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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디모테오에게, 디도에게 보낸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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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03-02-12 ㅣ No.84

 

 

신약 사목서간(디모테오에게 보낸 첫째ㆍ둘째 편지, 디도에게 보낸 편지) 해제

 

 

-엘마로, 장,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 신약성서10 사목서간(디모테오, 디도), 도출판사, 1986

 

 

 

1. 개 관

디모테오에게 보낸 첫째 편지(전서)와 둘째 편지(후서) 그리고 디도에게 보낸 편지는 18세기부터 사목서간이라는 명칭으로 불리어 왔으며 이 명칭은 세 서간의 특징을 잘 나타낸다고 하겠다.

  이 세 서간은 개인의 사사로운 편지가 아니고, 한 사목자가 다른 사목자들에게 교회직분에 관해 지시하며 교회의 제도와 조직, 이단 단죄 등 사목문제들을 다룬 공한(公翰)들이다. 그리고 각 서간의 내용, 문체, 어법, 신학적 사상 등이 서로 비슷하고 교회직분에 관한 내용도 거의 같다. 사목서간은 초창기 교회의 제도에 관한 자료를 제공해 줄 뿐 아니라, 교회론적인 가르침과 그리스도론적인 가르침에 관한 오래된 전승자료도 알려준다(1디모 3,16; 6,15ㆍ16; 2디모 1,8-10; 2,8-13; 디도 3,4-7).

 

2. 각 서간의 구성과 내용

디모테오에게 보낸 첫째 편지(전서)

   인사 (1,1-2)

   1) 이단과 복음 (1,3-20)

      이단을 거부하라 (1,3-7)

      율법의 역할 (1,8-11)

      하느님의 자비로 복음을 선포한다 (1,12-17)

      디모테오의 직무 (1,18-20)

   2) 교회 규범 (2,1-3,16)

      참된 예배 (2,1-15)

      모든 인간을 위한 기도 (2,1-7)

      예배 때 갖추어야 할 올바른 자세 (2,8-15)

      교직자 (3,1-16)

      감독자의 자격 (3,1-7)

      봉사자의 자격 (3,8-13)

      교회와 그리스도 (3,14-16)

   3) 이단자 (4,1-11)

      이단자는 결혼과 음식을 금한다 (4,1-5)

      디모테오의 의무 (4,6-11)

   4) 교직자의 사명과 언행 (4,12-5,2)

      모범적인 생활과 성실한 활동 (4,12-16)

      남녀 각 연령층에 대한 태도 (5,1-2)

   5) 교회 규범 (5,3-6,2)

      과부들에 대하여 (5,3-16)

      장로들에 대하여 (5,17-25)

      노예들에 대하여 (6,1-2)

   6) 여러 가지 권고 (6,3-21)

      이단과 탐욕에 대한 경고 (6,3-10)

      교직 수여식 때의 교훈 (6,11-16)

      재산 관리 (6,17-19)

      마지막 권고와 인사 (6,20-21)

 

디모테오에게 보낸 둘째 편지(후서)

   인사 (1,1-2)

   1) 서두 (1,3-18)

      디모테오의 굳은 신앙심과 충실함에 대한 감사 (1,3-5)

      신앙고백에 관한 격려 (1,6-14)

      지지자와 반대자들 (1,15-18)

   2) 본문 (2,1-4,8)

      믿음직한 후임에 대한 책임 (2,1-2)

      박해의 의미 (2,3-13)

      이단자들과의 대결에 관한 지시 (2,14-26)

      마지막 시대에 일어날 이단 (3,1-9)

      바오로에게 전해 받은 가르침을 지킬 것 (3,10-17)

      디모테오가 당할 어려움과 바오로의 임박한 죽음 (4,1-8)

   3) 개인 소식 (4,9-18)

      바오로의 처지와 디모테오에 대한 부탁 (4,9-13)

      한 반대자에 대한 경계 (4,14-15)

      소송경위에 관하여 (4,16-18)

   4) 개인적인 부탁과 인사 (4,19-22)

 

디도에게 보낸 편지

   인사와 사도직에 관한 말 (1,1-4)

