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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요한계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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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03-02-12 ㅣ No.91

 

 

신약 요한계 문헌

 

 

-백광진 신부님의 인터넷 성서 자료 참조

 

 

 

신약성서 중에는 저자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 서간이 히브리서 외에도 셋이나 있다. 극히 오랜 전승에 의하면 사도 요한의 글이라고 한다. 그 사상과 표현방식이 넷째 복음서의 저자 그대로이며 특히 셋 중에서 가장 길고 중요한 첫째 편지가 그렇다. 둘째와 셋째 편지는 길이도 짧고 내용도 비중이 작다. 사도의 붓끝에서 나온 글이 아니었더라면 그처럼 다른 신약성서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소중히 보전되어 오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 서간들도 요한의 복음서나 묵시록과 마찬가지로 1세기말에 씌어진 것이다. 연로한 사도는 그리스도교 생활의 두 가지 근본을 거듭 상기시키고 있다. 세례 때에 받은 교리를 충실히 간직하는 일과 그리스도교 신자들 사이에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 두 근본이다.

 

요한의 첫째 편지

  논리적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에게는 좀 읽기 힘든 서간이다. 처음 이 서간을 접할 경우 다섯 장을 다 읽고 나면 같은 얘기가 자주 반복된다는 인상을 받는다. 미로(迷路)와 같아서 길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다시 원점에 이르고 마는 듯한 느낌이다.

  요한은 이 서간에서 중심사상을 거듭 반복하고 이야기를 전개하다가 다시 그 사상으로 돌아오곤 한다.

  또 이 서간은 요한이 당시 서간을 쓸 때의 상황을 엿볼 수 있는 것으로 다분히 논쟁의 성격을 띠고 있다. 그렇지만 이 서간이 호교론을 위한 책은 아니다. 요한은 어디까지나 신자들을 상대로 글을 쓰고 있으며 그들이 내심에 간직하고 있는 초자연적 실재들을 주지시키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그 의식만 뚜렷하다면 교리나 실천에 침투해 오는 온갖 오류를 퇴치하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첫째 편지의 중심사상은 하느님과 그리스도교 신자를 맺는 긴밀한 일치이다. 이 일치야말로 인간으로 하여금 영원한 생명의 근원 내지는 원천에 접하게 하며 진리의 밝은 빛에 도달케 한다. 그래서 '친교'니 '하느님 안에 있다' '하느님 안에서 산다', '하느님께로부터 나다' , '하느님을 차지하다, ' '하느님을 뵙다'는 표현이 빈번히 반복되고 있다. 이 일치가 어디까지나 영원한 생명에 들 때에 비로소 완전해지고 충만해진다면, 현세에서는 하느님과의 이 관계가 타자들에 의해서 손상되거나 그르칠 수도 없지 않다.

  요한 당대에도 과연 그런 인물들이 있었던 것이다.

  사도는 이 서간에서 신자들이 자기가 하느님과 정말 일치되어 있는지를 확인하고 요한이 가르친 것과 다른 교리를 제시하는 자들을 식별할 수 있는 기준을 신자들에게 가르친다.

  이 서간에는 "여기서 우리는….을 알 수 있다"는 문장이 수없이 많이 나온다. 이것은 자기 신자들이 참다운 신앙의 관념을 명확하게 갖춤으로써 딴 사람들의 말에 쉽게 설득 당하거나 신앙에 상반되는 그릇된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기를 바라는 사도의 염려를 잘 드러낸다.

  서간을 잘 보면 그리스도교 신자가 참으로 하느님과 일치해 있다는 사실을 판단하는 기준이 세 군데 나온다. 그러나 똑같은 말을 그저 세 번씩이나 되풀이하는 것은 아니다. 매번 그 생각은 앞의 것보다 내용이 풍부해진다. 그리고 사도의 개인적 체험, 하느님과 접하고 있다는 가장 분명한 보장이 되는 그리스도와의 일치가 생생히 반영되고 있다.

  요한의 첫째 편지는 서문(1, 1-4)과 결문(5, 13-21)을 제외하고 본문을 세 부분으로 나눠 볼 수 있다. 저자가 그리스도교 신자와 하느님과의 일치가 참되다는 것을 판별하는 기준들을 제시하는 대목에서 각 부분을 쪼갤 수가 있다(1, 5-2, 28; 2, 29-4, 6; 4, 7-5, 12).

 

서문(1, 1-4)

저자는 자기가 하느님의 아들, 아버지의 말씀을 눈으로 뵙고 말씀을 듣고 손으로 만져본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그분은 '생명의 말씀'이시다. 초자연적이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다. 맨 처음 천지창조 때에 그 말씀은 모든 피조물에게 생명과 존재를 부여하셨다.

  하느님의 아들이 세상에 나타나셨음을 직접 목격했다 라는 이 단호한 주장은 독자로 하여금 서간에 나오는 바를 진지하게 숙고할 자세를 갖고 옷깃을 여미게 만든다.

  서문에는 이 서간의 목적이 뚜렷이 나와 있다. "우리가 아버지와 그리고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사귀는 친교를 여러분도 함께 나눌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1, 3). 이 같은 친교에서만 충만한 기쁨이 오는 까닭이다.

1. 제1부(1, 5-2, 28)

"하느님은 빛이시다"는 말과 그리스도교 신자는 "빛 가운데 살아야 한다"는 주장으로 참다운 신자생활의 기준을 제시한다. 빛 가운데서 산다는 것은 먼저 어둠, 즉 죄를 멀리했다는 뜻이며 인간들이 깨끗이 씻어주시기 위해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해지고 해방된다는 뜻이다(1, 8-2, 2). 둘째로는 계명들,  특히 그리스도교 고유의 사랑의 계명을 지킨다는 뜻이다(2, 3-11). 끝으로 세상에 애착하지 않는다는 뜻이며, 참 신앙을 배척하면서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도 아니고 메시아도 아니라고 말하는 자들을 멀리한다는 뜻이다.

