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곡성당 자유게시판

김대건 신부님의 스무 번째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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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희 [sin6476] 쪽지 캡슐

2014-03-20 ㅣ No.11231

공경하올 주교님께,

우리가 주교님을 떠나온 다음에 서울에서 일어난 일은 주교님께서 이미 자세히 아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여행 준비를 마친 후 닻을 올리고 순풍을 만나 무사히 연평 앞바다에 도착하여

보니 바다는 어선들로 덮여 있었습니다.

저의 일행은 생선을 사가지고 순위도 항구로 가서 되팔려고 하였으나 사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생선을 육지에 풀어놓고 사공 한 사람을 시켜 소금으로 절이게 하였습니다.

거시서부터 우리는 항해를 계속하여 소강, 마합, 터진목, 소청, 대청 등 여러 섬을 지나 백령도 근처에 와서 닻을 내렸습니다. 거기에는 백 척 가량의 중국 산동 어선이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배들은 해안 가까이까지 와 있었습니다마는 그 배에 탄 어부들은 아무도 조선 땅에 내릴 수는 없었습니다. 조선 해안의 높은 곳과 산꼭대기에서 포졸들이 그들을 감시하기 위해 보초를 서고 있었습니다. 근처 섬에 사는 조선 사람들이 호기심에 끌려 중국 배를 구경하려고 모여들었습니다. 저도 밤중에 중국 배를 찾아가서 그 배의 주인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 주교님의 편지와 또한 제가 베르뇌, 메스트르, 리부아 신부님들에게 보내는 편지, 그리고 중국 신자 두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를 전하여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이들 편지에 황해도 해안의 섬과 바위에 그 밖에 주의해야 할 것들에 대한 설명과 함께 조선 지도 두장을 동봉하였습니다.

 

이곳은 중국인들의 중개를 조심스럽게 잘 이용하기만 하면 선교사 신부님들을 영접하고 서로 편지를 전달하기에 매우 유리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중국 어선들은 고기를 잡으려 해마다 음력3월 초순에 이 곳으로 모이고 5월 하순에는 돌아간답니다.

우리는 주교님의 지시대로 실행한 후 그곳을 떠나 순위도 항구로 돌아왔습니다.  우리 여행은 그때까지 순조롭게 잘 진행되었기이 끝까지 성공하리라고 기대하였습니다.

 우리가 해변에 펼쳐놓았던 생선이 아직도 마르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그곳에 머무는 기간이 길어졌습니다. 저의 복사 베난시오가 박해를 피하여 7년 동안 어떤 사람의 집에 숨어 있었을  때 그 집에 맡겨두었던 돈을 찾으러 가겠다며 뭍에 내리게 해 달라고 하기에 허락하였습니다.

그가 떠난 다음에 관장이 부하들을 거느리고 우리 배에 와서 중국배를 쫓으려 하니 우리 배를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조선 법에 따르면 양반의 배는 공공부역에 동원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 인지는 무르지만 백성들은 저를 지체 높은 가문의 양반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베난시오가 이런 경우 취할 태도를 일러준바가 있어 저는 관장에게 우리 배를 빌려주게 되면 제 체면이 깍일 것이고 따라서 이 지역에서 일을 보는 데 지장이 있기 때문에 빌려줄 수 없다고 거절하였습니다.

그러자 포졸들은 제게 욕을 퍼붓고는 키를 맡은 으뜸 사공을 잡아가더니 저녁때 다시 와서 두 번째 사공을 관가로 끌고 갔습니다. 관장은 그들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퍼부은 결과 저의 신분에 대해여 중대한 의혹을 일으키는 대답을 듣게 되었습니다.

결국 관장은 사공 한 사람이 신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포졸들은 "우리는 30명이다. 만일 저 사람이 참으로 양반이고 그자가 우리에게 폭력을 쓴다고 해도 30명이 다 죽지는 않을 것이다, 기껏해야 한두 명만 죽을  테니 함께 그자를 잡으러 가자. " 고 의논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밤중에 여러 명의 기생을 데리고 와서 미친 듯이 저에게 덤벼들었습니다. 그들은 제머리카락을 한 움큼 잡아뽑고 포승으로 결박하여 발길질과 주먹질과 몽둥이질을 하였습니다.