   1) 그레데섬에서의 디도의 사명 (1,5-16)

      장로의 자격 (1,5-9)

      이단을 물리쳐라 (1,10-16)

   2) 교회 규범 (2,1-3,8)

      신분에 따라 지킬 의무 (2,1-10)

      구원을 받은 사람이 지켜야 할 의무의 동기 (2,11-15)

      다스리는 사람과 이웃에 대한 태도 (3,1-8)

   3) 이단자에 대한 태도 (3,9-11)

   4) 개인적인 부탁과 인사 (3,12-15)

 

 

3. 필자문제

사목서간에 관한 초창기 교회의 뚜렷한 증언은 극히 드물다. 이 서간에 대해서 처음으로 분명하게 언급한 이는 2세기말의 이레네오다. 그는 사목서간의 몇몇 구절을 인용하면서 바오로의 말이라고 했다(반이단론 2권 14,7; 3권 3,3ㆍ4). 그리고 200년경에 작성된 신약성서 목록(무라또리 까논)에도 사목서간을 바오로의 서간 가운데 배열하고 있다. 그러니까 2세기 말 이래 사목서간은 바오로의 서간으로 간주되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19세기부터 사목서간의 문체와 내용과 그 신학적 용어 및 어휘가 바오로의 친서와 다르기 때문에 바오로의 진서가 아니라는 설이 점차 대두하였다. 그렇지만 아직도 사목서간은 바오로가 썼다는 전통적인 설을 고수하는 학자들이 있다. 그들은 사목서간이 바오로의 친서라는 것을 뒷받침하는 이유로서, 무엇보다도 먼저 사목서간에 나오는 제반사항과 개개의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는 조작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러나 이들도 사목서간의 문제점은 인정하고, 이 서간들은 바오로가 직접 쓰지 않고 비서에게 대필을 시켰거나 혹은 바오로의 글이 단편적으로 수록되어 있다는 설을 내세운다. 사목서간의 필자를 추정하는데에 중요한 점은 다음과 같다.

 

4. 사목서간에 전제되어 있는 역사적 상황

사목서간이 바오로의 편지라면, 그의 다른 서간들과 사도행전에서 더듬어볼 수 있는 그의 생애의 어느 시기에 썼는지를 추정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1) 디모테오 전서

디모테오 전서에 의하면, 바오로는 에페소에서 마케도니아로 떠날 때(1,3) 에페소에 디모테오를 대리자로 남겨 두었다(3,14; 4,13). 그러나 사도행전에 의하면 사정이 다르다. 바오로는 제 3차 전도 여행 때 에페소에 와서 약 2년 동안 활발히 전교활동을 하였다(사도 19,10). 이어서 그는 마케도니아로 떠났는데, 떠나기 전에 디모테오를 그곳으로 앞서 보냈다(사도 19,22). 그후 57년 가을 바오로가 마케도니아에서 고린토인들에게 둘째 편지를 썼을 때도 디모테오는 바오로와 함께 있었다(2고린 1,1). 그다음 (58년 봄에)마케도니아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갔을 때에도 디모테오는 바오로와 동행하였다(사도 20,1-4). 바오로는 에페소로 돌아가지 않고 그곳의 장로들을 밀레도스로 불러 작별인사를 나누었다(사도 20,16-17).

3) 디도서

디도서에 의하면, 바오로는 얼마동안 디도와 함께 그레데(크레타)섬에서 전교활동을 하고 그곳을 떠날 때 디도를 섬에 남게 했다. 그러나 바오로의 친서들에는 바오로 자신이 그레데섬에서 활동했다는 말이 없다. 바오로가 죄수로서 로마로 이송될 때 그레데를 지나쳐간 적은 있으나, 상륙하지는 않았다.(사도 27,9-16). 그후 바오로는 로마에서 2년 동안 감금생활을 하였다.(사도 28,20). 따라서 바오로가 디도 3,12에서 말하고 있듯이 그레데섬(?)의 니코폴리스에서 활동 할 수는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 디모테오 후서

디모테오 후서는 사목서간의 마지막 편지로 보아야 한다. 이 편지에서 바오로는 자신의 죽음이 가까웠음을 예기하고 있기 때문이다(4,6-7). 그는 감금된 몸으로 이 편지를 썼고(1,8; 2,9) 감금되기 전에 드로아스에 있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4,13). 그러나 이 편지에서 말하고 있는 감금은(원문: "사슬에"!-1,8; 2,9)로마에서의 비교적 자유로 왔던 감금생활과는 다르다(사도 28,16-31). 따라서 바오로가 디모테오 후서를 로마에서 썼다고 보기는 어렵다.

