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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요한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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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03-02-12 ㅣ No.92

 

 

신약 요한의 편지 해제

 

 

-엘마로, 장,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 신약성서13 요한 1 2 3서, 분도출판사, 1992

 

 

 

1. 애제자

요한 복음서에 보면 예수께서 각별히 사랑하신 제자가 있었으니 줄여서 애제자라 한다. 그의 이름도 전해 오지 않고 열두 제자단에 속하지도 않았건만, 다른 어느 제자보다도 예수의 사랑을 듬뿍 받았대서 애제자라는 별명을 받았다. 요한 복음서에서는 애제자에 관해 여섯 차례 언급하는데, 번번이 수제자 베드로와 비교하면서 베드로보다 탁월한 제자였다고 한다. 이제 여섯 단락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애제자                                 베드로

 

① 13,23-26  최후 만찬 때 애제자는              베드로는 애제자에게 눈짓하여, 누가

             예수의 품안에 자리잡았다.          배반자인지 예수께 여쭈어 보라고 부탁했다.

 

② 18,15-16  애제자는 예수를 따라               애제자가 나와서 문지기 여자에게 말하고서,

             대제관의 궁전으로 들어갔다.        베드로를 궁전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③ 19,26-27  제자들 중 애제자 홀로 십자가       베드로는 대제관의 궁전에서 예수를 세 번

             아래서, 예수의 임종을 지켜보았다.   배반하고 나서(18,17.25-27) 달아났다(16,32).

 

④ 20,2-10   부활 일요일 새벽 애제자는          베드로를 포함하여 다른 제자들은 "아직도

             베드로보다 먼저 예수의 무덤에      그분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만

             다다랐다. 무덤이 빈 것을 확인하고   한다는 성경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다"(20,9).

             이 애제자만은 예수 부활을 믿었다.

 

⑤ 21,7      예수께선 부활하신 다음 갈릴래아

             호숫가에 나타나셨는데 애제자가 먼저

             알아보고 베드로에게 주님이시라고

             알려 주었다.

 

⑥ 21,20-23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그의 순교를

                                                  예언하셨다(21,18-19). 그러자 베드로는

                                                  시기라도 하듯이 애제자의 운명에 관해서

                                                  예수께 여쭈었다가, 남의 팔자에 상관하지

                                                  말라는 주의를 들었다(21,20-23).

 

위의 단락들을 보면 애제자는 최후 만찬 때부터(13,23-26) 요한 복음서에서 나온다. 그런 까닭에 그는 처음부터 예수를 따랐던 게 아니고, 예수 생애 말기에 즈음하여 예루살렘에서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고 추론하는 학설이 있다. 그렇지만 요한계 문헌에서 애제자를 예수 사건 전체의 목격자로 간주한 사실을 눈여겨본다면(15,27), 애제자는 예수의 공생애, 죽음, 부활 전부를 목격한 증인인 것 같다. 사실 요한계 문헌의 필자들은 한결같이, 자기네 문헌은 예수 사건을 목격한 애제자의 전언을 기록한 것이므로 신빙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를 뒷받침하는 대표적 문단은 다음 네 가지이다.

  1) 요한 19,35; "본 사람이 증언한 것이니 그의 증언은 참되다. 또한 그는 여러분도 믿게 하려고, 자신이 진실을 말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앞 문맥에서 예수의 임종을 서술하고 나서, 그것은 목격자인 애제자의 증언인 만큼 신빙성이 있다고 필자는 말한다. 어디 임종 서술만 신빙성이 있을 쏘냐, 요한 1-20장을 쓴 요한 복음 필자는 1-20장 전부가 목격자 애제자의 증언이므로 믿을 만하다고 보았음에 틀림없다(20,30-31 참조).

  2) 요한 21,24: "이 사람이 이 일들에 관해서 증언하고 또한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이다.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요한 21장을 덧붙인 요한 복음 가필자는, 요한 복음서야말로 목격자인 애제자의 증언을 기록한 것이니 만큼 신빙성이 있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이런 표현에 현혹되어 애제자가 요한 복음서를 직접 집필했다고 보는 설이 생겨났다(꿀만). 역사비평학계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하는 학설이다.

