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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유다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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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03-02-12 ㅣ No.90

 

 

신약 유다의 편지 해제

 

 

-진 토마스,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 신약성서12 야고보서 베드로 전 후서 유다서, 분도출판사, 1987

 

 

 

1. 내용과 목적

인사에 이어(1ㆍ2절) 필자는 집필 동기를 말한다. 즉, 신도들이 하느님과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을 대항해서 맡겨진 믿음을 위해 싸우도록 격려할 목적으로 이 글을 썼다고 한다(3-4절). 이어서 이단자들이 마땅히 벌을 받을 자들이란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구약성서의 예화를 든다(5-7절). 이단자들은 방탕한 생활을 하며 교회, 특히 만찬례의 성스러운 분위기를 더럽히고 있으니, 이들은 에녹이 예언한 대로 결국 멸망할 것이라고 확언한다(8-16절). 그 다음에, 이단자들의 등장을 예고한 사도들의 말씀을 상기시키고(17-19절), 믿음과 사랑, 그리고 구원에 대한 희망을 간직하라고(20-21절) 권유한다. 이어서 이단자들의 죄를 미워하면서도 그들의 구원을 위해 힘쓰라고 말하고(22-23절) 영광송으로 글을 끝맺는다(24-25절).

  이상의 내용으로 미루어, 본서의 목적은 교회 안의 이단자들을 공박하는 한편, 신도들이 이런 이단자들에게 현혹되지 말고 정통신앙을 충실히 지키도록 권고하는데 있다.

 

2. 이단자들

본서의 필자가 공박하는 자들은, 12절에서 "사랑의 만찬"에 참여한다고 했으니 아직 교회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그리스도의 권위를 부인하고 제멋대로 생활하던 이단자들이다. 필자는 그들을 가리켜 "하느님의 은총을 방탕으로 뒤바꾸는"자들이라고 하니(4절), 그들은 은총을 핑계삼아 자유를 남용하는 자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당시 점차 유행하게 된 영지주의(靈知主義, 그노시스주의)의 영향을 받은 자들이 것 같다. 영지주의에는 여러 유파가 있지만, 본서의 필자가 공박하는 자들은 그리스도를 구원자 및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세상의 윤리법칙을 무시하며 욕정 나는 대로 행동해도 좋다고 주장하던 무리로 추측된다. (영지주의에 관해서는 K. H. 셀클레, 신약성서입문, 분도출판사 1976년, 279-280면을 보라.) 묵시 2,6ㆍ14ㆍ15ㆍ20ㆍ21에서 말하는 "니골라오파 사람들"도 그런 영지주의 적 이단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

 

3. 문학적 성격과 수신인

본서는 인사말로 시작되지만 서간 끝에도 따르게 마련인 인사말은 없고 그 대신 전례적 영광송이 있다. 사실 수신인도 구체적으로 지적하지 않고 막연히 "하느님 아버지께 사랑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보호받고 있는 이들에게 쓴다"(1절)고 했다. 그래서 본서를 모든 교회에 보낸 일반 서간으로 알아들을 수도 있지만, 내용에서 이단에 관한 구체적인 문제들을 다루고 있으니, 필자는 자기가 알고있던 몇몇 지역 교회에 자기 견해를 전하려 했다고 볼 수 있다. 학계에서는 본서를 가리켜 흔히 "반 이단적 전단( 單)"이라고 한다.

  필자가 구약성서와 유대교 묵시문학(9-14절) 및 전설(9ㆍ11절)을 많이 원용하고 있기 때문에 흔히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수신인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분명하지 않고, 확실한 것은 필자 자신이 유대계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뿐이다. 왜냐하면 바울로도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역시 구약을 많이 원용했을 뿐 아니라 랍비적 해석방법까지 이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필자가 비난하는 이단자들이 방탕한 생활을 하던 영지주의자들이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이단자들도 그리고 그들의 영향을 받은 신도들도 이방계 그리스도인이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 지리상으로는 팔레스티나 본토 밖의 헬레니즘 문화권에서 살고 있던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4. 필자와 집필 연대

유다서에 대한 첫 증언을 해주는 문헌은 그 내용을 거의 다 옮겨 쓴 베드로 후서이다. 그 후 서기 180년경 로마에서 작성된 무라또리 경전목록에 처음으로 유다서에 대한 말이 나온다. 이 목록에서 유다서는 성경의 한 권으로 간주되고 있고, 또한 2세기말에서 3세기초에 걸쳐 저술활동을 한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와 오리게네스도 이 서간을 성경으로 인정했다. 본서를 성경으로 인정하지 않은 교부들도 더러 있었지만, 대체로 3세기부터는 대부분의 교회가 유다서를 성경으로 받아들였다. 그 때까지 성경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까닭은 유다서가 위경인 에녹서를 인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1절에서 자신을 "야고보의 동기 유다"로 소개하고 있다. 신약성서 안에 예수의 형제로서 야고보와 유다(마르 6,3; 마태 13,55)외에는 같은 이름의 형제들이 나오지 않는 사실로 미루어, 필자는 자신을 주님의 형제로 소개하려고 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미 마르틴 루터가 유다서의 친서성을 부인한 바 있거니와, 오늘날 신약학계에서는 유다서를 가명작품으로 본다. 그 이유는, 첫째로 주님의 형제들이 생존하고 있었을 때 이런 "전단"같은 회람서한이 씌어질 수 있었을까 하는 점, 또한 "성도들에게 오직 한 번 맡겨진 믿음"(3절, 20절 참조)이라든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예고한 말씀들"(17절)같은 표현을 사용할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이 의문으로 남기 때문이다. 사실 본서의 필자는 오래 전의 일에 언급하고 있을 뿐 아니라, "오직 한 번 맡겨진 믿음"에 큰 비중을 두고있는 점으로 미루어, 그는 예수를 직접 목격했던 사람이 아니다. 아마 후대 교회의 열심한 신자로서 이미 교회의 유산이 된 믿음을 옹호하려고 본서를 썼을 것으로 짐작된다. 에우세비오스의 교회사(Ⅲ, 20,1 이하)에 의하면,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치세 말기(95년)에 주님의 형제 유다의 두 손자가 다윗의 후손이라는 혐의로 황제 자신의 신문을 받았다고 한다. 유다의 이름이 그렇게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필자는 그 이름을 이용하였는지도 모른다.

  집필 연대에 대해서도 역시 뚜렷한 논거를 찾을 수 없다. 베드로 후서가 유다서를 인용하고 있으니, 전자보다 먼저 씌어졌을 것이고 또 서간에서 말하는 이단자들이 묵시록 2장에서 말하는 니골라오파 사람들과 비슷한 점등을 고려하여 1세기 말경으로 추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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