  요컨대 사목서간에 전제되어 있는 역사적 상황은 바오로의 친서와 사도행전에서 더듬어볼 수 있는 그의 생애, 즉 로마에서 감금되기까지의 생애와 부합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바오로가 로마의 감금생활에서 풀려난 뒤에 사목서간을 썼을까? 사실 95년에 씌어진 클레멘스의 서한에 의하면, 바오로는 로마에서 2년 동안 감금생활을 한 후 석방되어 스페인까지 갔다(클레 5,7). 그러나 바오로 사도가 그 뒤 또다시 소아시아로 갔다는 말은 없다. 사도행전의 저자 루가 역시 바오로가 로마의 감금생활에서 석방되어 다시 소아시아로 돌아갔다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바오로가 작별인사를 나누기 위해 에페소의 장로들을 밀레도스로 불러 "이제 나는 여러분이 내 얼굴을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읍니다…"라고(사도 20,25)말한 점으로 미루어, 그는 소아시아를 영원히 떠났던 것이다.  

 

5. 사목서간의 언어

1) 어휘

사목서간에서 사용된 어휘 중 36%는 바오로의 친서에는 없는 말들이고, 20%는 신약성서 전체에도 없는 말들이다. 그뿐 아니라, 사목서간의 여러 낱말들이 2세기 전의 문헌에는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사목서간에 쓰인 말들은 바오로의 친서보다 후대의 언어임이 분명하다. 더욱 주목할 것은 바오로 특유의 중요한 개념들이 다르게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의화(義化)라는 개념은 친서에서 하느님이 베풀어주시는 은총의 상태를 뜻하는데 사목서간에서는 인간이 스스로 닦아야 할 덕을 의미한다(1디모 6,11; 2디모 2,22; 3,16). 디도 3,5에서는 이 말이 바오로의 친서에서와 같은 뜻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그것은 필자의 말이 아니고, 필자가 전통적인 전승을 옮겨 쓴 것이다.

2) 문체

문체도 바오로의 친서와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 사목서간의 문체는 힘찬 데도 없고 격렬하지도 않으며, 그 표현도 바오로의 친서보다 냉정하고 이해하기 쉽다. 많은 학자들은, 바오로가 비서를 시켜 이 서간을 쓰게 했기 때문에 그런 차이가 생겼다고 설명한다. 즉, 바오로는 이 서간들을 구술하여 받아쓰게 한 것이 아니라, 어떤 협력자에게 집필을 맡겼다는 것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것도 그 자체 이미 바오로의 친서임을 간접적으로 부인하는 것이라 하겠다.

 

6. 사목서간의 신학사상

사목서간의 필자는 사변적(思辨的)인 사상가가 아니라, 실제적인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목자다. 그의 사상은 바오로의 사상과 일치하는 점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점도 있다.

  (1) 이 서간의 필자는 전통을 중시하고 있다. 그 전통의 내용은 사도 바오로의 가르침이다. 필자는 그 가르침을 "건전한 가르침"(1디모 1,10)이라 하며 소중히 간직하여 충실히 지키려 했다(1디모 6,20; 2디모 1,12-14).

