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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 초상이 났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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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의 [lee-jeano] 쪽지 캡슐

2009-03-17 ㅣ No.1144

 
      줄 초상이 났더랍니다.
                                    이순의
 
추기경님 안녕하세요?
천국에는 잘 도착하셨으리라 믿습니다.
그곳에는 바로 앞서가신 거렁뱅이 저희 시작은 아버지도 당도하셨을 것이고, 또 더 몇 발치 앞서 가신 홍인수 신부님께서는 극진히 추기경님을 맞으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홍 신부님께서는 추기경님의 비서 신부님도 하셨다고 하시니 천국에서의 만남은 서로 더 극진하셨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추기경님
저는 사실 연속적으로 벌어진 줄 초상을 겪으면서 인간적인 고뇌에 빠져 있었습니다. 설을 목전에 두고 가슴으로 아프게 바라보았던 홍신부님께서 가시고, 설이 지나고 마음의 온유를 좀 찾아서 안식하려 하였더니 제가 냉대했던 거렁뱅이 시 작은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제 손으로 선산에 가서 모셔드리고 돌아왔는데 돌아와 쉴 겨를도 없이 추기경님께서 가셨고, 세 분의 하늘나라행은 너무도 달랐습니다.
 
홍신부님께서는 안타깝게도 많은 교우들의 비난과 원망을 받고 마지막 본당생활을 아프게 떠나시기 전, 다음 이동지로 가시지 않고 하늘의 부르심을 받으셨습니다. 그런데요 추기경님, 너무나 외람되고 무례한 생각인데요. 홍신부님께서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자와 천국에 가신 것이 아니실거란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느님 아버지께 당신 좀 데려가 달라고 졸라서, 조르고 졸라서, 하느님 아버지께서 가여운 홍신부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꾸 그런 생각이 듭니다. 
 
저는 물질이나 이타적 사고가 아닌 자발적 신심을 키워 신앙할 것을 권고하신 홍신부님의 강론 내용을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가 변천하고 의식이 자유로워진 세상에서 홍신부님께서 권고하신 신앙의 삶을 알아 살아내기란 교우들에게 무리가 있었던 것도 사실일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강론을 받아 적어 온 세월이 있어서인지 홍신부님께서 병원에 입원하셨다가 퇴원하셔서 겨우 미사주례를 하실 때면 더욱 돈독해지는 신앙심을 새겨 적을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홍신부님께서 교우들로부터 받고 있는 인간적 고뇌와 갈등들 조차도 고스란히  전달 받자와 그 저며져 오는 아픔들이 컸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홍신부님께서 하느님과 단판을 지시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주님, 저를 꼭 데려가 주십시오. 아버지, 사랑하는 아버지 곁에서 쉬고 싶습니다.>
그 모습이 느껴져서 그 안스러운 한 인간의 자리가 아닌 사제의 자리에서 삭혀담으며 준비하시는 천국행을 보았습니다. 살아있는 자 들은 늘 할 말이 많았지만 가고자 하시는 분은 오직 목적이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언제 가더라도 아버지 곁으로 가야할 길일진데 지금 가겠습니다 라고 하시는! 홍신부님께서는 그렇게 가신 것 같습니다. 
 
다음은 저의 시 작은 아버지입니다.
아주 젊은 시 작은 아버지이지요. 시할머님께서 늦게까지 아이를 낳으셨으니 젊은 시 작은 아버지 밑으로도 고모님이 두 분 더 계십니다. 제 짝궁보다 어리다 보니 조카더러 오빠야 오빠야 하며 자랐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짝궁에게는 형님 같은 작은 아버지시죠. 그런데 삶의 무늬가 아주 궂었더랍니다. 물론 저희도 그러했지만 모든 사람이 귀찮아하고, 모든 사람이 거절하고, 그런 거렁뱅이가 마지막에는 하느님의 온전한 부르심을 받자와 응답하셨으니, 사람들이 지붕을 뚫고 중풍 병자를 주님께 내려 보낸 것(루가5;19)처럼 삶의 마지막은 아버지의 성전에서 교우들의 손길 안에서 영혼이 치유되고 천국에 드는 은총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죽은 후의 마지막 역할은 저희 부부에게 주어졌습니다.
 
