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성당 게시판

천국이 가까이 있는 줄 알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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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이 [pear] 쪽지 캡슐

2000-08-19 ㅣ No.3722

오늘 조금 비는 시간이 있어서 책방에 들렸었습니다.

 

 

 

 

 

책방에 가면 늘 저의 터무니 없는 욕심에 대해 생각하곤 하지요.

 

 

 

 

 

전 쇼핑하는 일을 그리 즐기는 편이 아닌데 책방에만 가면 갖고 싶은 책들이 너무 많아요.

 

그래서 이것 저것 챙겨서 사다 놓고 보면 도무지 책 읽을 짬이 나지 않는 거에요.

 

더군다나 나이가 들어 갈수록 그야말로 눈이 침침해지고,

 

(저 안과에서 노안 판정 받았거든요.)

 

자존심 팍팍 상하게스리 책만 들었다하면 눈꺼풀이 천근 만근이 되어벼려서

 

책방에 갈 때마다 한권 두권씩 사다 놓기만 한 책들이 마치 책방의 진열대에 놓인 그것들처럼 깨끗한채로 울고 있답니다.

 

 

 

 

 

그래서 오늘은 작심을 하고 책을 사지 않기로 했지요.

 

 

 

주로 신간들중에 쉽고 편한 책들만 뒤적거리다가

 

눈에 번쩍 들어 오는 책이 한 권 있었어요.

 

 

 

어린이들을 위한 화보집 같은 거였는데요.

 

박수근 화가의 그림과 일생을 엮어 놓은 책이었답니다.

 

전에도 몇 번인가 그 분의 그림을 보구 아주 깊은 감동을 받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한 장 한 장 유심히 넘겨 보았지요.

 

 

 

그분께서 살아 생전에 그리고자 했던 것들이 주로 인간의 선함에 대해서 였다구 하더라구요.

 

 

 

투박하지만 살아있는 듯한 그림들 속의 선한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 자꾸 자꾸 선함을 잃어가고 있는 내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가 그 책의 맨 끝에 그 분이 임종하실 때 하셨다던 말씀이 이 밤 내내 제 머리 속을 가득 채우고 있답니다.

 

 

 

 

 

 

 

"천국이 가까운 줄 알았는데,, 너무 멀어......." 라구요.

 

 

 

 

 

 

 

가슴이 얼얼하구 머리가 띵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천국은 도대체 어디쯤에 있는 걸까요?

 

우리 가운데...

 

저 먼 하늘 나라에....

 

 

 

 

 

 

 

초등학교에 다닐때에 천국과 지옥이란 거에 대해서 참 열심히도 궁금해 했던 기억이 납니다.

 

 

 

제 어린 기억으로,

 

천사들과 함께 날개를 달고 둥둥 떠다니는 하늘나라와

 

아무리 발버둥쳐도 헤어날 수 없는 불구덩이 지옥.......

 

 

 

하느님이란 분이 너무 이상하게 느껴졌었어요.

 

내가 만일 하느님이라면 마귀같은 것도 안 만들고 사람들 나쁜 짓 하지 않게..

 

모두 아름다운 천국에서 서로 싸우지 않고 살게 했을텐데....하면서 말이지요.

 

 

 

 

 

많이 크고 난 다음에 다시 하느님이 저를 부르셨지요.

 

하늘에만 계신 줄 알았던 하느님은 언제나 제 곁에 함께 있어 주셨고,

 

또 내가 알아왔던 많은 사람들 안에 계셨었고,

 

그걸 깨닫는 순간, 하늘나라는 내 마음안에 그리고 우리 사람들의 만남과 그 사랑안에 있다는 걸 가슴벅차게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마음의 눈을 열면 온 세상이 내 것이 되고

 

슬프고 고통스러운 이 세상 삶도 참 아름다운 하느님의 뜻이란 걸요.

 

 

 

 

 

 

 

그런데....

 

오늘 가까이 있는 줄 알았던 천국을 너무 쉽게 너무 안이하게 얻으려했던 저의 도둑놈 심보를 다시 한 번 보게 되었습니다.

 

 

 

단순하고 순진했던 어린 날들엔

 

죄는 곧 지옥이고,

 

착한 일을 아주 많이 해야 어렵게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배웠었는데...

 

 

 

내가 짓고 있는 많은 불평과 성냄과 나태함을 언제나 합리화하는데에만

 

온 정신을 쏟고 있는 저의 볼품없이 찌그러져버린 자화상을 지우개로 지우고 또 지우고 싶은 처절함을 제게 안겨다 주었답니다.

 

 

 

 

 

 

 

살면서....

 

나랑 참으로 많이도 다르다고 판단되어지는 사람들을 만났었습니다.

 

처음엔 의아해하다가 설득하려고 노력하다가 이해해보려고도 하다가 끝내는 화를 내고,

 

그 사람들을 내 마음 속에서 버렸습니다.

 

 

 

그 일이 첫 번째 때에는 아주 많이 힘겨운 고통이었는데..

 

이제는 너무 쉽게 판단하고 너무 쉽게 몰아부치고,

 

너무 쉽게 잊어버립니다.

 

 

 

이러구서두 천국이 내 안에 있다니요...

 

하느님이 이런 제 모습을 보시면 "데끼놈"하고 호통을 치실 것 같았답니다.

 

 

 

 

 

 

 

천국이 가까이 있는 줄 알았는데 너무 멀리 있습니다.

 

 

 

 

 

어렸을 때 착한 일을 아주 아주 많이 해야 갈 수 있다고 믿고 있었던 하늘나라를 너무 쉽게 공짜로 얻었으면서도, 거저 주신 보답에 너무 무심해 있던 저의 배은망덕....

 

 

 

거저 받은 하늘나라를 잃지 않기 위해서는 좁은 길로 가야할테지요.

 

인내와 온유와 나눔과 섬김의 좁은 길로요......

 

 

 

 

 

천국으로 가는 길은 가깝지만 또 참으로 머나먼 가시밭길처럼 느껴진 하루였습니다.

 

 

 

 

 

                                     베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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