  (2) 따라서 사목서간의 신학사상이 바오로와 전혀 무관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 필자는 사상적으로 바오로의 영향을 많이 받아 그 어법을 그대로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오로에 비해 신학적인 수준이 낮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다. 그의 그리스도론 역시 바오로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물론-주로 전해 받은 고백문 안에서-그리스도를 주님(Kyrios)이라고 한다. 그리스도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중개자"로서 "당신 자신을 모든 이를 위한 대속물로 내주셨다"(1디모 2,5ㆍ6). 그래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자이다(디도 1,4; 3,6). 그렇지만 하느님도 역시 "주님"이라고 부르며 모든 인간의 구원자로 이해하고 있다(1디모 4,10).

  (3) 그러나 바오로와 뚜렷한 차이점들도 있다. 바오로는 예수의 재림을 뜻하는 말로 내림(parusia)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사목서간의 필자는 내림 대신 시현(示現), 즉 에피파니아(epi-phania)란 말을 사용했는데 이 말은 예수의 재림뿐 아니라, 사람이 되신 것(육화)도 뜻한다(2디모 1,10; 참조 디도 2,11; 3,4).

  (4) 그리고 바오로는 십자가와 부활을 구원사건으로 보았지만, 사목서간의 필자는 예수의 지상생활 전체를 구원사건으로 보았다(디도 2,11; 3,4). 그리고 바오로는 "육과 영"을 대립적인 것으로 보았으나, 사목서간의 필자는 그렇지 않다. "육"이란 말은 한번밖에 쓰지 않았고, 그것도 예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을 가리켜 "그분은 육으로 나타났다(이 세상에 오셨다)"(1디모 3,16)고 했을 뿐이다.

  (5) "의"란 말의 용법은 바오로와 같은 경우도 있고, 다른 경우도 있다. 이 필자가 "의"는 행실을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본 것은 바오로와 일치한다(2디모 1,9; 디도 3,5참조). 그러나 대체로 두 사람은 "의"란 말을 다른 뜻으로 쓰고 있다. 바오로는 "의"란 믿는 사람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받은 구원으로 보았다. 그러나 사목서간의 필자는 "의"를 경건성과 비슷하게 인간의 도덕적인 정직성으로 간주하여 인간은 이 "의"를 자기 노력으로 얻어야 한다고 했다(1디모 6,11; 2디모 2,22; 3,16; 4,8).

  (6) 또한 사목서간의 필자는 믿음이란 신앙행위가 아니라, 신앙 내용을 뜻한다고 보았다(1디모 3,9; 2디모 3,8). 이것은 바오로 사상과 동떨어진 것은 아니지만, 사목서간의 필자는 그 신앙의 내용이란 전해 받은 가르침, 말하자면 지켜야 하고 또다시 전해 주어야 할 말씀(2디모 1,14), 곧 "확실한 말씀"(1디모 1,15; 3,1; 4,9; 2디모 2,11; 디도 3,8)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7) 그리고 또 한가지 큰 차이점은 바오로와는 다른 세말관이다. 두 사람의 세말관을 비교해 보면, 사목서간의 세말관은 바오로 이후의 것으로 짐작된다. 바오로는 세말이 곧 다가올 것으로 보고 애타게 기다렸다. 그러나 사목서간의 필자는 세말을 먼 미래의 일로 보고 역사는 얼마동안 그대로 계속될 것으로 생각하여 교회의 제도와 현세의 질서를 중시하였다. 그렇다고 재림에 대한 기다림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고(1디모 6,14; 2디모 4,1; 디도 2,13참조), 그리스도는 "정해진 때에" 나타나신다고 했다(1디모 6,15). 예컨대, 재림의 날이 가까이 다가온 것은 아니니, 젊은 과부들은 다시 결혼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던 것이다(1디모 5,14). 이런 지시는 1고린 7장의 결혼관과 다른다.

 

1) 이단자들

  (1) 사목서간에서는 이단자들이 장차 날뛸 것이라고도 하고(1디모 4,1; 2디모 3,1), 이미 교회 안에서 날뛰고 있다고도 한다(1디모 1,3-7; 1,19ㆍ20; 6,20ㆍ21; 2디모 2,16-18; 디도 1,10-11). 그 미래 시제(時制)는 바오로의 입을 빌어 필자 자신의 시대상황을 알리고 있는 것 같다. 이 서간을 쓴 당시에는 확실히 이단자들이 준동하고 있었다.