이승의 모습을 돌이켜 보아 저희 마음으로 나서서 시작은 아버지의 마지막을 거둘 의향이 없었습니다. 장조카라는 막연한 책임감은 있었을지라도 어느만큼 살은 연휴에는 귀찮았더랍니다. 지겨웠더랍니다. 내 목숨 내 생활 내 인생도 각복한 처지이고 보니 저들이 나의 가장 가까운 이웃이다라고 살아냈던 결심은 무너지고 지겨웠더랍니다. 내가 내 이웃을 위해 살아진 세월들의 무모한 인내심은 시험당하였고, 스스로 인간성의 좌절로 떨어져 내 목숨 지키고, 내 생활 잘라내지 않고, 내 인생이라도 타인에게 짐이 되지 말자고, 아니 짐만 되지 않아도 잘 살은거다고 인정하게 되었을 때 부터 최소한의 나를 지키기에 급급했었지요. 
 
그러나 아버지의 뜻은 결국 거렁뱅이 작은 아버지를 저희 몫으로 안겨주셨습니다. 그래서 천하디 천한 목숨이 죽어서 귀해지는 의미를 알아 살아야 한다고 강한 메세지를 주셨습니다. 그래도 주님! 자신이 없습니다. 술 취한 거렁뱅이 시 작은 아버지를 큰 길까지 끌어다가 패대기를 치다시피 해 놓고, 죽은 연후에 장례를 치르고, 미사도 드리고, 이런 제 꼴을 하느님께서 어찌 보실지를 생각하면 지켜 온 신앙에 대하여 스스로에게 배신감마저 들어버립니다. 그러다가도 어떤 큰 죄보다도 자기에게 처한 상황에서 구원을 약속하신 아버지의 현존을 부정하거나 떠나버리는 죄는 가장 큰 상등 죄라는 사실을 상기하며 그 끈을 찾아 간신히 잡아 봅니다. 
<주정꾼 거렁뱅이도 구원하시는 아버지께서는 사랑이십니다. 아멘> 
 
추기경님,
그리고 이어서 추기경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쉽게 표현하지 못했습니다.
연속적으로 세 번째 치르는 장례라서 심신이 많이 지치기도 하였지만 사실은 사람의 이목도 두려웠습니다. 저이는 거렁뱅이 시 작은 아버지는 모른체 했다면서 추기경님 돌아가신 것은 안타가워한다고  할까봐서 집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습니다. 겨우 간 곳이 본당의 성체조배실이었고, 본당의 주임신부님께서 주례하신다는 미사에 참례하러 딱 한 번 명동에 갔을 뿐입니다. 추기경님 죄송합니다.
 
친구의 말로는 불교신자인데도 추기경님께서 돌아가셨다고 하시니 명동성당에 가서 줄을 섰다는데 저는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그런데요. 추기경님, 
본당교우들과 함께 지하성당에 겨우 끼어 들어가 미사 참례를 하고 나오는데요. 잔뜩이나 위축되어있는 제 마음이 슬픔이 아니라 축제였습니다. 슬픔이 아니라 기쁨으로 다가오는 추기경님의 장례였습니다. 거 뭐라고 할까! 야릇한 행복감이요. 제 자신을 옥죄어오던 쇠사슬 같은 것이 풀어지는 느낌이요. 포기하라. 포기하라. 포기하라. 그런 느낌이요.
 
얼마나 많은 짐을 지고만 살았는지요. 그렇게 무거운 짐을 지신 추기경님께서도 세상 것 다 두고 가시는데 나같은 게 세상 짐을 다 지려하는가?! 다 내려놓고 열리는 대로 살자. 
그러고 나니 보이지 않은 것들이 보이더군요. 왜 어머니께서 내가 그렇게 알려드린 말들은 듣지도 믿지도 않으시고 가셨는지도 보이고, 그렇게 어려운 삶 속에서도 진짜로 동서들에게 잘 해 주었는데 왜 그들이 나에게 공격을 했는지도 보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마음 한 편에 자리잡고 있는 어머니의 자리를 놓기로 했습니다. 하늘이 쥐고 있는 인간의 군상들을 내가 짊어진다고 한들 되지 않을 일은 되지 않을 것이고, 어머니도 동서도 선택한 부분에 대하여 살아내야 할 것이라는!
 
