고 기꺼이 도우려고 합니다. 그들은 초인적 영웅이 아니라 이웃집 사람’, 곧 스스로 묵묵히 가난한 이들 가운데 하나가 되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그들은 그저 무엇을 주는 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경청하고, 관계를 맺으며, 가난한 이들의 처지와 원인을 이해하고 대처하고자 노력합니다. 그들은 물질적 필요는 물론 영적인 필요에도 주의를 기울이고, 개개인의 온전한 발전을 위하여 힘씁니다.

 

반포 60주년을 기념하는 성 요한 23세 교황 성하의 회칙 지상의 평화(Pacem in Terris)의 다음 말씀을 우리의 마음에 새기면 좋겠습니다. “모든 인간은 생존, 육신 전체, 생활의 품위를 유지하기 위한 절대적인 권리를 갖고 있으며, 특히 양식, 의복, 주거, 숙식 등에 관한 권리가 있으며 의사들의 치료와 그 외 정당한 사회적 봉사 등을 받을 권리가 있다. 또한 인간은 병고, 노동력의 결여, 과부 신분, 노환, 실업 등에 처했거나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생존 방법을 상실하는 경우에도 안전하게 살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11)

 

말씀이 실현되려면, 특히 정치 지도자들과 입법자들의 진지하고 효과적인 헌신을 통하여 이루어져야 할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모든 것을 위로부터받으려고 수동적으로 기다린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빈곤 속에 살아가는 이들 또한 변화와 책임의 과정에 참여하고 동행해야 합니다. 새로운 형태의 가난을 인식하여야 합니다. 전쟁의 상황에 휘말린 사람들, 특히 평온한 현재와 품위 있는 미래를 빼앗긴 어린이들을 생각합니다. 또한 투기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이는 많은 가정을 더욱 가난하게 만드는 극적인 물가 급등을 일으켜 왔습니다. 수입은 빠르게 바닥나고 모든 이의 존엄성을 위태롭게 하는 희생이 강요됩니다. 그렇다면 현재 노동계 안에서 빚어지는 윤리적 혼란을 어떻게 간과할 수 있겠습니까? 수많은 노동자에게 가하는 비인간적 대우, 노동에 대한 부적합한 대가, 고용 불안이라는 참상, 그리고 때로는 안전한 일터보다 즉각적 이익을 선택하는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과도한 재해 관련 사망자 수 등이 그렇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강조하신 말씀을 떠올립니다. “노동의 가치를 부여하는 일차적인 근거는 …… 인간 자신이라는 것을 뜻할 뿐이다. …… 아무리 인간이 일할 운명을 타고났고 소명을 받았다 하여도 우선적으로 노동이 인간을 위하여있는 것이지 인간이 노동을 위하여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노동하는 인간’, 6).

 

그 자체로 심각한 괴로움인 이러한 형태의 가난들은 이제 우리 일상생활의 일부가 되어버린 빈곤의 실태에 대한 부분적인 설명일 뿐입니다. 저는 특히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미치며 점점 더 두드러지는 가난의 형태를 바라봅니다. 젊은이들에게 자신을 낙오된 패배자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도록 부추기는 문화는 얼마나 많은 좌절과 얼마나 많은 자살을 일으키고 있습니까.

 

토빗기는, 우리가 가난한 이들과 함께 그리고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무슨 일을 하든지 현실적이고 실질적이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는 정의에 관한 문제입니다. 공동체가 스스로를 정의롭다고 느끼는 데 요구되는 화합을 촉진하려면 우리가 서로를 찾아내고 알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을 돌본다는 것은 그저 재빨리 내미는 도움의 손길 이상입니다. 이는 가난이 훼손한 올바른 상호 인격적 관계를 재정립하도록 요청합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누구든 가난한 이에게서 얼굴을 돌리지 않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자비와 애덕의 유익을 누리도록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가난한 이들을 향한 우리의 관심이 언제나 복음의 현실주의로 특징지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나눔은 단지 남아도는 물건들을 처리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고 상대방의 구체적인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서도 또한 성령께서 이끄시는 식별이 요구됩니다. 이는 우리 자신의 개인적 희망과 열망이 아닌 우리 형제자매의 진정한 필요를 인식하기 위함입니다. 가난한 이에게 필요한 것은 분명히 우리의 인류애, 사랑에 열려 있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결코 다음의 사실을 잊지 맙시다. “우리는 가난한 이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알아 뵙고, 그들의 요구에 우리의 목소리를 실어주도록 부름받고 있습니다. 또한 그들의 친구가 되고, 그들에게 귀 기울이며, 그들을 이해하고, 하느님께서 그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신 그 신비로운 지혜를 받아들이도록 부름받고 있습니다.”(‘복음의 기쁨’, 198)

 

우리의 집인 이 세상에서는 모든 이가 애덕의 빛을 경험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 누구도 그 빛을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세계 가난한 이의 날에 데레사 성녀의 굳건한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 “누구든 가난한 이에게서 얼굴을 돌리지않고,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적이며 신적인 면모에 언제나 초점을 맞추도록 도와주기를 빕니다.

 

 로마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프란치스코

 

전문: https://www.cbck.or.kr/Notice/20230526?gb=K1200

 

------------------------------------------

 

연중 제33주일 세계 가난한 이의 날 꽃꽂이

https://bbs.catholic.or.kr/home/bbs_view.asp?id=193727&menu=frpeterspds2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13 0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