  3) 1요한 1,1-3: "생명의 말씀에 관해 (알려 드립니다). 그 말씀은 처음부터 계셨으며, 우리가 듣고 우리 눈으로 보고 살펴보고 또 우리 손으로 만졌던 것입니다. 관연 생명이 나타나셨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보았으니 증언하며 여러분에게 알려 드립니다. 그(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계셨으며 이제 우리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우리가 보고들은 그 생명의 말씀을 여러분에게도 알려 드립니다. 그것은 여러분도 우리와 친교를 맺게 하려는 것이니, 우리와의 친교는 곧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교입니다."

  4) 1요한 4,14: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들을 세상의 구원자로 보내셨음을 보았고 또 증언합니다." 요한 1서 역시 목격담이기 때문에 신빙성이 있는 문헌이라고 1서 필자는 자화자찬한다. 마치 목격자인 애제자가 직접 요한 1서를 기록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실은 그렇지 않고 애제자를 무척 존경한 후학들이 요한 복음서와 서간집을 집필했다는 게 역사비평학계의 통설이다(슈나켄부르크, 브라운). 애제자는 예수 사건을 목격하고 전해 준 전승자였지 글을 쓴 집필자가 아니었다고 보는 게 순리이다. 애제자는 실존 인물이 아니고, 요한계 교회에서 자기네 전승의 신빙성을 주장하려고 만들어 낸 상징적 인물에 불과하다는 설도 있다. 그렇더라도 요한계 교회에 예수 전승을 물려 준 전승자가 있었음에는 틀림없다.

 

2. 요한 복음서 필자

1) 예수의 신성과 인성 합일 신앙

신약성서치고 기독론 중심 아닌 문헌이 어디 있을까마는, 요한계 문헌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와 역할에 지극한 관심을 기울이면서 그분을 지존으로 받든다. 예수는 영원무궁한 선재 자로서(1,1.30; 8,58; 17,5), 천지 창조에 중보자 역할을 하셨다(1,3). 이 초월적 선재자가 하늘로부터 내려와(3,13.31) 사람이 되신 다음에(1,14)하느님 아버지를 알려 주셨다(1,18). 그럼 영원무궁하고 초월적인 선재 자는 도대체 누구냐? 하느님과 동등한 분이다(5,18; 10,30-33; 14,9; 19,7). 아니, 툭 터놓고 말해서 그분은 하느님이시다(1,1.18; 20,28; 참조: 1요한 5,20). 이는 전대미문의 폭탄선언이다. 사도 바울로가 채록한 겸허가에도(필립 2,6-11), 그리고 바울로 종파에서 채록한 그리스도 찬가에도(골로 1,15-20) 예수 선재 사상이 들어 있기는 하다. 그러나 바울로나 그 종파에선 선재한 예수를 일컬어 하느님의 아들(갈라 4,4; 로마 8,3-4), 하느님의 모습(필립 2,6), 하느님의 모상(골로 1,15)이라고는 할지언정 절대로 하느님이라고까지는 하지 않는다. 예수를 하느님과 동등한 분으로, 아니 하느님으로까지 신봉한 것은 요한계 교회의 독보적인 그리스도신앙이다. 이른바 하강과 상승 기독론이다. 이 유별난 신앙이 니카이아 공의회(325년), 칼케돈 공의회(451년)에서 삼위일체 신론, 일위이성(一位二性)기독론으로 확정되기에 이른다.

 

2) 유대교와의 결별

유일신 신앙에 집착하는 유대교에서는 저런 그리스도 신앙을 용납 할 리 만무했다. 사실 유대인들은 그것을 신성모독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었다(5,18; 8,58-59; 10,30-33; 19,7). 따라서 유대인들은 요한계 그리스도인들을 회당에서 추방하였다(9,22; 12,42; 16,2).

  요한계 교회에서도 유대인들을 곱게 대할 리 없었다. 우선 모세의 지위를 격하했다(1,17; 3,13.31; 5,20; 6,46; 7,16). 유대인들은 악마의 자식들로서 하느님으로부터 비롯하지 않는다(8,44.47). 유대인들은 예수가 하느님이심을 믿지 않은 까닭에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8,24; 9,41). 유대 민족의 일원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고(3,3-7), 오직 저 엄청난 그리스도 신앙을 지니 사람만이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1,12-13).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갈 필요가 없다(4,21-24). 예수의 몸이 참 성전인 까닭이다(2,19-21).

