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강론

연중 제30주일(가해) 마태 22,34-40; ’23/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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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23-10-21 ㅣ No.5555

연중 제30주일(가해) 마태 22,34-40; ’23/10/29

 

 

  

 

 

 

지난 번에 어떤 교우분이 코로나19라는 전염병이 우리에게 닥친 것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벌을 주시는 것인가요?”라고 여쭈셨습니다. 그런데 코로나19 감염상황의 발발은 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벌을 주신다기보다는, 우리 인간이 자연의 질서 체계를 교란시키는 바람에 생겨난 재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만드시고 나서, 우리 인간들에게 잘 관리하도록 맡기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이 그 동안 동식물을 비롯한 자연을 소중하게 여기고, 그 존재 이유와 목적에 따라 잘 관리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우리 인간이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자연을 훼손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자연을 착취하였습니다. 그래서 주 하느님께서 창조시에 만들어 주신 자연의 질서 체계가 손상되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그 손상된 자연의 질서 체계가 다시 회복될 때까지는, 우리가 코로나19 감염과 확산에 따르는 어려움을 겪어야 할 만큼 다 겪고 난 다음에야 이런 상황이 진정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상황에서, 주 하느님을 믿고 기도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무엇이든지 다 하실 수 있으시지만, 그야말로 주 하느님께서 개입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의 마지막 상황이 닥쳐, 이를 해결하기 위한 특별한 계획이 있을 때에만 인간 세계에 개입하십니다.

 

그렇다고 주 하느님께서 열심히 미사에 참례하고 기도하는 이들에게는 코로나에 안 걸리게 해주신다든지, 걸려도 금방 낮게 해주시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기도하는 우리도 알게 모르게 자연의 훼손에 일정한 책임을 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미사에 참례하고 간절히 기도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작년 대림 시기를 상기해 볼 때, 대림 제4주일 미사 복음인 마태오 복음 서두인 118절부터 24절을 보면, 주 예수님께서는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요셉 성인이 자신과 결혼할 여인 마리아가 결혼하기 전에 임신한 사실을 알았습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마태 1,19)합니다. 그런데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20-21) 라고 전해줍니다. 그리고 바로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23) 라는 해석이 이어집니다.

 

그렇게 놓고 본다면, 주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한다고 코로나19를 비롯하여, 인류를 위협하는 자연 재해를 하루 아침에 없애 주시겠다고 약속하지도 않으시고, 미사에 열심히 참례하고 간절히 기도하는 우리 신자들은 병이 안 걸리게 해주시겠다든지, 걸려도 빨리 낳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십니다. 그 대신 우리와 함께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우리는 가끔 병에 걸려 죽을 것만 같은 아픔을 겪고 발버둥을 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누군가가 우리 손을 잡아 주기만 해도, 그 아픔이 반감하는 기분을 느낍니다. 누가 우리 손을 잡아준다고 외적이고 육체적인 병이 낫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를 잡아준 손을 꽉 잡고 매달리면서 아픔을 견디기 위해 애쓰게 됩니다. 그러면 어딘지 모르게 아픔이 줄어드는 기분이 들고, 누군가에게 의지하면서 우리 병이 나을 것만 같은 기대도 자연스럽게 하게 됩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하는 심정과도 같은가 봅니다. 어떤 때는 마취제의 농도를 높여가면서, 그렇게 여러 번 맞아도 통증이 가시지 않다가도, 누군가에게 위로를 받을 때 통증이 약화되는 것을 느낍니다. 누군가가 나의 아픔을 위로해주고 함께해준다는 사실에, 심리적이라고 할지라도 내 마음이 조금 편안해지고 고통을 이겨내게 해줍니다. 아플 때 사람이 옆에만 있어주어도 그렇게 위안이 되는데, 주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해주신다면야 얼마나 더 좋겠습니까?

 

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상에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우리 죗값으로 대신 주님의 목숨을 바쳐서 우리에게 주님 생명을 나눠주고 돌아가신 후,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제자들과 다시 함께하시다가 승천하실 때, 또 같은 말씀을 하시면서 우리에게 힘과 위로를 안겨주셨습니다. 마태오 복음 맨 마지막 장면에서, 주님께서는 하늘에 오르시면서 제자들에게, 온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하시고, 약속해주십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9-20)

 

주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있든, 우리 몸이 어떤 상태에 있든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우리를 위협하는 병을 없애 주시고, 병에 걸린 우리를 금방 낳게 해주시지는 않지만, 우리와 함께 아파해주시고, 우리 손을 맞잡고 우리의 병고를 나눠 짊어져 주시고, 우리의 고통을 함께 겪어 주시고, 우리를 위로해주시면서 우리가 처한 병고와 어려움에서 우리가 이겨낼 수 있도록 힘을 주십니다. 설사 병이 완쾌되어 낳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주님께서는 마지막까지 우리와 함께하시면서, 우리를 주님의 영원한 행복의 나라로 데려가 주십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늘 우리와 함께하시지만, 우리는 미사참례하고 기도할 때만, 그분과 함께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곁에서 늘 함께하시는 주 하느님을 깊이 느끼며, 오늘의 어려움을 이겨냅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마태 22,36) 라는 질문을 통해 율법교사의 시험을 받으십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37-38) 라고 답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39-40)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 맨 처음 우리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지금 이 순간에, 우리가 자연을 훼손하여 세상을 어지럽힌 우리의 부주의와 이기적인 타성에 대해, 주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고 회개의 삶을 시작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훼손하고 손상시킨 주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유지하고, 보존하고자 하는 굳은 결의를 다져야 할 것입니다. 내가 직접 손을 뻗쳐 자연계를 훼손하지 않은 것 같지만, 그 훼손 행위를 통해 생겨난 환경을 개발과 문명이라고 여기면서, 간접적인 이득을 취하고 누려왔습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는 무의식 중에 우리에게 주어지고 선택한 물건을 사용하고 쓰레기를 버리면서 환경을 파괴해 왔고, 주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무너뜨렸습니다.

 

찬미하여라라는 회칙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하신 말처럼 우리는 대자연 피조물계의 훼손과 파괴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회심해야 합니다. 주 하느님의 창조 질서를 회복하고 보존하며 유지하는 노력은 정부 당국이나 환경운동가만이 할 일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자각을 통해, 지금까지의 편의와 한계이익만 좇던 생활 습관을 고쳐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피조물계의 훼손은 단순히 자연환경의 파괴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한 부정적인 영향이 우리 인류를 위협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지난 코로나19의 감염상황을 겪으며 뼈저리게 체험한 바 있습니다. 더군다나 오늘 성경에서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9) 라는 주 하느님의 두 번째 계명에 마주 서서, 자연을 더 이상 우리의 발전과 편의를 위해 사용하는 도구로만 여기지 않고, 공존하며 함께 살아 나가야 하는 이웃으로 여기는 발상의 전환을 통해 아끼고 돌보며 보존하고자 하는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며 사랑하기로 합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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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0주일 꽃꽂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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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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