  (2) 이 세 서간에 나오는 이단자는 모두 같은 부류의 이단자들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들은 유대교 및 영지주의(gnosis)에서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단의 유대교적 요소는 족보시비, 또는 꾸민 이야기(mythos)와 율법에 관한 토론 등에서 엿볼 수 있고(1디모 1,3ㆍ4; 디도 1,10ㆍ14; 3,9), 영지주의적 요소는 절제에 관한 그릇된 사상, 예컨대 결혼을 금하고(1디모 4,3) 자기들에게는 이미 부활이 이루어졌다고 믿었던 오류에서 엿볼 수 있다(2디모 2,18). 이 필자는 바오로와는 달리 이단의 오류를 일일이 논박하지 않고, 단지 그것이 건전한 가르침과 어긋난다고만 말하고 있다(1디모 6,3; 2디모 2,14).

 

2) 교계제도

  (1) 사목서간에서 살필 수 있는 교회상은 바오로 친서의 교회상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사목서간에서는 바오로 친서에서와는 달리 교계제도가 상당히 기틀이 잡혔다. 교직자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교회를 위협하고 있는 이단자들을 배격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장로들이나 감독자들은 교회의 지도자들이며(1디모 3,1-7; 5,17-22; 디도 1,5-9), 이들은 안수례를 통해서 그 직분을 받았다(1디모 4,14 ). 이런 직분이 제도화되었다는 것은 교직자마다 특별한 자격과 자질을 갖추어야 한다는 규칙이 있었던 사실로 뒷받침된다. 한편 필자는 이상하게도 디모테오와 디도의 의무는 자세히 말하면서도 이들의 지위에 대해서는 앞에서 말한 교계제도(감독자와 장로들)와는 다른 관점에서 생각한 듯하다. 그는 디모테오를 예수 그리스도의 "종"(1디모 4,6), "일꾼"(2디모 2,15), "복음 전도사"(2디모 4,5)라고 했는데 이런 말들은 직명이 아니다. 아마 필자는 바오로의 제자인 디모테오와 디도를 한갓 교회의 관리자로 보지 않고, 그 교회 관리자들의 모범으로서, 전통적인 가르침을 수호하고 전하는 중요한 인물들로 이해한 것 같다.

  (2) 사도 바오로의 시대에는 성령의 작용인 은사가 다양하였다. 그런데 사목서간이 씌어진 시대에는 예언의 은사만 남아 있고(1디모 1,18; 4,14) 그밖의 은사들은 교계제도에 흡수되어 버렸다. 따라서 은사의 중요성은 많이 감소되었다. 물론 교회직분 역시 성령의 도우심으로 수여되었지만(1디모 4,14; 2디모 1,6) 본래 자유로 왔던 은사현상이 쇠퇴한 것만은 확실하다. 그 결과, 신도들 전체가 교회생활(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던 추세는 수그러지고 대다수가 단지 교직자들의 말을 듣고 순종하는 소극적인 경향을 띠게 되었다.

  (3) 교직자는 세 부류, 즉 감독자, 장로 및 봉사자다. 감독자와 장로들은 무엇보다도 이단을 배격하고 "건전한 가르침"을 지키는 책임을 맡았다. 감독자와 장로들과의 관계는 분명하지 않다. 장로들은 교직자단에 속해 있으나, 그 역할은 자세히 서술되지 않았다. 감독자는 사목서간에서 언제나 단수로 언급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장로와는 다른 직분일 수도 있으나, 한번도 함께 언급되지 않은 사실에서 추론하면 이 무렵에는 아직 동일한 직분이었을 개연성(蓋然性)이 더 많다. 왜냐하면 장로들은(1디모 5,17) 감독자(1디모 3,5)와 똑같은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디도 1,5-7에서도 장로와 감독자를 구별하지 않고 있다. 원래는 서로 다르게 쓰인 두 가지 용어를 사목서간이 씌어진 당시의 교회에서는 같은 직분을 가리키는 동일한 개념으로 나란히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학계에서는 설명하고 있다.

