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강론

연중 제5주간 토요일 ’22/02/12 미사와 성시간 미사의 영성 03 자비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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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22-02-02 ㅣ No.4929

연중 제5주간 토요일 ’22/02/12

미사와 성시간 미사의 영성 03 자비송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말씀 예리코에서 눈먼 이를 고치시다(루카 18,35-43)

18 35예수님께서 예리코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의 일이다. 어떤 눈먼 이가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다가, 36군중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37사람들이 그에게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 하고 알려 주자, 38그가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 39앞서 가던 이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40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데려오라고 분부하셨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41"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그가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42예수님께서 그에게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43그가 즉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 군중도 모두 그것을 보고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미사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참회예절을 갖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이 참회예절은 주님을 만나러 달려온 사람에게 다시 만나기 위한 준비를 시키는 듯할 정도로 중복되고 불필요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미사에 참석하여 성체를 모시고자 한 사람들은 이미 미사 전에 고해성사를 보았을 것이며, 최소한 주님을 만나려고 미사에 참석하고자 하는 마음의 준비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참회예절을 또 시키는 것은 좀 지나친 것이 아닐까? 그야말로 밤에 끝기도까지 하고 잠밖에 잔 것뿐인데 아침에 일어나 새벽미사에 참여하자마자 또 반성하라니?

 

 

나눔

우리는 미사경본의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라는 부분을 신약성경에서 루카 복음 1835절에서 43절에 나오는 '예리고의 소경'의 외침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8,38) 또한 마태오 복음 15장의 '가나안 여자의 믿음'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셨습니다. 그런데 그 고장에서 어떤 가나안 부인이 나와,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마태 15,21-22) 인용된 이 두 성경구절에서 드러나는 자비를 청하는 기도는 일견 반성의 의미로서의 참회를 가리키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오히려 간절한 바람의 성격을 엿볼 수 있습니다.

 

루카 복음에서 나오는 예리고의 소경은 이미 예수님에 대해서 알고 있었고, 그가 지나가면 그에게 한 번 자신이 "볼 수 있게 해"(루카 18,41)달라고 청하겠다고 작정하고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 하고 알려 주자 그가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37-38) 그는 단순히 밑져야 본전이겠지 하는 마음에서 한 번 청하는 식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소경은 "앞서 가던 이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하고 외쳤다."(39) 그 소리가 얼마나 크고 간절했는지 "예수님께서는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데려오라고 분부하"(40)실 정도였습니다.

 

이 소경은 예수님을 만나 자기를 고쳐 달라고 말하기 전에 이미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고, 그가 자기를 고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우연히 지나가는 길에 만난 것이 아니라 그는 작정을 하고 그 자리에 와서 나자렛 예수님을 기다렸던 것처럼 보입니다. 이 간절하고도 확신에 찬 소경의 청원을 우리는 가나안 여자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자기 딸을 살려 달라고 계속 졸라대는 데도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마태 15,23)고 게다가 제자들이 다가와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23ㄴ절) 라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하고 대답하셨"(24)는 데도, 그 여자는 그치지 않고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25)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또 다시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26) 라고 거절하셨는데도, 그 여자는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27) 하며 청합니다. 이 여자는 자신을 강아지에 비유할 정도로 자신의 자존심을 내팽개치고 아예 본능적으로 매달립니다. 이 여인의 청원은 예수께서 자기 딸을 고쳐 주실 수 있는 주님이라는 믿음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두 번씩이나 거부하는 주님의 말씀 앞에서도 주저하지 않고 자신을 강아지에게 비유하기까지 할 정도로 간절하면서도 당당하게 청합니다. 그래서 전혀 비굴하기보다는 자식이 부모에게 청하는 것처럼 오히려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이렇게 주께 자비를 청하는 예리고의 소경이나 가나안 여자에게 주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8,42) ",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마태 15,28) 하고 칭찬하십니다. 주님은 그 둘에게 '내게 비는 너의 청은 참으로 내게 대한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라는 인정 아래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자비를 청하는 모습은 바로 우리 인간이 하느님께 향하는 근본자세입니다. 곧 하느님을 알고 믿기에 그분 앞에 주저함 없이 나아가는 것입니다. 마치 주님 앞에 대령이라도 하듯이. 그러므로 이러한 믿음이 그를 주님 앞에 달려가 서게 만듭니다.