그러는 동안 남아 있던 사공들은 어두운 밤을 타서 종선으로 빠져나가 힘껏 노를 저어 달아났습니다. 해변에 이르자 포졸들이 제 옷을 벗기고 마구 때리며 온갖 능욕을 퍼부으면서 관가로 끌고 갔는데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관장이 저에게 " 당신이 천주교인이오.?" 하고 물었습니다.  저는 "그렇소. 나는 천주교인이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가 "어찌하여 임금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천주교를 믿는 거요? 그 교를 버리시오."라고 심문하기에" 나는 천주교가 참된 종교이므로 믿는 거요. 우리 종교는 하느님을 공경하라고 가르치고 또 나를 영원한 행복으로 인도해 주오.

나는 배교하기를 거부하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관장은 저를 고문하게 하면서 "배교하지 않으면 곤장으로 때려 죽이겠소."라고 말하였습니다."좋을 대로 하시오. 그러나 나는 결코 우리 하느님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오. 우리 종교의 진리를 듣고 싶으면 들어보시오. 내가 공경하는 하느님은 하늘과 땅과 사람과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고, 선인들은 상 주시고 악인들은 벌하시는 분이오, 그러니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하느님을 공경하여야 마땅하오. 관장 나으리 ,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이런 형벌을 당하게 해주니 감사하오, 그리고 우리 하느님께서 당신을 더 높은 벼슬에 오르게하여 이 은혜를 갚아주시기를 바라오>" 라고 말했습니다. 관장과 거기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는 껄껄 웃었습니다. 그런 다음에 길이가 여덟 자나 되는 긴 칼을 가져왔습니다. 저는 즉시 제 손으로 그 칼을 목에 쓰니 둘러섰던 사람들이 또 한번 껄껄 웃어댔습니다. 그리고 저를 이미 배교한 두 사공과 함께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저는 손. 발. 목.허리를 꽁꽁 결박당하여 걸을 수도 앉을 수도 누울 수도 없었습니다.

또한 저는 호기심에 끌린 구경꾼들에게 둘러싸여 매우 괴로웠습니다. 저는 밤이 으슥토록 저들에게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였더니 그들은 관심있게 듣고 나서 임금님이 금하지만 않으면 자기들로 믿겠다고 말하였습니다.포졸들이 제 보따리에서 중국 물건이 나오자 저를 중국인인 줄로, 믿었습니다. 이튿날 관장은 저를 출두시킨 뒤 중국인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아니오, 나는 조선 사람이오."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저의 말을 믿지 않고 "중국 어느 지방 출신이오."라고 묻기에 "나는 중국 광동성의 마카오에서 공부하였소. 나는 천주교 신자요. 구경도 하고 천주교를 전하기도 할 마음으로 여기까지 오게 되었소."라고 대답하

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저를 다시 감옥에 가두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닷새가 지난 후에 한 포교가 포졸들을 거느리고 저를 황해도의 수부인 해주 감영으로 이송하였습니다. 감사가 저에게 중국인이냐고 묻기에 순위도 관장에게 대답한 것과 같이 말하여습니다. 그는 천주교에 대하여 여러 가지 질문을 하였습니다. 저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영혼의 불사불멸, 천당과, 지옥, 하느님의 존재, 죽은 후의 행복을 위하여 하느님을 공경할 필요성 등을 그에게 설명하였습니다. 감사와 그 부하들은 "당신이 한 말이 다 좋고 이치에 맞는 말이기는 하지마는 임금님께서 천주교인이 되는 것을 금하시지 않소."하고 대꾸하였습니다.