  예수를 배척하여 참 교리를 저버리는 자들을 요한은 "그리스도의 적"(反 그리스도)이라고 일컫는다.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하는 사람은 결코 그분으로부터 신적인 생명을 받지 못한다. 그분은 사람에게 생명을 베푸실 목적으로 사람이 되셨는데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하니 어찌 생명을 얻을 수 있겠는가?

  참다운 신자들은 이 신앙을 순수하게 보전하며 자기가 올바른 길에 들어서 있다는 것을 내심에서 느낀다. 하느님께로부터 기원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을 통해서 자기들에게 진리와 은총을 주시는 그 사슬로 묶어져 있다는 것을 스스로 감지하는 까닭이다. 이 사슬로부터 스스로 빠져나가는 사람들은 돌이킬 수 없이 거짓의 어둠과 영원한 심판을 받게 된다.

2. 제2부(2, 29-4, 6)

그리스도교 생활을 "하느님께로부터 난 사람" 하느님의 자녀가 된 사람의 생활로 제시한다(2, 29-3, 1).

  하느님의 자녀라는 신분이 지금 우리에게는 씨앗처럼 간직되어 있으며 때가 오면 완전히 피어날 것이다. 그때 우리는 하느님께서 계시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 존귀한 품위를 귀중히 여기고 그에 맞추어 살아갈 본분이 있다.

  여기서 요한은 "빛 가운데서 살다"는 말에 병행시켜 "옳은 일을 한다"(정의를 실천하다)는 표현을 쓴다. 옳은 일을 한다는 것은 죄를 멀리한다는 뜻인데, 죄는 무엇보다도 하느님께 대한 막중한 불의(不義)이며 하느님의 권리와 부성애에 대한 침해이다(3, 3-10). 특히 사랑의 실천은 하느님의 참다운 자녀들을 알아보는 확실한 표이다(3, 11-24).

  끝으로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라는 훈계가 나온다. 우리가 여태까지 교회에서 배운 바와 달리 가르치는 사람들, 교회가 명하는 계명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경계하라는 것이다(4, 1-6).

3. 제3부(4, 7-5, 12)

하느님께 관한 가장 아름다운 정의 "하느님은 사랑이시다"(4, 8)가 나오고, 구속사업과 인간들에게 당신 생명을 나누어주심과 인간들에게 마련해 두신 완전한 기쁨을 예로 들어 그분이 사랑이심을 입증한다. 요한은 이 진리를 확신을 갖고 증언한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난 하느님의 사랑을 목격한 증인이다(4, 16).

  하느님의 자녀들은 서로 형제들처럼 사랑하여야 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굳게 믿지 않는 한 진정으로 형제를 사랑하지 못한다. 예수께서는 말씀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신 행실로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다운 그리스도교 사랑이 발전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참다운 신앙 위에서다.

후기(5, 13-21)

"하느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여러분은 영원한 생명을 갖고 있다"(5, 13)는 신자들을 다시 한 번 일깨우고 이 서간에서 전개해 온 사상들을 간추린 것이다. 신약성서 중에서 가장 뜻이 심원하고 참으로 깊은 신앙생활로 체험한 사람이 아니면 깨닫기 어려운 성서가 여기서 끝난다. 우리 각자가 살아가는 그리스도교 생활이 어떠한 것이든 간에 요한의 첫째 편지는 진지한 반성의 자료가 아닐 수 없다. 사도가 제시한 '기준들'을 우리의 신앙생활에 맞추어 볼 때에 과연 그 생활이 빛 속에서 사는 삶이며, 하느님의 자녀다운 것이며 진정 이웃사랑을 간직한 삶일까?

 

요한의 둘째 편지

둘째 편지는 '선택받은 귀부인'에게 쓴 것이다. 요한이 사목하던 소아시아의 어느 교회를 가리키는 말이다. 사랑을 촉구하고 '그리스도의 적들'에 대항해서 참 신앙을 지켜나가도록 훈계한다. 그래서 이 서간의 첫째 편지의 초안으로 보이기도 한다. 사실 많은 학자들은 이 짧은 편지가 요한의 '첫째 편지'보다 먼저 씌어졌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요한의 셋째 편지

셋째 편지는 가이오라는 사람에게 보내진 것으로 사도의 활동에서 빚어진 불상사가 언급되어 있다. 디오드레페라는 인물이 어느 교회(그 교회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의 우두머리가 되려고 사도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했으므로 그것을 해결키 위해 보낸 요한의 사람들마저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요한의 보낸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신자들은 그 교회에서 쫓아내기까지 하였다.

  가이오와 그의 측근들은 요한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사도를 붙잡고 있었다. 그리스도교 사랑과 형제들의 일치가 개인의 야심으로 파괴되고 손상되는데 대해 사도가 극히 상심하는 것을 가이오 일행은 공감하고 있었다. 여기서도 우리는 자기를 높이기 위해서는 야심, 오만,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에 대한 경멸이 불가피하다는 자들에게 내리는 경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요한은 서간들에서 거듭 강조하여 우리 모두가 하느님 앞에 평등 '어린 자녀들'이라고 가르친다. 어떤 특권을 받았더라도 그것이 사랑을 깨뜨리면 하느님 대전에, 예수 그리스도 앞에 죄가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거듭 훈계하신 바가 있기 때문이다. "너희 중에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23, 11; 요한 13,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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