  역사의 흐름을 눈여겨보면 유대교와 기독교의 관계는 50∼60년경 어록이 집필되기 이전부터 나빴고, 66∼70년 제1차 독립전쟁 동안과 그후 바리사이들이 얌니야에서 유대교를 재건할 때 악화되었으며, 85년경 18조 기도문을 개작하여 제12조항에 이단자들에 대한 저주 (birkat haminim)를 삽입함으로써 양자의 관계는 파국을 맞았다. 왜냐하면 이단자들 가운데 나자렛 사람들(=유대계 그리스도인들)도 포함시켰으며, 이들을 저주하는 18조 기도문을 회당 예배 때마다 바치도록 했으니,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늦어도 85년경부터는 회당 예배에 참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요한 복음서는 유대교와 요한계 교회의 결별 상황을 반영한다(정양모ㆍ이영헌, 「이스라엘 성지」, 생활성서 1988, 99-101쪽).

  애제자의 제자들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이 스승의 가르침과 표징 출전등을 이용하여, 90년경에 하강과 상승 기독론 중심의 복음서를 엮었다(요한 1-20장). 그가 마르코 또는 루가 복음서를 참고했는지는 미지수다. 그리고 애제자의 제자 또 한 사람이 윤색ㆍ가필했는데 그 범위에 대해선 설이 구구하다. 다만, 그가 21장을 덧붙인 것만은 분명하다. 이 제자를 편의상 요한 복음서 가필자라고 부른다.

 

3. 요한 서간집 필자

요한 복음서 필자는 유대인들과 논전을 벌이는데 비해서, 요한 서간집에서는 거짓 그리스도인들과 싸운다. 요한 1-3서를 유의해 보면 요한계 교회 안에서 이단자들이 생겨 교회를 떠났으며(1요한 2,18-19), 그들은 성실한 교우들을 유혹하고 있었다(1요한 2,19; 2요한 10절). 서간집 필자는 이단자들을 일컬어 반 그리스도들(1요한 2,18.22; 4,3; 2요한 7절), 거짓말쟁이들(1요한 2,22), 거짓 예언자들(1요한 4,1), 속이는 자들(2요한 7절)이라고 한다. 이들은 세상으로부터 태어났으며, 속이는 영의 인도를 받는다고 한다(1요한 4,5-6). 그럼 이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이단 사상을 지녔던가? 요한 1-3서가 집필된 100년경에는 저승과 이승, 신과 인간, 정신과 물질을 상반되는 것으로 보는 영지주의 사조가 근동에 유포되기 시작하였다. 요한 서간집에 나오는 이단자들은 초기 영지주의의 이분법적 사조에 물들어 그리스도론과 윤리와 종말론에 오류를 범한 것 같다. 이제부터 세 가지 오류를 하나씩 점검해 보자.

 

1) 세 가지 이단 사상

  (1) 그리스도론적 오류: 이단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성을 지닌 예수와 신성을 지닌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로 양분한 것 같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신성을 지닌 그리스도는 강생하지도 않았고(1요한 4,2-3; 2요한 7), 죽임을 당한 적도 없다고 본 것 같다(1요한 5,6). 요한 서간집에 나오는 초기 영지주의의 그리스도론적 오류는 이레네우스 교부가 단죄한 영지주의자 체린투스에 의해서 100∼120년경에 체계화될 것이다(이레네우스,「반이단론」, 1권 26장 1절). 체린투스는 예수와 그리스도는 상이하다는 기독론을 내세웠다. 역사적 예수는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지 않았고 여느 사람들처럼 보통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세례 때 초월적 그리스도가 예수에게 내려와 머물다가 수난 전에 떠나갔다. 역사적 예수 홀로 수난하고 부활했다고 했다. 그러니 체린투스의 기독론은 분리 기독론이라 하겠다. 그런가 하면 이냐시우스 교부가 단죄한 가현설 영지주의 자는 이와는 사뭇 다르다. 안티오키아의 주교 이냐시우스는 트라야누스 황제 치세 중(98∼117년 재위) 110년경 안티오키아에서 체포되어 아시아의 스미르나, 마케도니아의 필립비를 거쳐 로마로 압송되어 순교하였다. 그는 압송되면서 서간 일곱 편을 발송했는데, 그 중 아시아의 스미르나 교우들에게 보낸 서간 1-6장과 아시아의 트랄리아 교우들에게 보낸 서간 9-10장에서, 예수 가현설을 주창한 영지주의자들을 조심하라고 훈계했다. 이 영지주의자들로 말하면, 예수는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요한 세례자에게서 세례를 받지도 않았으며,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예수는 그러는 척 환각작용을 불러일으컸을 뿐이라는 것이다(스미르나 4,2). 그리스도론적 오류를 드러내는, 서간집의 중요 단락들은 다음과 같다. 종합해 보건대, 체린투스식으로 분리 기독론을 주창한 영지주의였던 것 같다.