 그들은 다시 신자들과 선교지에 해를 끼칠 여러 가지 정보를 묻기에 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화가 나서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여러 가지 혹독한 고문을 할 것이오 ."라고 큰소리로 호령하였습니다."마음대로 하시오."라고 대답하면서 저는 여러 가지 형구가 있는 대로 달려가 그것을 감사의 발치에 던지며 "나는 모든 준비다 다 되어 있으니 치실 테면 치시오. 나는 당신들의 고문을 두려워하지 않소." 하고 말하였습니다.

포졸들은 이내  그 형구를 집어 치웠습니다. 감사의 부하들이 저에게 다가와서 "감사 앞에서는 누구라도 소인이라고 말하는 것이 관례요."라며 일러주기에 "그게 무슨 말이오. 나는 장성한 어른이고 양반이오. 나는 그런 말은 모르오." 라고 하였습니다.

며칠이 지난 다음 감사가 다시 저를 출두시킨 뒤 중국의 여러 사정을 진력나도록 캐물었습니다.때때로 제가 정말 중국인인지 아닌지를 알아보려고 통역을 통해 묻기도 하였습니다. 마침내 그가 저에게 배교하라고 명하기에 저는 어깨를 으쓱하며 가소롭다는 표시로 빙긋이 웃었습니다.

 저와 함께 잡힌 신자 두 사람이 혹독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제가 살고 있는 서울 집 주소와 주교님의 복사 이 토마스와 그 동생 마태오 그리고 그 외 다른 몇몇 신자의 이름을 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제가 중국 배와 연락한 것과 배 주인에게 맡긴 편지 등에 대해서도 실토하였습니다.그 즉시 포졸 한 부대가 중국 배에 파견되어 그 편지들을 빼앗아 감사에게 가져왔습니다.

그후에는 저와 사공을 각 각 다른 감옥에 가두어 놓고 네 명의 포졸들이 밤낮으로 우리를 엄중히 감시하였습니다. 우리의 손과 발에 쇠사슬이 채워지고 목에는 칼이 씌워졌습니다. 우리 세 사람의  허리는 긴 줄로 묶여져 있었기 때문에 생리적 요구를 해결해야 할 때마다 그 줄을 붙잡고 있어야 하였습니다. 우리가 당한 고통이 어떠하였겠는 지는 상상을 맡겨드립니다.

제가 마카오에서 병을 앓았을 때 치료하기 위하여 거머리를 가슴에 붙여서 생긴 흠집이 일곱 군데나 있는 것을

보고 포졸들은 저를 북두칠성이라는 등 별별 조롱을 다하여 야유하였습니다.

임금님은 우리가 체포된 사실과 또 제가 중국인이라는 말을 듣고 포졸을 보내어 서울로 압송하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길을 가는 동안에도 감옥 안에 갇혔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대로 결박되어 있었습니다. 도둑이나 큰 죄인처럼 붉은 포승으로 팔을 묶고 머리엔 검은 자루를 씌웠습니다.

구경꾼들이 우리를 귀찮게 괴롭혀서 길을 걷기가 몹시 피곤하였습니다. 제가 외국인이라고 알려졌기 때문에 사람들은 지나가는 우리를 구경하려고 나무 위나 지붕 위로 올라가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는 서울에 도착하여 포도청에 수감되었습니다. 포도청 사람들은 저의 말투를 들어보고는 " 분명히 조선 사람이다."라고 단정하였습니다. 이튿날 재판관들이 저를 출두시켜 놓고는 "당신은 도대체 어느 나라 사람이오."라고

묻기에 "나는 조선 사람으로서 중국에 가서 공부하였소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중국어 통역을 불러다가 저와 이야기를 시켜보았습니다.