<욕심이었다. 
나는 내가 어머니께 드렸던 생활비를 어디다 쓰시느냐고 여쭌 적도 단 한 번도 없다. 글을 몰라서 저축을 안하신다는 어머니께 결혼 시킬 동생들이 줄줄이 있으니 가락지라도 해 줘야할 부모의 도리로 저축을 하시라고 알렸다. 큰아들을 장가들이면서 가락지 하나 해 줄 돈도 없이 살은 복습을 하시게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시동생들을 장가들일 때 진짜로 가락지는 해 주실수가 있게 되었다. 동서들에게 가락지를 해 주시는 것 이외의 혼인 비용을 어머니께 부담시킨 적도 없다. 그렇다고 내가 못 받았다고 시샘을 해 본 적도 없다. 나는 금가락지 커녕은 구리반지도 못 받았어도 동서들에게 반지를 해 줄 수 있는 어머니가 든든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요즘 세상의 푼돈에 눈 멀은 며느리로 보실까 봐서 내 손으로 통장을 만들어 드리지도 않았다. 제가 달라고 안할테니까 은행에 가면 권총 찬 사람에게 부탁해서 통장도 만들고 저축도 하시라고 가르처 드렸다. 그리고 그 후로 22년 간 단 한 번도 어머니께 얼마를 버시냐고 여쭌 적도 없고, 얼마가 있느냐고 궁금해 한 적도 없다. 다만 어머니께서 막내랑 살고 계시는 방세가 어머니 혼자 마련한 돈이 아니고 큰아네 돈도 들어 있으니 그 방세만큼은 손대지 마라고 동서에게도 어머니께도 누차에 말해 두었었다. 
 
사실 나의 생활은 늘 빈곤한데 어머니께서 덜컥 병이라도 나시면 모실 방도 없지만 모실 병원비도 없으니 푼푼히 모아서 늘려간 단칸의 방세 만큼은 어머니 노후대책이고, 혹시 어머니 돌아가시고 남으면 그 돈으로 선산에 가족 납골묘를 지어 후손들이라도 더 이상 공동묘지로 떠돌지 않게 할 것이라고 천만 번을 알리고 알렸었다. 그런데 누군가는! 어머니의 그 단칸의 방세가 어떻게 모아졌는지 나만큼 사무치지 않은 누군가는 그 마지막 어머니의 노후대책을 노린 것이 되었고, 그걸 노렸으니 어머니를 꼬드겨야 했을 것이고...... 그러니 한이 맺혀서 발악을 하는 나를 어머니의 돈을 훔친 도둑년을 만들고....... 그게 억울하다고 나는 악다구니를 썼으니........ 
 
결국 어머니는 내가 드린 생활비도 지니고 계시지 않았고, 어머니께서 권총찬 사람에게 말해서 저축을 한 통장! 그렇게 긴 세월동안 백화점 화장실에서 남의 가래침을 닦아서 모았을 흔적은 말소까지 되어서 통장세탁이 끝났고, 마지막 어머니의 방세까지 노린 욕심 때문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억울함에 분노를 삭히지 못하고 앙금으로 안고 사는 시한폭탄의 내 가슴에 누군가의 욕심 때문이었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그 욕심이 보이더니 욕심 없는 내 억울함이 평온해지기 시작했다.
 