о 1요한 2,22: "거짓말쟁이는 누구입니까? 예수께서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부인하는 자가 아니겠습     니까?"

  о 1요한 4,2-3: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셨다고 고백하는 모든 영은 하느님에게서 난 것입     니다. 그리고 예수를 그렇게 고백하지 않는 모든 영은 하느님에게서 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반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그가 오리라는 것을 여러분은 들었습니다. 지금 그가 이미 세상에 와 있습     니다."

  о 1요한 4,15: "누구든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면 하느님께서 그 사람 안에 머물러 계     시고…"

  о 1요한 5,1: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모든 이는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о 1요한 5,5: "세상을 이기는 이는 누구입니까?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이가 아니겠습     니까?"

  о 1요한 5,6: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물과 피를 거쳐오신 분이십니다. 물만 거쳐오신 것이 아니라,     물과 피를 거쳐오셨습니다." 여기서 "물"은 예수의 세례를, "피"는 예수의 죽음을 가리키겠다. 요     한1서 필자가 예수의 죽음으로 이룩된 대 속죄 효과를 강조한 점에 유의하자(1,7; 2,2; 3,5.16;         4,10).

  о 2요한 7절: "사실 속이는 자들이 많이 세상에 나왔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     신 것을 고백하지 않습니다. 이런 자는 속이는 자이며 반 그리스도입니다."

 

  (2) 윤리적 오류 : 요한 서간집의 이단자들은 하느님의 신비를 깨쳤으며 따라서 죄 많은 세속을 초탈한 것처럼 처신했다. 요한 1서의 다음 구절들에 그들의 사상이 잘 드러난다.

  о 1,6: "우리는 하느님과 친교를 나눈다."

  о 1,8: "우리는 죄가 없다."

  о 1,10: "우리는 죄를 짓지 않았다."

  о 2,4: "나는 그분(하느님)을 알고 있다."

  о 2,6: "그분(하느님) 안에 머물러 있다."

  о 2,9: "빛 속에 있다."

  о 3,6: "그분을 보았다"(참조: 3요한 11절).

  о 4,20: "하느님을 사랑한다."

  요한 서간집 필자는 초탈한 도사처럼 행세하는 이단자들을 상대로 윤리를 강조한다. 필자는 그리     스도처럼 처신하라고 충고한다.

  그리스도 모방 훈계는 요한 1서의 다음 문단에 잘 드러난다.

  о 2,6: "그분(하느님)안에 머물러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저분(그리스도)이 거니신 것처럼 그도 그렇     게 거닐어야 합니다."

  о 3,3: "그분(하느님)께 이런 희망을 걸고 있는 모든 이는 저분(그리스도)이 깨끗하신 것처럼 자신을     깨끗하게 합니다."

  о 3,7: "어린 자녀 여러분, 아무도 여러분을 속이지 못해야 합니다. 그분(그리스도)이 의로우신 것     처럼 의로움을 행하는 의도 의롭습니다" (2,29 참조).

  о 3,16: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다는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     니다. 그러니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о 4,17: "사실 우리도 이 세상에서(그리스도) 그분처럼(살고)있기 때문입니다."

  필자는 이처럼 그리스도를 본받으라고 충고하면서 아울러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라고 말한다        (2,3-4). 하느님의 계명은 구체적으로 말해서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다