1839년 박해 때 배반자(김여상)가 조선 소년 3명이 서양말을 배우러 마카오로 떠났음을 일러바쳤습니다. 또 저와 함께 잡힌 신자 한 사람이 제가 이 나라 사람임을 실토하였으므로, 저의 신분이 오랫동안 감춰질 수 없었습니다.그래서 저는 재판관들에게 "나는 그 세 소년중의 하나인 김대건 안드레아요."라고 자백하는 동시에 조국에 돌아오기 위해 겪어야 했던 일들을 모두 이야기하였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재판관들과 구경꾼들이 "가엾은 젊은이로다. 어려서부터 엄청난 고생을 많이도 하였구나." 하며 혀를 찼습니다. 그런 다음 임금님의 명령에 따라 배교하기를 명령하였습니다. 저는 "임금님 위에 하느님이 계시는데 그분이 우리에게 당신을 공경하라고 명하시오. 그러니 하느님을 배반하는 것은 임금님의 명령이라도 정당화시킬 수 없는 큰 죄악이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그들이 다시 신자들을 대라고 독촉하였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애덕의 의무와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계명을 설명하였습니다.

 그들이 다시 천주교에 대하여 묻기에 저는 하느님의 존재와 단일성. 우주만물의 창조. 영혼의 불사불멸. 천당과 지옥, 창조주를 경배할 필요성, 이교의 허위성 등을 자세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제가 말을 끝내자 재판관들은 "당신의 종교도 좋소 우리도 우리 종교가 좋기 때문에 믿소,"라고 대답하였습니다.그래서 저는 즉시 "당신들의 의견이 그러하다면 우리를 편히 지내도록 조용히 내버려 두어야 하지 않소? 그런데

그러기는커녕 당신들은 우리를 박해하고 우리를 극악한 범죄인보다 더 가혹하게 다루고 있소. 당신들은 우리 종교를 옳고 좋은 종교라고 인정하면서도 마치 극악한 종교처럼 박해하고 있소. 이것은 가가당착이고 모순이오."라고 반박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그들은 대답 대신 그저 바보스럽게 웃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압수된 여러 통의 편지와 지도를 저에게 가져왔습니다. 한문으로 씌어진 편지 두 통은 관장이 직접 읽었으나 거기에는 안부의 말밖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서양 글씨로 쓴 편지를 저에게 내밀며 번역하라고 명하였습니다.저는 우리 천주교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게 번역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다시 베르뇌, 메스트르, 리부아 신부님에 관해 질문하였습니다. 저는 그분들이 중국에 사는 큰 학자들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들이 주교님의 편지와 저의 편지 글씨가 서로 다른 것을 발견하고 누가 썼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통틀어 제가 썼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들은 주교님의 편지를 내보이면서  써보라고 명령하였습니다.그들이 꾀를 쓰는 모양이기에 저도 꾀를 내어 그들을 이겼습니다.

" 글씨는 철필로 쓴 것이니 내게 철필을 갖다 주시오. 그러면 분부대로 하겠소."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들이 "우리는 철필이 없소."라고 하길래 저는 "철필이 없으면 그와 같은 글씨를 쓸 수 없소."라고 대답하였습니다.그랬더니 누군가가 새깃을 가져왔습니다. 재판관은 그것을 제게 주면서 " 이것을 가지고 쓸 수는 없겠소."라고 말했습니다."철필과 같지는 않지만 서양 글씨는 한 사람이 여러 모양으로 다르게 쓸 수 있다는 것을 보여드릴 수는 있소."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고서 새깃을 뾰족하게 깍아 아주 가는 글씨를 몇 줄을 써놓고 그 다음에는 새깃의 끝을 잘라버리고서 굵은 글씨를 써놓은 뒤에 "자, 보시오. 이 두 글씨가 다르지 않소?"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들은 만족하게 여겼던지 편지에 관해서는 더이상 추궁하지 않았습니다. 주교님이 보시다시피 우리 조선의 학자는 서양의 학자와 같은 수준이 아님을 이해하실 것입니다.

 저와 함께 잡힌 신자들은 서울에서 아직 고문을 받지 않고 있습니다. 가롤로(현석문)는 자기와 함께 잡힌 신자들과 다른 감옥에 갇혀 있어서 우리와는 연락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와 같은 감옥에 함께 갇혀 있는 10명의 신자 중에 4명이 배교하였는데 그들 중3명은 자신의 나약함을 뉘우치고 있습니다.

