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지오마리에-old

19장 3."우리와 함께 계시는 곳'인 회합!

인쇄

허윤석 [drhur] 쪽지 캡슐

2004-10-07 ㅣ No.66

 

2004년 5월호


교본 해설 41


제19장 회합과 단원


쁘레시디움은 성모님이 ꡐ우리와 함께 계시는 곳ꡑ


우리는 성모송으로 ꡐ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ꡑ라고 기도한다.

이 기도의 문장에서 ꡐ함께 계시니ꡑ라는 뜻은 단순히 예수님과 30여 년간을 가족으로서 함께 생활한 점만을 지적하는 협소한 의미가 아니다. 그러면 ꡐ주님과 함께함ꡑ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나는 교회의 정의에서부터 그 답을 찾는 여정을 시작하고 싶다. 교회는 바로 그리스도와 함께하려 모인 초대받은 이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의 성사라고 한다.

성사란 보이지 않는 하느님 구원은총이 지금 이 자리에서 재현되고 우리 가운데 현존하는, 보이는 표징이다. 이 표징은 오감과 은총으로 조명된 이성을 통해 육적 영적 감각을 통해 그분의 사랑으로 전달된다. 또한 우리는 이러한 성사를 통해 우리의 기도와 봉사와 말씀선포는 교회의 살아있는 활동으로,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의 봉헌물로 전달된다.

즉 그리스도의 성사는 바로 하느님과 우리가 서로 만나는 길이며 진리며 생명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 사랑의 표징인 원성사(元聖事) 내지는 근본성사(根本聖事)라고 하고, 교회는 이러한 원성사인 그리스도를 전달하는 구원의 성사라고 말한다. 즉 십자가상의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의 업적과 사랑은 지금도 사도로부터 이어온 교회라는 통로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되고, 우리의 예배가 이를 통해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다.

이러한 성사는 교회의 구성원들인 우리에게 크게 7가지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칠성사이다. 칠성사는 인간사의 가장 중요한    7가지 사건과 성장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것은 성사를 받는 우리가 바로 인간이며 성사를 제정하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 역시 겸손하신 모습으로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사는 인간의 오감(五感)으로 전달되는 구체적인 인간사와 연관되어 나타난다. 이것을 바로 육화(肉化)의 신비라 부른다.

왜 하느님이 육화되고 낮아지고 인간으로서 겸손하고 가난하고 죄인과 같이 취급되었던가? 그것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를 당신의 혼인잔치에서의 신부(新婦)로 표현하신다. 우리를 매우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사랑의 관계에서, 사랑하는 두 사람의 욕구는 무엇일까? 그것은 무엇보다 함께하고픈 마음일 것이다.

이혼에는 두 가지 큰 이유가 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ꡐ사랑만으로는 못 산다ꡑ와 ꡐ사랑없이는 못 산다ꡑ

이것은 그리스도의 진실된 사랑을 이해한다면 거짓된 모순이며 십자가를 뺀 이기주의적인 감상임을 알게 될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공존(共存)이며 상생(相生)이다. 즉 희로애락을 함께하며 함께 머뭄 그 자체가 사랑의 욕구이며 전부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뽑으신 가장 큰 목적은 당신 곁에 머물게 하심임을 복음에서 분명히 하고 있다. 또한 어떤 십자가의 고통의 순간이라도 함께하며 부활을 위해 함께 기도하며 십자가를 지는 삶이 바로 서로를 살리는 길이다.

ꡒ사랑하다 힘들면 더 사랑하여라!ꡓ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수난을 통해 보여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과 성모님의 교훈이다.

앞의 여러 장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ꡐ죄ꡑ 말고는 우리와 똑같은 조건으로 세상에서 살아가셨던 것처럼, 성모님 역시 우리가 하느님께 갖는 신앙의 어둠을 늘 간직하고 계셨다. 따라서 예수님과 성모님을, 원래 저분들은 성인이시니 그만큼 은총과 의욕과 힘을 충분히 하느님이 주셨을 테니 출신 성분부터 나와는 전혀 다른 신화적 인물로만 받아들이면 우리의 신앙은 수박 겉핥기에 머물 뿐이다. 우리는 예수님과 성모님을 영화 속의 연기자로 인식해서는 절대로 안된다.

인간의 이성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 구원섭리 안에서 당신 아들의 삶을 바라보고 함께하시면서 성모님은 늘 곰곰이 고민하고 분심하며 염려하시고, 더불어 예수님의 어머니로서 희로애락을 함께하셨다. 아니 그 두 분의 삶은 둘이 아닌 하나가 되신 공존(共存)과 상생(相生)의 삶이었다.

얼마전 그리스도의 수난(the passion of christ)이라는 천주교인 감독이 만든 영화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눈물을 그칠 수 없었다.

이 영화는 지금껏 나의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관념적이며 낡은 관습적이고 무감각적인 생각을 벗겨버리고, 진정 그분의 수난이 그 어떤 이유와 목적을 떠나서 너무나 처참하고 자기 희생과 사랑없이는 불가능한 처절함 자체인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했다.