  (2,9-10; 3,11-23; 4,7.11-12.20-5,3; 2요한 5-6절). 형제는 요한계 교회 교우들이다. 요한계 교회를    떠난 이단자들을 위해서는 기도할 것도 없고(1요한 5,15-17), 인사하거나 영접해서도 안된 다고 말    한다(2요한 10-11절). 그러니 교우들간의 사랑만 강조한 셈이다. 이는 요한 복음의 사랑 관을 승계    한 것이다. 사실 요한 복음서 필자 역시 교우들 서로간의 사랑은 무척 강조했으나 유대인들과 세    상에 대해서는 냉정한 입장을 표명했던 것이다. 그러니 요한 복음서 필자나 요한 서간집 필자는    집단 이기주의적ㆍ배타적 사랑을 주창한 셈이다. 대외적으로는 유대인들과 세속과 대결하는 상황    에 처해 있었고(요한 복음서), 대내적으로는 영지주의 이단자들을 척결해야 하는 처지에 있었던     만큼(요한 서간집) 요한계 교회의 사랑 관을 이해할 수는 있다. 그렇지만 관용과 개방이 미덕으로    통하는 오늘날에 있어서는 요한계 교회에서 주창한 형제 사랑의 순기능 못지 않게 그 역기능도 함    께 고려해 마땅하다.

 

  (3) 종말론적 오류: 영지주의에 물든 이단자들은 현재적 구원에 심취한 나머지 미래 종말 구원을 부정한 것 같다. 그에 비해 요한 서간집 필자는 요한 복음서의 구원관을 이어받아 현재적 구원을 강조하지만, 미래종말 구원도 수용한다. 정차 역사의 종말에 이르러서야 결정적으로 실현될 축복들이 잠정적으로나마 이미 이루어졌다는 "실현된 종말론" 사상은 요한 1서의 다음 단락들에 잘 드러난다.

  о 1,2: "생명이 나타나셨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보았으니 증언하며 여러분에게 알려 드립니     다. 그(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계셨으며 이제 우리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о 1,3: "우리가 보고들은 그 생명의 말씀을 여러분에게도 알려 드립니다. 그것은 여러분도 우리와     친교를 맺게 하려는 것이니, 우리와의 친교는 곧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교     입니다."

  о 2,5: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안에 하느님의 사랑이 참으로 완성됩니다. 이로써 우리     가 그분 안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о 2,8-10: "어둠이 사라지고 참된 빛이 이미 비치고 있습니다.…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이는 빛 속에     머물러 있으며 그는 걸려 넘어지는 일이 없습니다."

  о 2,13-14: "젊은이들이여, 여러분에게 써 보냅니다. 여러분은 그 악한 자를 이겼습니다.…젊은이들     이여, 여러분에게 썼습니다. 여러분이 강하고 하느님의 말씀이 여러분 안에 머물러 있어 여러분     은 그 악한 자를 이겼습니다."

  о 3,1: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들이라고 불리게 되었으니, 과연 그렇습니다."

  о 4,15: "누구든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면 하느님께서 그 사람 안에 머물러 계시고     그도 하느님 안에(머물러 있습니다)." 실현된 종말론과는 달리, 장차 역사의 종말에 이르러서야      구원을 받는 다는, 미래 적 종말론 사상을 표명하는 대목들도 만만치 않다.

  о 2,28: "어린 자녀 여러분, 이제 그분 안에 머물러 있으시오, 그래야만 그분이 나타나실 때에 우리     는 확신을 가지게 될 것이고 또한 그분의 내림 때에 그분으로부터 (쫓겨나는)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о 3,2: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될는지 아직은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드러나게 되면 우리가 그분을 닮게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     다."

  о 3,18-19: "어린 자녀 여러분, 우리는 말과 혀로(사랑할 것이)아니라 행실과 진리로써 사랑합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진리에서 났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앞에서 우리 마음을 진정시     킬 것입니다."

 

