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 게시판

한가협 한티성소 피정, 대구 교구장 조환길 타데오 주교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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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길수 [gsyoon] 쪽지 캡슐

2009-07-28 ㅣ No.1174

지난 3월 한국가톨릭교수회 한티성소 피정시에 대구 교구장이신 조환길 타데오 주교님의 강론이 감명깊어 여기에 올려놓습니다.

전국 가톨릭 교수협의회

2009 03 08(한티)

 

찬미예수님!

여러 교수님들 앞에서 강론을 하려니까 마치 공자님 앞에 문자 쓰는 느낌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쩔 수 없이 저에게 주어진 일이기에 몇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가톨릭 교수님들이 해마다 이런 모임을 갖는다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서로 전공이 다르고 학교가 다르고 또한 교구가 달라도 가톨릭 교수라는 공통분모가 있기 때문에 이런 모임이 가능하지 않은가 싶습니다.

대학을 우리는 흔히 ‘지성의 전당’, ‘진리의 전당’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대학은 진리를 연구하고 진리를 가르치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은 ‘진리를 증언하기 위하여 세상에 왔다’(요한 18,37)고 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당신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8장에 보면 빌라도가 예수님한테 ‘진리가 무엇이요?’(요한 18, 38) 하고 묻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질문만 던져놓고 밖으로 나갑니다. 귀가 있지만 듣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듣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역사 이래 수많은 권력자들이 그래왔고 또 그래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예수님께서는 ‘진리에 속한 사람은 내 목소리를 듣는다.’(요한 18,37)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진리가 무엇입니까? 여기서 말하는 그 진리는 무엇입니까? 진리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 자신이 진리이시고 하느님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그동안 수많은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이 하느님을 설명하고 하느님을 정의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들 부족한 점이 많다고 생각됩니다. 무한하시고 영원하시고 전능하시고 완전하신 분을 불완전한 인간의 사유와 말로써 어떻게 정의할 수가 있겠습니까? 처음부터 잘못된 시도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이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 요한 4,16) 고 말합니다. 이것은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첫 번째 회칙의 제목이기도 하고 이번 우리 세미나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나온 하느님에 대한 정의 가운데 가장 완벽한 정의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것은 사도 요한이 예수님과 3년 동안 동거동락하면서 체득한 진리입니다. 이것은 또한 성경 전체의 요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서라고 하셨는데 예수님께서 저희들에게 무엇을 보여주셨습니까? 당신의 말씀과 행동과 삶으로써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는 사실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더 나아가 당신 자신이 ‘강생하신 하느님의 사랑’임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한 20여 일 전에 어떤 분이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이 선종하시던 날부터 우리 교구 신부님들은 2박3일 동안 대구가톨릭대학교 하양기숙사에서 연수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연수가 끝나는 날 저는 신부님 두 분과 함께 서울 명동성당으로 조문하러 갔습니다. 그런데 도로가 인도에 사람들의 줄이 끝없이 이어져 있는 것을 보고 그 동안 연수하느라 미처 방송 뉴스를 보지 못한 저로서는 그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그 추운 날씨에 줄을 서있는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기사 아저씨한테 물었더니 다들 명동성당에 추기경님 조문하기 위해서 줄을 서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그 며칠 사이에 우리나라에 수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유독 추기경님의 선종을 애도하고 그분을 그토록 기리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를 생각하였습니다.

그분은 제가 알기로 참된 신앙인이셨고 참된 성직자이시고 참된 인간이셨습니다. 그래서 그날 방명록에 저는 이렇게 썼습니다.

“추기경님, 당신은 우리들의 모범이 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장례를 마치던 날 어느 방송의 아나운서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난 일 주일 동안 우리는 매우 슬펐습니다. 그러나 또 한 편으로는 행복했습니다. 왜냐하면 김수환 추기경님으로 인한 사랑과 나눔과 희망의 물결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추기경님은 어떻게 보면 오늘 복음에 나오는 모세와 같은 분이시고 엘리야와 같은 분으로 느껴집니다. 노예생활 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내어 광야에서 40년 동안 단련시키고 가나안 복지로 인도했던 모세와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한 분이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 사악한 이제벨 왕후와 400여 명의 바알 예언자들에 대항해서 외롭게 싸워야 했던 엘리야와도 닮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추기경님께서 가톨릭 신자뿐만 아니라 그 많은 사람들이 존경했던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한 마디로 추기경님께서 진리를 말하고 진리를 몸소 실천하셨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면서도 당신 자신을 바보처럼 낮추셨고 정직하셨고 솔직하셨던 분입니다.

어느 인터뷰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하느님 앞에 부끄러운 사람입니다. 말로만 사랑을 말하고 참사랑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 했습니다.”

“저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살기보다는 가난한 이들과 함께, 내 자신이 가난한 자가 되어서 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용기가 없어서 그렇게 살지 못 했습니다.”

이러한 말씀들이 우리의 양심을 찌릅니다.

추기경님은 좋아하는 시가 윤동주의 서시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그 시를 잘 애송하지 못 한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애송하기가 부끄럽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이 윤동주의 서시를 읊기가 부끄럽다고 한다면 우리 중에 몇 사람이나 그 시를 자신 있게 읊을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김추기경님은 당신의 모토대로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한 평생 한결같은 마음으로 사셨던 분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분이 지금 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큰 바위 얼굴’처럼 남아 있습니다.

 

대학을 흔히 ‘지성의 상아탑’이라고 합니다. 왜 대학을 ‘상아탑’에 비유했을까요? 이 말은 원래 불란서의 어느 비평가가 지식인들에 대하여 한 비판적인 말에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대학이 지식의 상아탑에 갇혀있어서는 안된다는 의미로 쓰여졌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지식을 넘어서 참 진리가 무엇인지를 가르치고 그 진리를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자기만 아는 지성인은 이제 곤란합니다.

사도 요한의 요점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 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세상에 나갑니다. 어떤 어려움이나 유혹이 온다하여도 우리는 한결 같이 진리를 말하고 진리를 실천하는 사람, 사랑을 가르치고 사랑을 사는 사람이 되도록 굳게 다짐합시다. 하느님께서 여러분들에게 큰 축복을 내려주시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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