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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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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윤석 [drhur] 쪽지 캡슐

2004-10-13 ㅣ No.64

 동감


아침식사를 하고 레지나 수녀님이 부르셔서 성당에 총원장, 부원장 수녀님과 함께 갔다.

수녀님이 십자고상을 여러개 만드셔서 축성해 달라고 하셔서 .........

나도 하나 갖고 싶었는데

수녀님이 내 마음을 아셨는지 하나 골라 주셨다.

나는 시치미를 떼고 얼른 하나 챙겼다.

그런데 십자가상의 예수님 표정이 고통스러워 하는 것이 아니라

편히 잠을 주무시는 모습같았다.

십가가도 너무나 폭이 넓어서 마치 침대 같아 보였다.

"수녀님 십자가가 침대 같아요! 예수님 표정도 푹 주무시는 것 같기도 하고 ...."

"아차 내가 실수 했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만약에 내가 말씀드린 의도와 다른 작품구상이었다면 어떻하나?

어른에게 농담처럼 들리면 어떻하나?

"네 신부님 그 작품은 부활하신 주님이셔요!"

순간 휴!했다. 동시에 "어떻게 십자가상의 예수님이 부활한 예수님이 되시지?"했다.

우리 성당의 십자가상의 예수님도 부활하신 예수님이셔요!

"어!"

맞았다. 두팔을 힘차게 하늘을 향해 뻦으신 예수님의 모습속에는 이제는 고통의 모습은 없었다.

마치 힘차게 푹자고 기재게 피는 역동성이 있었다.

수녀원에 들어오고 몇일간은 잠이 오지 않았다.
잠자리가 바뀌어서인지 .... 어색했다.

그런데 얼마전서 부터 잘 잔다.

십자가상의 예수님이 어떻게 미리 부활한 예수님을 표현할수 있겠나?라는 생각을 해볼수 있지만 정말 레지나 수녀님의 십자가를 보면 참 평화로움과 안식이 흐름을 느낀다.

3일간 푹 주무신 예수님!

시공간을 초월한 동감과 교감의 대화가 바로 예술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 자체가 예술이라는 생각을 했다.

 

늘 십자가 위의 예수님은 뭐 볼 필요 없이 다 고통에 허덕이는 분!

이라는 조형물이이라는 공식(?)이라는 선입관을 갖던 나를 다시한번 십자가의 고통과 부활의 영광이 단절이기보다  하나됨이라는 진리를 느끼게 해준 십자가 엿다.

 

새교구의 출발과 더불어 앞으로 많은 성당이 지어질 것이다.

 

성당을 지을때 성예술의 측면에서 다양하고 동감할 수 있는 건축 구조와 미술품들 통해 하느님과 교감할수 있는 수준에 이르기 까지 노력하였으면 한다.

 

주임신부가 바뀌면 성당의 구조와 예술품들이 하루 아침에 바뀌고 또 성당을 지을때 획일적인 모습의 조형물만이 있는 듯 보인다.

늘 제단위에는 고통의 십자가만이 있다. 부활을 느끼는 하느님의 따스함을 느낄수 있는 그 어떤것이 부족한 것 같다.

성당을 지을때도 좀 어느 유명 작가에게 너무 전적으로 의지한 나머지 본당의 영성이나 본당신자들이 참여하는 부분이 없다.

성당의 벽에 우리 아이들이 그린 예수님의 얼굴! 노인대학에서 만드신 작품들을 재형상화한 판화나 작품! 하여간 우리의 성당에 우리가 돈을 냈다뿐이지 우리의 손길이나 마음이 들어간 부분은 어디에 있다고 말할수 있을 까?

 

우리 교구의 건축위원회는 (있는 지 잘 모르지만!^^)  성당건축물의 크기를 규제하거나 재정을 검토하는 그런차원에서만이 아닌 새로성당을 짓는 성당의 예술적인 부분을 지원하고 조언할수 있는 넓고도 깊은 역할을 하였으면 한다.

또 주임사제들이 좀더 성미술이나 예술! 그리고 전례공간에 대한 안목과 지식을 얻으려 노력하고 교육의 기회를 교구가 마련해 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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