  이제까지 고찰한 모든 점으로 미루어 사목서간은 바오로의 친서가 아니라고 추론해야 할 것 같다. 즉, 문학유형상 가명작품(假名作品)혹은 위서(僞書)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7. 위서문제

서기 기원을 전후하여 그리스도 교회와 유대교 안팎에는 많은 위서가 있었고, 또 그 당시 사람들은 현대인들과는 달리 그것을 위선적인 것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오히려 위서들은 그 무렵 널리 활용되던 문학유형의 하나였으니, 그것을 현대의 관점에서 단순하게 거짓말이나 위조작품으로만 평가해서는 안된다. 위서의 저자들은 대개 과거의 위대한 인물들의 이름을 도용하여 작품을 엮었다. 즉, 작품의 권위를 높이는 한편, 그 위인의 성격과 사상을 되새겨 그가 당대에 살고 있다면 꼭 이러저러한 생각을 했을 것이라는 추정을 하고 그것을 자기 서적에 서술했던 것이다. 사목서간의 필자 역시 같은 의도로 바오로의 이름을 빌어 그 서간을 썼을 것이다. 그가 위서문학의 유형을 사용했다고 해서 그의 성서적 사상이 그릇된 것이라고 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필자가 남을 속이고자 한 것이 아니라 지난날에 사도로서 그 명성을 떨친 바오로의 사상에 따라 현재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려 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필자는 "바오로의 편지"를 집필함으로써 바오로의 신학사상을 자기 시대, 자기 환경에 적용하려 했을 뿐이다. 이런 입장에서 본다면 우리는 성서의 무류성을 문제시할 필요가 없다.

  끝으로 위서문학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계시헌장 12항을 소개한다. "성서 저자가 말하고자 한 바를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그 저자의 시대에 널리 통용되고 당시 사람들의 공동생활에서 널리 관습화되어 있었던, 감정과 말과 이야기의 답습된 표현양식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8. 사료(史料)

  1) 사목서간에는 확실히 바오로에게서 비롯한 사료가 수록되어있다. 필자는 바오로의 가르침을 보존하기 위해 그의 이름을 빌었기 때문이다.

  2) 초창기 교회의 전례에서 빌어 온 사료도 있다. 예를 들면, 송가(doxologia)와 영광송(hymnus)같은 것이다(1디모 1,17; 3,16; 6,15-16; 2디모 2,8).

  3) 1디모 6,13; 2디모 1,9; 2,8; 4,1; 디도 3,3-7 같은 신앙의 정식적(正式的)표현과 "이 말씀은 확실하다"(1디모 1,15; 3,1; 4,9; 2디모 2,11; 디도 3,8)같은 표현도 전해 받은 사료를 이용했음을 암시한다.

  4) 1디모 3,1-13과 디도 1,5-9에는 교직자들이 지켜야 할 덕목과 멀리해야 할 악덕들이 열거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누구나 유의해야 할 사항들이며 꼭 교직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것은 일반적 덕목을 교회직분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의식적으로 적용하였음이 분명하다.

 

9. 집필 연대

사목서간은 그 필자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집필 연대도 정확하게 추정할 수는 없다. 필자는 바오로도 아니고, 그의 제자도 아니다. 다만 바오로를 높이 평가하고 존경한 인물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가 바오로에게서 비롯한 사료를 이용한 점으로 미루어, 90년 이후에 이 사목서간을 집필했을 것이다. 그 까닭은, 바오로의 친서들이 이 무렵에는 집성(集成)되어 정리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목서간에서는 감독자와 장로가 구별되지 않은 것과는 달리, 117년경에 안티오키아 주교 이냐시오는 감독자를 교회 최고 지도자로 지칭하고 장로들이나 봉사자들과는 명확하게 구별하였다(막네시아 신도들에게 보낸 편지 3,2; 6,1). 즉, 이 때에 와서는 사목서간의 교회상에 비해 교계제도가 한결 뚜렷하게 발전했던 것이다. 이런 차이로 미루어, 사목서간은 117년 이전에 집필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대체로 그 집필 연대를 100년경으로 추정해도 무난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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