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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장 나자렛의 성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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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윤석 [drhur] 쪽지 캡슐

2004-10-07 ㅣ No.69

 

2004년 8월호


교본 해설 44


 

2004년 8월호


교본 해설 44


제21장 나자렛의 성가정


레지오 마리애 교본 21장은 그 제목을 ꡐ나자렛의 성가정ꡑ이라고 하였지만 본문의 중심 주제와 신학적 근거로 비추어 볼 때 제목을 ꡐ그리스도 신비체의 삶ꡑ이라고 해야 더 어울릴 것이다.

이 장에서 가장 중요한 문장은 ꡒ우리는 예수님에 관한 일이나 신비를 과거에 있었다가 없어진 일로 볼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현재의 것으로, 그리고 영원한 것으로 여겨야 한다ꡓ(교본 198쪽)는 베릴르(Berulle)의 말이다.

우리는 성호를 그으면서 ꡒ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ꡓ 하고 응답한다. 아멘이란 무엇인가? 바로 지금 여기서, 그리고 영원히 기도의 내용이 나 자신과 삶의 터전인 하느님의 은총의 장소에서 이루어지길 동의하는 하느님 현존의 의식이며 전적인 합일(合一)을 의미한다. 또한 영광송을 보자!

ꡒ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ꡓ

이 기도 역시 하느님의 현존과 영광이 이제와 같이 영원하길 기도하는 합일의 기도이다. 미사 역시 2천년 전의 십자가상의 희생제사를 끝난 것으로 인식하지 않고 인간구원을 위한 희생의 제사가 지금 이 순간 상징이 아닌 현존으로서 재현되는 현재성을 나타낸다.

ꡐ사랑하다ꡑ라는 동사에 있어서 시제는 무의미하다. 진정한 사랑이라면 늘 현재이기 때문이다.

ꡐ사랑했었다ꡑ는 말은 과거에 완료된 것으로, 이미 사랑하지 않음을 나타내며 ꡐ사랑할 것ꡑ이라는 말 또한 지금의 사랑을 발판으로 이야기되는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늘 지금의 행복감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만약 베릴르의 저 위대한 지적을 간과한다면 우리는 신앙인이 아닌 우상을 섬기는 우매한 인간으로 전락할 것이다.

평생 남의 방앗간 일을 도우며 고생 고생하며 살아온, 예순이 된 자매님이 있었다. 그 남편은 술과 노름으로 한평생을 보내더니, 하느님의 은총으로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결혼 초기 남편은 참으로 성실하고 촉망받는 남자였다. 둘은 가난하지만 너무나 사랑하여, 결혼식을 손잡고 흑백사진 한 장 찍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남편과 부인은 주례도 없는 그 사진 한 장의 짧은 순간의 결혼식에서 이렇게 서로 약속하였다고 한다.

ꡒ사랑은 영원하며 고통은 순간이며 믿음은 처음처럼 생각하며 이제와 영원히 살아가자!ꡓ

그러나 공사장에서 왼쪽 팔을 잃은 남편은 사고 이후부터 술과 노름으로 날을 지새며 부인을 괴롭혔다. 너무나 고통스런 나날이었다. 너무나 힘들어 자살을 생각하였던 적도 있었다.

너무 힘들어 어디든 가고 싶었단다. 어디선가 들리는 성당의 종소리를 따라가 그 성당에 들어가서 남을 의식하지 않고 엉엉 울었다고 한다. 한참을 울고 나서 보니 붙들고 운 것은 바로 성모님의 발이었다. 수녀님이 그 자매를 일으켜 수녀원으로 데려가서는 따뜻한 차와 과일을 대접하며 그녀의 고생으로 터진손을 어루만져 주시면서 그 자매의 고생담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질문하였다. ꡒ정말 놀라운 사랑이군요! 어떻게 그 긴 시간 동안 고생하면서 한결같이 남편 뒷바라지를 할 수 있었나요? 당신에게 그 힘은 무엇인가요?ꡓ

그 자매는 가슴에서 낡은 사진 한 장을 꺼내 보여주었다. 바로 그 흑백 결혼 기념 사진이었다.