너무나 많이 듣고 배워서 이제는 무감각하게 들리는 말 ꡒ나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처절히 돌아가신 그분의 수난ꡓ, 이젠 너무 무감각하게 되어 ꡒ도대체 내가 무슨 죄를 그렇게 많이 지었길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지? 내 죄가 그렇게 큰가?ꡓ 하며 십자가의 사건이 교회의 단순한 암기사항 정도로 내 무의식 안에는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 영화를 통해 예수님의 인류 구원의 목적보다는 그 구원의 의지를 실현하기 위한 수난어린 사랑을 보게 되었다. 먼저 내 죄를 생각하고 머릿속으로 그분의 수난을 상상한다면 ꡒ내가 얼마나 큰 죄를 지었나?ꡓ라는 자연스러운 의문형 문장이 나온다.

하지만 정말 현실감 있는 모든 영상 매체를 동원하여 2000년 전의 그 처절한 고통의 현장을 경험한 이들은, 그들이 인간이라면 모두 그분의 수난과 고통에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내 가슴이 내 손과 발이,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 영혼의 심장이 너무나 슬프고 애처로워 견딜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그 순간 내 자신이 2000년 전 바로 그날의 군중, 그날의 로마병사, 베드로가 되어 그곳에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의 추억은 시간이 흘러가면 잊혀지는 과거가 아니라 사랑하는 온 존재 안에 지금 현존하는, 살아있는 현재이기 때문에 머리가 아닌 가슴에서부터 우리의 신앙이 시작되어야 함을 느꼈다.

나는 이 영화에서 성모님의 강하고도 애절한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다. 자식이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무릎 꿇고 흙을 한 움큼 움켜쥐시며 눈물을 글썽이시는 어머니! 예수님이 어린아이였을 때 하느님이시지만 아장아장 걷다가 넘어져 정강이가 까져 피흘리는 것을 보고 달려가 안으시며 ꡒ괜찮다, 아가야. 괜찮다, 아들아!ꡓ 우는 어린 예수를 달래시며 안타까워하시던 그 어머니! 어린 예수님을 온몸으로 기르셨던 그분이 이젠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예수님을 달려가 안으시며 말씀하신다.

ꡒ괜찮니? 아가야. 내 아들아!ꡓ


그 애절한 두 분 모자(母子) 관계를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ꡐ우리의 어머니ꡑ로 선물로 주신다. 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사도들에게 주신 당신의 어머니!

또한 예수님은 성체성사를 세우시며 당신의 십자가상의 고통을 통해 이룩하신 구원의 업적을 교회를 통해 재현하게 하셨다. 성체와 성혈이 바로 예수님의 몸과 피인 것이다.

이런 원리를 머리로는 교리 때, 강론 때 누누이 듣지만 우리의 가슴과 무의식은 이를 깨닫지 못한 적이 많다. 이처럼 ꡐ주님과 함께 계신다ꡑ는 말은 세속적 이기적인 자신의 머리가 아닌 겸손한 나의 가슴으로 뜨거운 하느님의 사랑을 온 존재로 받아들이며 흘리는 눈물이며 감동인 것처럼 레지오 마리애 안에서 쁘레시디움의 회합은 바로 ꡐ성모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곳ꡑ이다.

우리는 이 회합을 통해 이 세상의 십자가에 눌려 쓰러질 때 성모님의 포옹을 받으며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는 행복감을 느낀다. 또한 가난하고 외로운 이들에게 뜨거운 마음으로 사랑하는 예수님의 현존을 전달하는 성사적 존재가 되는 것이다.

나는 사제로서 참으로 부끄럽지만 새삼스럽게 ꡐ미사의 순간순간이 얼마나 소중한 예수님의 수난과 사랑이 어우러진 열매인가?ꡑ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레지오 마리애 단원 여러분, 보십시오. 성모님의 사랑을 느끼십시오, 어머님의 다정함을. 그리고 무릎 꿇으십시오. 어머니의 고통에 분연히 일어나십시오. 어머니의 손길을 느끼며 기뻐하십시오. 그분께서는 이제와 우리 죽을 때에 우리를 위해 빌어주실 우리의 어머니이십니다.

단원 여러분은 회합 때 무엇을 보시려 무엇을 느끼시려 참석하십니까? 가슴이 떨리지 않습니까? 성모님에서 여러분 한분 한분을 늘 염려하시고 기다리시고 기도하시고 은총을 베푸신다는 것이!

만약 게으름을 피우고 싶거나 회합에 빠지려는 유혹이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장님이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느끼지 못하는 이는 장님입니다. 여러분, 핑계를 대지 말고 우리의 가슴이 영적으로 식어있음을 인식합시다. 다시 한번 묻습니다. 회합에 성모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곳임을 여러분은 믿습니까? 또한 그것을 느끼십니까? 여러분이 바로 성모님과 예수님의 사랑받이입니다.



763 0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