2) 필자와 독자, 집필 연대와 장소

애제자의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요한 복음서 1-20장을 집필한 것 같다. 그를 일컬어 요한 복음서 필자라 한다. 거기에다 애제자의 제자들 가운데 또 한 사람이 요한 복음서 21장을 덧붙인 것 같다. 그를 일컬어 요한 복음서 가필자라 한다. 요한 복음서에는 요한계 교회와 유대교의 대결 양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런데 요한 서간집의 경우에는 상황이 바뀌어 요한계 교회와 초기 영지주의가 대결한다. 따라서 애제자의 제자들 중에서, 요한 복음서 필자 및 요한 복음서 가 필자와는 또 다른, 제3의 제자가 요한 서간집을 집필 한 것 같다. 요한 1-3서의 필자가 한 사람이냐 또는 2∼3명이냐 하는 문제는 밝히기도 어렵거니와, 주석 작업을 하는데 그리 중요하지도 않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었든 여럿이었든 모두 애제자의 제자 단에 속했던 것만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1서는 필자가 수신인을 한정하지 않고 "나의 어린 자녀 여러분"이라는 호칭을 상용하는 점으로 미루어 요한계 모든 교회에 보낸 회람 공한이라 하겠다. 아니 서간이라기보다 영지주의 이단을 경고하는 훈사(訓辭)또는 교서(敎書)라 하겠다. 2서는 "원로"로 자처하는 필자가 "선택받은 주부님과 그분 자녀들에게" 인사하는 점으로 미루어(1절), 자신이 소속하지 않은, 요한계 어느 한 교회 교우들에게 보낸 서간이다. 3서는 원로인 필자가 요한계 어느 교회의 교우 가이오에게 보낸 서간으로서 순회 전도사들을 환대하는 그를 칭송한다. 이와는 달리, 지도자연하면서 전도사들을 배척한 디오드레페를   규탁한다.

  집필 연대와 장소에 관해 선 간단히 언급코자 한다. 서간집의 영지주의는 100∼120년경 체린투스에 의해서 체계화되었다(이레네우스,「반이단론」, 1권 26장 1절). 주님의 제자 요한이 아시아의 수도 에페소의 공중 목욕탕에서 체린투스를 만나자 접촉하지 않으려고 달아났다는 전설에 유의하라(「반이단론」, 3권 3장 4절; 참조: 3권 11장 1절). 그런가 하면 안티오키아의 주교 이냐시우스는 110년경 안티오키아에서 체포되어 아시아의 스미르나, 마케도니아의 필립비를 거쳐 로마로 압송되면서 서간 일곱 편을 발송했는데, 그 중 아시아의 스미르나 교우들에게 보낸 서간 1-6장과 아시아의 트랄리아 교우들에게 보낸 서간 9-10장에서, 예수 가현설을 주창한 영지주의자들을 조심하라고 훈계했다. 위의 전적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하고, 요한 복음서에 이어 요한 1서가 씌어졌음이 확실하다고 보아, 요한 서간집은 100년경 아시아에서 집필되었다는 통설이 생겨났다. 서기 55∼57년경 바울로는 아시아의 수도 에페소에서 심혈을 기울여 전도했다(사도 19장). 그러나 90∼100년경 요한 복음서와 요한 서간집이 씌어질 무렵 에페소와 아시아의 그리스도교는 온통 요한계 교회 일색이란 느낌이 든다. 바울로의 교회가 요한계 교회로 탈바꿈한 것이다(슈나켄부르크).

 

4. 해석학적 반성

대 속죄 신앙과 형제애에 관해서도 깊이 새길 필요가 있으나 여기서는 예수의 선재 신앙을 두고 그 깊은 뜻을 헤아려 보고자 한다.

 

1) 예수 선재 신앙

신약학계에는 잘 알려진 일이거니와 예수 어록, 공관 복음서, 사도행전에는 예수의 선재와 신성 사상이 전혀 없다. 바울로의 친서 서간집과 가탁 서간집에는 예수의 선재 사상이 들어 있다는 게 통설이다. 그리고 예수의 선재 사상에 지혜문학이 강하게 작용했다는 것 역시 통설이다. 신약학계에서는 주로 다음 단락들을 꼽는다.

(1) 갈라 4,4: "때가 찼을 때에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셨으니, 그분은 여자에게서 태어나     율법 아래 놓였던 것입니다."

(2) 로마 8,3:"육 때문에 그 힘이 빠진 율법으로는 불가능했던 것을 하느님께서는(이룩하셨으니), 곧     죄의 육을 닮은 모습으로, 죄를(속죄하기)위하여 당신의 친 아드님을 보내시어 육 안에서 죄를      처단하셨습니다."

(3) 1고린 8,6: "우리에게는 오직 한 분의 하느님이 계실 뿐이니, 곧 아버지십니다. 모든 것은 그분에     게서 나오며 우리도 그분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직 한 분의 주님이 계실 뿐이니, 곧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모든 것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습니다"(참조:     골로 1,15-20; 히브 1,1-3).

(4) 1고린 10,4: "우리 조상들은 모두 같은 영적 음료를 마셨으니, 그들을 따르던 영적 바위에서 마셨     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바위는 그리스도였습니다."

