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강론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21/06/12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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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21-05-30 ㅣ No.4683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21/06/12 토요일

 

오늘은 교황님께서 기도의 매우 일반적인 어려움 몇 가지를 거론하시면서, 기도의 생생한 체험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을 살펴보겠습니다.

 

교황님은 기도하는 것은 쉽지 않다고 하십니다. 기도할 때는 많은 어려움이 따릅니다. 우리는 그 어려움을 인식하고, 식별하고, 극복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첫 번째 어려움은 분심입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2729항 참조). 여러분이 기도를 시작하고 나면 곧바로 생각이 돌아다니기 시작합니다. 여러분의 생각도 마음도 그곳에 가 있습니다. 집중력을 얻고 유지하기 위한 싸움은 단지 기도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부할 때나, 운동할 때도 정신적 훈련이 동반돼야 합니다.

 

분심이 잘못은 아닙니다. 하지만 싸워 이겨야 합니다. 우리 신앙의 유산 중에 종종 잊혀지지만, 복음 안에 자주 등장하는 덕목이 한 가지 있습니다. 이 덕목을 바로 깨어있음이라고 합니다. 예수님도 이에 대해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36).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다시 돌아오시는 날과 시간을 모르기 때문에, 우리 삶의 모든 시간이 소중합니다. 분심 속에서 갈피를 못 잡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순간에 우리 주님의 음성이 울려 퍼질 것입니다. 분심이란, 상상력이 돌고, 돌고, 도는 것입니다. 데레사 성녀는 기도 안에서 돌고 도는 이러한 상상력을 집안의 미치광이(la pazza della casa)”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는 주의를 기울여 상상력을 멈추고, 가두어야 합니다.

 

메마름의 때에 대해 말하는 것은 가치가 있습니다. “마음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생각도 기억도 감정도 없다. 심지어 영적인 감흥도 느끼지 못한다. 이때는 마치 고뇌와 무덤 속에서 예수님과 함께 머무는 참된 신앙의 순간이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2731). 예수님은 돌아가셨으니 우리는 혼자다.’ 이것이 바로 메마름을 낳는 근원적인 생각입니다. 종종 우리는 메마름의 이유가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 자신에게 있을 수 있지만, 외적 또는 내적 삶의 특정 상황을 허락하시는 하느님께 달려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자주 우울합니다. , 아무런 느낌도 없고, 아무런 위로도 없고, 더 이상 어떻게 할 수도 없을 때입니다. 침울한 나날입니다. 인생에서 그런 날들은 참 많습니다! 하지만 우울한 마음이 생기는 것은 위험합니다. 우울함이 마음에 들어오면, 마음은 병듭니다. 우울한 마음으로는 기도할 수도 없고, 위로를 느낄 수도 없습니다! 우울한 마음으로는 영적 메마름(aridità spirituale)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마음이 열려 있고 밝아야 주님의 빛이 들어옵니다. 주님의 빛이 들어오지 않으면 희망을 갖고 기다려야 합니다. 하지만 우울함으로 마음을 닫지 마십시오.

 

게으름(기도 중에 직면하는) 또 다른 유혹입니다. 게으름은 또 다른 결점이며 악습입니다. 게으름은 기도에 대한 진정한 유혹이며, 더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유혹입니다. 게으름은 금욕 정신이 해이하고 경계심이 감퇴하여 마음이 태만해짐으로써 나타나는 일종의 의기소침”(‘가톨릭교회 교리서’, 2733)입니다. 게으름은 7가지 악습들가운데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게으름은 교만으로 양육되어 영혼을 죽음으로 이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열정과 의기소침이 번갈아가며 생길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항상 앞으로 걸어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영적 삶의 진정한 진보는 탈혼 체험을 거듭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시기에도 인내하며 앞으로 걸어가고, 걸어가고, 걸어가는 역량에 있습니다. 피곤하면 잠시 멈추어 쉰 다음, 다시 걸으십시오. 항구함으로 말입니다. ‘완전한 기쁨(perfetta letizia)’에 대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비유를 기억합시다. 완전한 기쁨은 한 수도사의 능력으로 평가되는, 천국에서 비처럼 내리는 무한한 행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정받지 못하고 무시당하고 초심을 모두 잃었더라도 꾸준하게 나아가는 데 있습니다. 모든 성인들도 이 어두운 골짜기를 통과했습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도록 배워야 합니다. “나의 하느님, 제가 당신을 믿지 않도록 당신께서 모든 것을 하시는 것처럼 보인다 해도, 저는 당신께 계속 기도하겠습니다.” 신앙인들은 결코 기도를 멈추지 않습니다! 때로는 욥처럼, 하느님께 항의하는 것도 기도하는 한 방법입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자주 화를 내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는 아들이 아버지와 관계를 맺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아들이 그를 아버지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화를 내는 것입니다.

 

욥보다 훨씬 덜 거룩하고 인내심이 부족한 우리 역시 마지막 때에, 적막의 시간이 끝날 때, 우리가 하늘을 향해 말없이 외치는 소리와 수많은 ?”라는 물음에 하느님께서 응답해 주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라고 외치는 기도를 잊지 마십시오. 이는 아이들이 무엇인가를 알아듣지 못하기 시작할 때 하는 기도입니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질문의 시기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그 시기에 아이가 아빠에게 아빠, 왜요?”라고 묻기 때문입니다. “아빠, 왜요?” “아빠, 왜요?” 하지만 주의해야 합니다. 아이는 질문을 하고도 아빠의 대답을 듣지 않습니다. 아빠가 대답을 시작하지만, 아이는 또 다른 왜요?”를 준비합니다. 아이는 대답보다 단지 자신에 대한 아빠의 관심을 받고 싶어합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약간 화를 내고 그 이유를 말하기 시작하는 것은 우리의 불행과 어려움 그리고 우리 삶을 향한 아버지의 관심을 받기 위함입니다. , 그렇습니다. 하느님께 하지만, 왜 그래야 합니까?”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내십시오. 때로는 조금 화를 내는 것도 좋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느님과 맺어야 할 아들과 아버지와의 관계, 딸과 아버지와의 관계를 일깨우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가장 가혹하고 쓰라린 표현조차도, 하느님께서는 아버지의 사랑으로 받아들이시고, 그러한 우리의 표현조차도 우리의 신앙 행위로, 기도로 생각하실 것입니다.

 

전문: https://www.vaticannews.va/ko/pope/news/2021-05/papa-francesco-udienza-generale-preghiera-difficolta.html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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