1839년에 나약하였던 이 (신규) 마태오가 지금은 넘치는 용맹으로 순교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 배의 키를 맡았던 으뜸 사공 선실의 부친과 그리고 전에 신자들에게 좋지 못한 표양을 주었던 남(경문) 베드로도 이 마태오를 본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형장에 끌려갈 날짜는 알 수 없습니다.주님의 자비에 온전히 의탁하고 주님께서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에게 주님의 거룩한 이름을 증거할 용맹을 주시기만 바라고 있습니다.

조정에서는 주교님의 복사 이 토마스와 그 밖의 주요한 신자들을 기어이 체포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포졸들도 지쳤는지 신자들을 수색하는 데 열성이 줄어든 것 같습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그들은 이천, 양지, 은이, 그리고 충청도와 전라도까지 각처로 갔다고 합니다.

주교님과 안 다블뤼 신부님은 제가 죽은 후에도 깊숙이 숨어 계시기를 바랍니다. 재판관의 말을 듣자니 외연도 근처에 정박한 세 척의 군함이 프랑스 군함으로 믿어진다고 합니다. 프랑스 황제의 명령을 받고  파견되어 온 그 군함은 조선에 큰 환난을 내릴 듯이 위협하고 나서 두척은 내년에 다시 오겠다고 다짐하고 떠나갔고 한 척은 조선 근해에 머물러 있다고 합니다.

조선 조정은 1839년에 순교한 3명의 프랑스인을 죽인 사건을 기억하고 두려워하는 것 같습니다. 그들이 저에게 무슨 목적으로 군함이 왔는지 아느냐고 묻기에 저는 그들이 왜 왔는지 알 수는 없으나 프랑스인들이 아무 이유

없이 남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으니까 조금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프랑스는 강력한 나라지만 그 정부는 관대한 도량을 가졌다고 하였더니 제 말을 믿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프랑스인을 3명이나 죽였는데도 아직 아무런 보복을 당하지 않았다고 큰소리치고 있습니다.

만일 프랑스 함선이 실제로 조선에 왔다면 주교님께서는 그 사실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저에게 영국에서 만든 세계지도 한 장을 주면서 번역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저는 화려한 여러 가지 객깔로 두 장을 그렸는데 이것이 그들의 눈에 들었습니다.

 한 장은 임금님께 바칠 것이랍니다. 지금 저는 대신들의 지시로 간단한 지리 개설서를 편찬하느라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저를 큰 학자로 여기고 있습니다.참으로 딱한 사람들입니다. 저의 우술라를 주교님께 부탁드립니다.

저의 어머니는 10년 동안 떨어져 있던 아들을 불과 며칠 동안만 만나보았을 뿐인데 또다시 갑작스럽게 잃고 말았습니다. 슬픔에 잠긴 저의 어머니를 잘 위로하여 주시기를 주교님께 간절히 바랍니다. 이제 저는 진정으로 주교님의 발 아래 엎드려 지극히 사랑하올 아버지이시고 지극히 공경하올 주교님께 마지막

하직 인사를 드립니다. 또 베지 주교님께도 같은 인사를 드립니다. 다블뤼 신부님께 지극히 공손한 하직 인사를 드립니다. 이 다음에 천당에서 다시 만나 뵙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감옥에 갇힌 탁덕 김안드레아가 올립니다.

주교님께 올리는 편지의 추신 : 감옥 안에서 1846년 8월 29일 프랑스 군함이 조선에 왔다는 확실한 소식을 오늘 들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위협만 하고 돌아간다면 도리어 가혹한 형벌을 면치 못하게 될 것입니다.

주 하느님, 모든 일을 잘 보살피시어 좋은 결과가 있게 하소서.

 

※ 몇 년전 저의 작은 공간에 써 놓았던 글을 다시 읽어 보면서 조심스럽게 옮겨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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