이런지경에 이르게 한 사람이 나는 아니다. 글도 모르고 무지하신 어머니가 하신 것도 아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자식 중에 어머니의 며느리 중에 모두가 공범자다. 내가 어머니께 단 돈 1원도 요청한 사실이 없다는 것을 어머니께서 아시는데 어머니는 그것을 밝혀주시지 않았다. 왜 나에게 그러셔야했는지 그 이유를 몰랐었는데 추기경님께서 돌아가시고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
 
추기경님,
어머니께는 들을 귀가 없었고, 맏며느리가 살아온 세월을 보실 눈이 없었으며, 무엇보다 큰아들 내외를 믿지 않은 이유입니다. 물론 어머니의 귀를 막고, 어머니의 눈을 가렸으며, 태초에 하와를 유혹한 뱀처럼 믿음을 깨 버린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어려워도 동생들을 어렵게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왜 그래야했는지 배신감에 싸여 분노와 노여움에 상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알았습니다. 욕심! 어머니의 피땀을 야금야금 갉아 먹어 본 심성들이 낳은 욕심! 자기들이 뱀이 되어 어머니 곁에 머물렀으니 저도 같은 뱀일 것이라고 몰아붙였을 것입니다. 어머니께서 벌으신 돈이야 어머니께서 지키시지 않으시고, 탕자의 아버지께서 작은 아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신 것처럼 어머니의 자식들에게 쓴 것을 누구도 탓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를 배려하지 않고 우리부부를 갈취한 철면피로 몰은 악행은...... 참으로 추악한 현실입니다. 돌아 온 탕자 아들처럼 언젠가는 양심이 돌아와야 할 날이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추기경님
저는 어머니의 방세를 순순히 내어놓지 않았습니다. 짝궁은 어머니께서 저렇게까지 하시고 동생한테 가실란다고 하시니 그냥 드리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 방세에 포함된 제 돈의 부분을 잘라냈고, 남은 얼마되지 않은 돈은 문서로 써서 막내가 결혼할 때 반지 값으로 주겠다고 했습니다. 이게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고통하는 것! 이것이 제가 사는 모습입니다. 맏자식이라는 위치에서 받은 수모와 억울함은 견딜만 한 갈등입니다. 어머니께서 그런식으로 가신 후의 고뇌는 어떠한 천사의 말도 울리는 징처럼 들리고요. 아무리 성스런 기도도 떠도는 메아리처럼 여겨지고요. 자선과 봉사는 위선처럼 느껴져서 선듯 나서지 못하고 망설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요.
이제는 그러지 않을랍니다.
어머니의 눈과 귀를 막은 자는 자기의 눈과 귀만 막힌 게 아니었습니다. 마음도 막힌 것이지요. 진짜로 잘해 주었으니 그 덕을 감사하지는 못할 망정 가만히만 있었어도 이런 상황을 초래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이런 상황 또한 저는 저 대로 감당해야한다면 그들도 그렇게 감당해야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거렁뱅이 주정꾼 작은아버지도 저렇게 인간답게 죽을 수 있는데, 어머니께서는 그것이 어머니의 길이었던 것이지요. 이제는 그렇게 생각할랍니다. 원하셨으니 그것이 오늘을 살아야할 서로의 몫이고 보속이지 싶기도 합니다. 마침 저는 산으로 가서 일을 해야하기도 하니 다행이다 싶으기도 하고요.  
 
 
추기경님
줄 초상으로 세 분을 보내드리고 났더니 참 인간사 생각이 많았습니다.
 
고통만 고통만 하시다가 가신 홍신부님의 강론은 아직도 하느님 안에서 충만하게 울려 퍼지구요. 거렁뱅이 시 작은 아버지는 추접한 모습 보다는 수진동 성당의 천사의 집에서 봉사를 했다는 모습이 자꾸만 연상이 되구요. 추기경님의 하느님 나라 입성은 만백성들의 행렬이 사다리가 되어 축하를 했습니다. 
저에게는 진짜로 야속하고 섭섭하고 모질은 시어머니지만 그래도 어머니라서 그 커다란 굴레를 쥐고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 굴레를 이제 놓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게 주어진 삶을 살으렵니다. 그러다 보면 홍신부님 처럼, 시 작은 아버지 처럼, 추기경님 처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 질 날이 오실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은 누구에게도, 특히 선한 사람에게 족쇠가 되시기를 원하시지 않으실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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