(5) 2고린 8,9: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부요 하셨지만 여     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참조: 필립 2,6-11).

(6) 필립 2,6-11:

        "그분은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면서도

        하느님과 같음을 노획물인 양 여기지 않으시고

       7 도리어 자신을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어

         여느 사람 모양으로 나타나셨도다.

       8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아니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도다.…"

(7) 골로 1,15-20: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조물의 맏이시로다.

      16 과연 하늘과 땅ㆍ위에 있는 만물은

         그분 안에 창조되었도다.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

         권좌들이나 주권들이나 권력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그분을 위해서 창조되었도다.…"

 

2) 예수 신성 신앙

요한계 문헌으로 건너가면 사정이 판이하다. 선재 사상은 하강과 상승 기독론의 바탕 인만큼 도처에 깔려 있다(예로 요한 3,16-17; 6,62; 8,58; 17,5; 1요한 4,9.10.14).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께 극존칭을 드려 예수는 하느님이라고 한다. 신약성서 중 오직 요한계 문헌에서만 볼 수 있는 충격적인 그리스도 신앙 고백이다.

  (1) 요한 1,1:  "맨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 곁에 계셨고

                하느님이셨다. 그 말씀은."

  (2) 요한 1,18: "일찍이 아무도 하느님을 보지 못했다. 오직 아버지의 품안에 계시는 외아들 하느님이     신 그분이(하느님을)알려 주셨다."

  (3) 요한 20,28: "토마는 대답하여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하고 여쭈었다."

  (4) 1요한 5,20: "하느님의 아들이 오셔서 우리에게 이해력을 주시어 그 참되신 분을 알아보도록 하셨다는 것도 우리는 압니다. 우리는 그 참되신 분 안에 있고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이분은 참되신 하느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십니다"(1,1-3 참조).

 

3) 예수 선재와 신성 신앙 애해

예수는 하느님이시라는 신앙 고백은 우선 요한계 교회가 유대교 테두리를 벗어나 독립 종단으로 성장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야훼 밖의 어느 누구도 신으로 받들지 않는 유대교에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신앙 고백이다.

  예수의 신성 신앙은 교부들에게 계승되었다. 예로,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우스가 110년경 안티오키아에서 로마로 압송되던 도중에 스미르나에서 에페소 교우들에게 써 보낸 편지 19,2-3에 채록한 예수 성탄가에 예수 신성 신앙이 잘 드러난다.

  2절: 하늘에 별 하나 빛났다.

       모든 별들보다 더욱 (환하게)

       그 빛은 형언할 수 없었고

       그 새로움은 신비스런 느낌을 주었다.

       다른 별들은 모두 해와 달과 더불어

       그 별을 에워싸고 춤을 추었다.

       그가 만물을 두루 비추니

       깜짝 놀랐다. 자기네와 다른 저

       새로움은 어디서 올까?

  3절: 그래서 마술은 풀리고

       죄악의 사슬은 사라졌다.

       무지는 없어지고

       옛 왕권은 파멸되었으니

       하느님께서 사람마냥 나타나신 까닭이로다,

       새로이 영생을 주시고자,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일이 이제 개시되었다.

       그로부터 만물이 생동하게 되었으니

       죽음의 파멸이 닥친 까닭이로다.

325년 비티니아 지방 니카이아(지금의 이즈닉)에서 개최된 공의회에서는 예수는 성부와 "일체시다"(호모우시오스)라는 교의를 확정했다. 451년 콘스탄티노플 앞바다 건너 칼케돈(지금의 카디코이)에서 열린 공의회에서는, 예수께는 두 본성(神性, 人性)이 있고 두 본성은 한 위격(聖子位格)안에 혼합됨도 불리됨도 없이 결합되어 있다는 교의를 확정했다. 이렇게 해서 요한계 그리스도론이 니카이아―칼케돈 교의들로 귀결되었다.