그 아래 이렇게 쓰여 있었다. ꡒ사랑은 영원하며 고통은 순간이며 믿음은 처음처럼! 평생 지금처럼 영원히!ꡓ

수녀님은 너무 놀라셨다. 이것이야말로 위대한 영광송이구나! 글귀가 영광송과 너무 비슷했던 것이다. 수녀님은 다음과 같이 위로의 말씀을 해주셨다고 한다. ꡒ이 사랑의 다짐처럼 이젠 고통의 순간이 지나고 사랑만이 영원할 것입니다. 고통의 순간에 처음의 믿음을 버리지 않고 사랑하신 고통은 이제 순간으로 변화하고 영원히 사랑만 남을 것입니다.

저는 자매님을 보고 하느님의 사랑이 담긴 진정한 영광송의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영광송은 단순하고 짧은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2천 년  전의 예수님의 사랑은 정말 이제와 같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입니다. 자매님의 사진처럼!ꡓ

그 사진에는 눈물로 번진 사랑의 서약이 맺혀 있었다.

이탈리아에서 잠시 생활할 때 매우 유명한 중국 식당에 간 적이 있었다. 음식이 나오기 전에 그릇이 나왔다. 다양한 앞접시가 나와서 정말 다양하고 비싼 요리인가 보다고 생각하였는데, 글쎄 그 그릇들이 전부 이가 빠진 것들이었다. 그릇이 조금씩 손상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릇이 왜 이러냐고 질문하였더니, ꡒ정말 전통과 맛을 자랑하는 집에서는 가장 귀한 손님에게 집이 생기고서 첫마음을 담아 내어놓던 접시를 씀으로써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도 그 첫마음이 살아있고, 그 첫맛이 살아있음을 나타낸다ꡓ고 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매우 경탄하면서도 조금 부끄러워했다. 우리는 진정한 삶을 살아야 하고, 그 진정한 삶이란 사랑하는 삶이며, 사랑하는 삶은 영원한 삶이다. 이 영원한 삶을 가치있게 살기 위해서는 사랑의 추억을 늘 가슴에 간직하고, 그것을 믿음으로 삼고 성장하는 것이다.

미움은 망각에서, 바로 사랑에 대한 기억상실에서 온다고 한다. 우리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은 이제와 같이 영원한 단원이 되어야 한다. 2천 년 전 나자렛의 성가정에서 성모님 사랑을 받으신 예수님의 성장처럼 회합 안에서 그 따사로운 사랑과 모성애를 수유(授乳)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천상의 지혜를 배워나가야 한다.

회합은 다름 아닌 ꡐ나자렛의 성가정ꡑ인 것이다. 따라서 회합을 차리는 모습은 바로 성모님이 성요셉과 예수님을 위해 저녁상을 차리는 정성스러운 모습이어야 한다.

이 장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문장은 ꡒ만일 쁘레시디움에서 보고 듣는 모든 것이 나자렛 성가정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면, 그러한 쁘레시디움은 나자렛 성가정의 정신이 깃들어 있지 않은 쁘레시디움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쁘레시디움은 죽은 것보다 못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ꡓ(교본 200쪽)이다.

주회합을 의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옳은 표현이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 보자. 한 가정의 어머니가 자식을 돌보면서 늘 ꡐ나는 이것이 의무다ꡑ라고 생각한다면 과연 어머니의 직분을 잘 수행하는 것인가? 진정한 의무는 의무임을 잊고 사랑을 베푸는 것이라고 한다.

회합 참석이 의무지만 그 의무가 서로의 사랑과 신앙이 성장되어가는, 기다려지는 의무가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의 몸이 된 지체로서의 삶이 되는 것이다.

세속에서는 자신의 목적과 수준과 능력이 비슷한 이들을 ꡐ친구ꡑ라 한다. 무엇이든 대가가 있어야 하며 무능력을 죄악으로 치부하기까지 한다. 참으로 우리는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가족의 사랑이 무너지고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피폐하고 불안한 시대에 우리가 기쁨을 느끼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말할 수 있는 자리는 어디일까? 나는 그 답을 레지오 마리애 주회합에서 찾는다.

묵주를 들고 동료단원들과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감사하고 나누는 봉사의 시간! 이것이 바로 주회합 시간이며 성가정의 식탁인 것이다.

교본 21장 ꡐ나자렛의 성가정ꡑ은 2천 년 전 예수님 죽음으로 끝난, 지난 역사 속의 한 가정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레지오 마리애 안에서 드러나는 예수님과 성모님의 따뜻한 가정적 사랑, 따뜻한 온기를 주회합에 중심짓고자 하는 성모님의 뜻이 담긴 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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