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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를 향하여: 사순 제1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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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신부 [jpatrick] 쪽지 캡슐

2001-03-03 ㅣ No.239

2001년 3월 4일

사순 제 1 주일 성인 강론 (다해)

 

제 1 독서 : 신명 26,4-10

제 2 독서 : 로마 10,8-13

복     음 : 루가 4,1-13

 

 

형제 자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우리는 지난 수요일 머리에 재를 얹으며 '사람은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라'(창세 3,19)는 창세기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흙은 세상 모든 더러운 것들 속에서 묵묵히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모든 생명체를 먹여 살리는 어머니와도 같습니다. 지난 겨울 꽁꽁 얼었던 땅들이 이제 서서히 녹고 푸르른 움이 터오고 있습니다. 죽음과도 같던 차가운 땅이 어느새 새로운 생명을 품고 봄을 알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머리에 얹은 재는 바로 그 흙과도 같습니다. 사람의 기원을 생각하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끄시는 주님의 은총을 머리에 얹은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사순시기를 시작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에 동참하며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그 길을 말입니다. 이것은 대자연이 우리에게 일깨워 주는 것처럼 죽음이 생명을 이길 수 없는 신앙의 진리를 대변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또한 그 재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은총에 대해 부족하기만 한 우리의 자화상과도 같습니다. 무엇으로 그 재를 만들었습니까?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열광적으로 환호하며 흔들던 그 거룩한 가지를 태워 만든 재입니다. 지금 당장 세상을 통치하실 영광의 주님을 만나 뵌 듯 환호하던 그 가지, 하지만 머지않아 환호의 가지를 들었던 손은 분노와 원망으로 가득차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 힘주어 외치는 손이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성지는 인간의 변덕과 간사함, 하느님 중심이 아닌 자기중심적인 삶을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또다시 사순시기를 시작하면서 바로 그 변덕스럽고 이기적인 인간을 상징하는 듯한 성지를 태워 그 재를 머리에 얹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짐했습니다. 올 사순절에는 다시는 주님의 배반하지 않고 주님의 뜻을 앞세우는 삶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요르단강에서 성령을 가득히 받고 올라 오신 뒤 광야에 가셔서 사십 일 동안 악마의 유혹을 받으셨다고 성서는 전하고 있습니다. 성서는 왜 예수님의 유혹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을까요? 감히 만물의 주재자요 전지전능하신 예수님께 악마의 유혹이라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성서는 그 만큼 죄의 유혹이 우리에게 얼마나 커다란 문제인지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죄의 유혹이란 결코 방심할 수도 방심해서도 안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동시에 어떻게 죄의 유혹을 이겨내야 할지 그 방법 또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세상 모든 유혹이 그렇듯이 유혹은 인간의 탐욕과 미움을 매개체로 합니다. 수많은 병균들이 공기중에 떠돌다가 그 공기를 통해 사람에게 감염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공기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인간의 탐욕과 미움 역시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넘어뜨릴 수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 한 구석에는 남보다 더 많이 갖고 더 높이 올라서려는 탐욕과 자신의 목적에 반대되는 이에 대한 강한 미움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있는 것을 없다고 하는 것은 올바른 해결 방법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유혹의 부정은 진정한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보여주셨던 것처럼 유혹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자세, 어렵고 힘들수록 주님의 말씀에 더욱 의지하며 거기서 힘을 얻으려는 겸손한 자세만이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씀은 네 바로 곁에 있고 네 입에 있고 네 마음에 있다"(신명 30,14) 하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또 "예수는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또 하느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을 마음으로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로마 10,9)이라고 하십니다. 예수가 주님이심을 입으로 고백하고 마음으로 믿는 것, 그것이 바로 유혹을 이겨내는 첫걸음이 됩니다. 고백은 증거요 실천을 뜻합니다. 우리가 귀로 들은 것은 쉽게 잊혀지거나 힘을 잃을 때가 많습니다. 누가 나에게 어떤 일의 방법에 대해 들려주었을 때 직접 실천해보지 않고서는 자기의 것으로 만들기가 어렵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내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직접 내 입으로 고백하고 내 손으로 실행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실천은 마음으로부터 굳은 믿음이 있을 때 비로소 힘을 얻게 됩니다.

 

사순시기 40일은 예수님께서 악마의 유혹을 받으셨던 광야와도 같습니다. 사실 사순절이 되면 오히려 세상의 유혹이 더 많아지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아마도 평소에는 이런저런 유혹에 별생각없이 살다 보니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오스딩 성인은 "오, 복된 탓이여!"라며 죄를 묘사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 의미는 바로 이런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죄와 유혹에 대해 무감각한 삶은 그만큼 하느님의 은총으로부터 멀다는 것입니다. 죄와 유혹은 끊임없이 우리를 넘어뜨리지만 우리는 거기서부터 하느님께 다시 나아갈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죄를 복되다 한 것이지 그 자체로 복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 교구장님께서 금년 사순절 담화문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고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느님의 가르침을 잊어버리면, 눈앞의 이익과 안일을 추구하게 됩니다. 우리 사회 전반에 만연해 있는 부정과 부패, 불신과 죄악 등 수없이 많은 문제들은 하느님의 가르침을 외면한 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몫을 챙기기에만 급급한 결과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의 죄와 유혹에 무감각해지고 더 나아가 적당히 타협하고 망각한 체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의 삶의 자세가 바로 가장 큰 유혹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광야로 나아가야 합니다. 적막하고 아무런 생명도 없고 희망조차 없는 것처럼 보이는 그곳으로 말입니다. 멀리갈 필요도 없습니다. 바로 우리의 삶 자체가 광야에서의 삶처럼 느껴질 때가 너무도 많기 때문입니다. 광야로 나아감은 그래서 어떤 장소적인 의미보다는 현재 자신의 삶을 세상의 눈이 아닌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는 성찰의 삶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정확한 성찰이 없는 회개는 많은 경우 우리 자신마저 속일 수 있습니다. 마음을 찢는 뉘우침 없이 그저 껍데기만을 찢으며 회개했다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추운 겨울을 보내고 봄의 생명력이 움터 나오는 것처럼, 광야를 향해 걷는 우리의 여정은 머지않아 죽음이 아닌 생명의 길을 알려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광야를 두려워하기보다 용감히 걸을 수 있는 은총을 구하면서 사순절을 맞이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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