  현대 신학계에선 이 교의들을 단순히 수용ㆍ반복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해석한다. 서구 가톨릭 조직신학자 세 분은 이렇게 해석한다. "칼라너는 인간학적 지평에서 칼케돈 교의를 재해석하여,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하느님께 깊이 뿌리를 내려 인간 완성을 온전히 실현하셨다는 것이 그 교의의 근본적 뜻이라 하였다. …스호느베르흐는 예수의 역사적 실존을 중시하여, 예수라는 인물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셨다는 뜻으로 칼케돈 교의를 해석하였다. 발타사르는 예수께서 품으신 믿음에 착안하여, 그분은 신적으로 가득 차서 인간적으로 가득 채우는 삶을 살아가신 분이라고 해석하였다"(「현대 신학 동향」, 분도출판사, 1984, 179쪽). 종교 다원주의를 주창하는 영미 개신교 종교신학자 힉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육화의 개념은 신화적 개념, 비유적인 말, 심상의 단편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예수께서 우리의 삶과 하느님 사이의 접촉점이라는 방편적인 말이다. 예수의 현존 속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게 됨을 우리는 안다"(존 힉,「하느님은 많은 이름을 가졌다」, 도서출판 창, 1991, 86쪽. 참조: 66.85쪽).

  오늘날 이 땅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해석학적 반성을 할 때 다음 세 가지 사실을 유의해 마땅하다. 첫째, 동방의 그리스도인으로 동방의 사유방식에 유의할 일이다. 프랑스의 중국통 쟈끄 제르네는 중국인들과 서구인들의 사유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는데 이는 한자 문화권에 사는 우리에게도 해당된다. "중국적 사고에서는 대립하는 짝들의 상호 보완적 상관관계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따라서 상대주의적 사고가 기본적 특징을 이루고 있다. …서양의 철학적 작업은 추상과 고정 불변한 개념들을 통해 진행된다. 그러나 중국적 사유는 기능적 특성에 따라 대립과 구분만을 고려할 뿐이다. (무엇이 절대 보편적으로)옳으냐 그르냐, 또는 (절대 보편 타당한 것이)있느냐 없느냐를 문제삼지 않고, 서로 연결되고 조합하고 보완하는 대립관계만을 문제삼는다. 중국적 사유에는 영구 불변하는 실재가 아니라, 잠재성과 경향성, 생성과 소명의 단계적 과정들이 문제가 된다. 불변하는 보편적 법칙성을 찾기보다는 생성 발전의 모형과 도식에 더 관심을 둔다. …논리적으로 명료하게 구분 짓고 분석해 내는 일보다는, 개념들을 서로 접근시켜서 결합해 내는 일이 중요한 것이다. …중국 사람들은 선교사들이 너무나 '종목 종목마다 갈라놓고, 이해할 수 없는 수만 가지 추론을 한다'고 힐난하였다"(쟈끄제르네,「유교와 그리스도교 사상: 언어의 차이와 사유의 차이」, 송영배 옮김,「종교ㆍ신학 연구」, 제5집, 분도출판사, 1992).

  둘째, 20세기에 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현대인의 사유방식에 유의할 일이다. 형이상학이 지배하던 시대에는 존재ㆍ실체ㆍ권위 따위의 언어가 득세했다. 그러나 형이상학의 종언을 입에 올린 지 한참 되는 오늘날에는 역사ㆍ과정ㆍ확인ㆍ실효성 등의 언어가 통한다(서공석,「현대인의 감수성과 수도생활」,「종교ㆍ신학 연구」, 제4집, 분도출판사, 1991, 256-8쪽 참조). 이상 동방인과 현대인의 사유방식을 고려한다면, 예수는 하느님이 시다라는 진술은 그 어느 누가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예수의 본질을 관조한 진술〔本質定義〕이기보다는, 구원사적 관점에서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체험한 진술〔行態定義〕이라 할 것이다. 하느님은 영이시다, 하느님은 빛이시다, 하느님은 사랑이 시다라는 진술이 본질정의가 아니고 행태정의 인 것처럼 말이다(1요한 1,5㉥참조).

  셋째, 예수는 하느님이 시다라는 진술이 요한 복음서의 머리말과 맺는 말에(1,1.18; 20,28), 요한 1서의 머리말과 맺는 말에(1,1-3; 5,20)나오는 신앙 고백 언어라는 사실에 유의해 마땅하다. 신앙 고백 언어는 사랑 고백 언어와 그 성격이 매우 비슷하다. 신앙 또는 사랑의 고백 언어는 믿는 이들 또는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극히 진솔한 언어이다. 그러나 국외자들에게는 매우 생경한 것이 고백 언어의 특징이다〔졸고,「요한 서한집 연구」,「신학사상」74호 (1991 가을) 595-6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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