 

그런데 왜 주님 앞에 서서, 주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청하는 우리의 모습을 참회로 규정지었을까? 우리는 여기서 예리고의 소경이나 가나안 여인이 주님을 뵈옵고 바로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루카 18,38)라든가 또는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렀습니다."(마태 15,22) 라고 말하지 않고, 먼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8,38.39; 마태 15,22)라고 청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소경과 여인의 표현을 주목해 봅시다. 이 표현은 주님께 잘 보이기 위해 겸손과 가련함을 내세우는 모습일까? 아니면, 당시에 랍비나 예언자들, 혹은 사제들이라는 선인들에게 하는 일상적이고도 습관적인 표현일까?

 

그러한 접근보다 우리는 이 두 사람의 입장을 루카 복음 51절부터 11절까지에 나오는 '첫번째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의 기사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부들이 밤새 그물을 쳤으나 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고 허탕을 치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 5,4)하신 대로했더니 "그렇게 하자 그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 그래서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고 하였다. 동료들이 와서 고기를 두 배에 가득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6-7) 되자 "시몬 베드로가 그것을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말하였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8) 이 장면을 루카는 "사실 베드로도, 그와 함께 있던 이들도 모두 자기들이 잡은 그 많은 고기를 보고 몹시 놀랐"(9)기 때문이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너무 많은 고기가 잡힌 사건 앞에, 즉 자신들이 할 수 없었던 일이 자기들 앞에서 이루어져 펼쳐진 기적 앞에 인간은 겁을 집어먹고, 또 두려움에 빠져 스스로가 죄인임을 인정합니다.

 

이렇게 주님 앞에 서고 주님을 만났을 때 초라한 자신과 주님 앞에 가소로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인간은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자비를 청하게 됩니다. 이 모습은 또한 루카 복음 18장에 나오는 '바리사이파 사람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은 성전에 들어왔지만 성전의 하느님 앞에 서지 못하고 자기의 업적 앞에 서서, 하느님께 기도를 바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업적을 선포합니다(루카 18,10-12절 참조). 그래서 주님은 이들을 가르쳐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루카 18,9)이라고 규정하십니다. 그래서 그는 하느님 앞에 서는 의로운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14)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13) 하고 기도합니다.

 

그럼 이제 우리의 문제가 정리되었습니다. 하느님 앞에 서는 사람, 하느님을 만나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부족함과 죄악을 보게 됨으로써 주 앞에 송구스러운 자세로 자신을 드러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만나는 기쁨은 바로 이 자비를 청하고, 또 그 청을 들어 주는 주님의 자비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회는 단순히 자기 잘못에 대한 반성이거나 그 반성을 끌어내기 위한 일종의 인위적인 예절로서의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참회는 인간이 주님 앞에 서고 주님을 만나게 될 때, 인간이 구조적으로 가지게 되는 감정이요, 본능입니다. 아울러 이러한 참회를 가져오게 하는 것은 바로 참회자의 믿음이요, 그 믿음은 바로 주님께 대한 확실한 선체험(先體驗)에서 비롯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이미 체험하지 못했다면, 주님을 체험한 사람들의 신앙고백을 전해들음으로써 주님을 믿고 기다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 미사 때에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주님의 전번 은총사건의 체험이거나 또는 주님께서 선조들이나 다른 이들에게 베풀어 주신 은총사건, 특별히 그리스도교 신자 일반으로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사건의 체험에서부터 미사는 시작합니다. 이렇게 참회는 주님을 맞이하는 과정의 첫걸음입니다.

 

 

성찰

주님 앞에 서고 싶습니까?

그러면 두려움 없이 다가서십시오. 그리고 주님을 청해보십시오.

"주님, 저에게 오십시오. 그리고 저를 받아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마음 속에 여러분의 부끄러운 모습들이 하나씩 드러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 모든 부끄러움을 주님 앞에 보여드리고 자비를 청하십시오.

주님의 자비를 받아 편안해 질 것입니다.

 

자 지금 해 보십시오.

순수한 믿음의 마음으로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다음 주 토요일 10시 미사부터 비대면 루카복음피정이 시작됩니다.

어딘지 모르게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있거나,

씻어지지 않는 아픔으로 괴로워하고 있거나,

누군가를 향해 들끓어 오르는 분노로 힘겨워하거나,

삶의 무게에 짓눌려 피곤하고 지쳐있는 분들은

오셔서 주님과 함께하시면서 주님의 평화와 위로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하신 주님 안에 머무시면서 새로운 힘을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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