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강론

연중 제21주일(가해) 마태 16,13-20; ’23/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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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23-08-12 ㅣ No.5492

연중 제21주일(가해) 마태 16,13-20; ’23/08/27

 

 

언젠가 한 젊은이가 왔습니다. 두 시간에 걸쳐 자기가 지금 처한 상황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는 어떻게 하면 도와줄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누군가 도와줄 사람은 없겠는가 여겨 혹시 대부나 주변에 결혼과 부부생활에 대해 조언을 듣고 또 중재를 청할 사람은 없겠는지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렇지 않아도 제가 근처 어르신들에게 믿거라 하고 고민을 털어놓았는데, 그 다음 날 제가 믿고 청한 사람들이 한결같이 저를 걱정해주고 도와주기는 고사하고, 제 이야기를 술안주 삼아 떠들어 대고 있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우울해집니다. 우리를 찾아온 사람들에게, 우리에게 도움을 청하는 이들에게 적절한 도움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실망만 안고 떠나가야 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아쉬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에게 도움을 청하는 이들뿐만 아니라, 따지고 보면 우리 집안에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많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꼭 문제라고까지 할 수는 없어도, 너나 할 것 없이 누구든지 아쉬움에 처할 때가 있었고, 생각지 않은 갈등과 오해 속에서 고민하고 방황할 때도 있었고, 예기치 않은 일로 고생하기도 했습니다. 부부간의 갈등과 싸움, 실수와 과오로 인한 사고와 범죄, 실직과 부도, 성격이나 정신의 병적인 장애, 질병이나 알코올과 마약 또는 도박 등의 중독 등.

 

이런 어려움은 나에게도 너에게도 사전 예고나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갑자기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 교회라는 공동체가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마태 16,15) 그러자 제자 중의 시몬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16)

 

이 말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됩니다. 베드로는 이 말을 통해 예수님께서 자기와 함께, 자기 삶 속에 살아 계신다고 고백합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기쁘고 행복할 때, 주님께서도 자기와 함께 기뻐해 주시고 행복해해 주심을 압니다. 그리고 힘들고 어려울 때 함께 짐을 나누어 짊어져 주시고, 함께 슬퍼해 주시고, 힘을 주고 계신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고, 또 그래서 베드로는 주님을 믿고 의지하고 따라갑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믿고 의지하면서 따라간다고 해서,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현실에서 장밋빛 미래를 펼쳐주시지는 않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믿고 의지하면서 따라간다고 해서, 베드로가 주님만을 향해, 실수나 잘못도 없이 곧게 나아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다 압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로서 어리석은 짓도 많이 하고,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기도 했고, 다른 제자들보다 훌륭한 것만도 아니었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을 배반까지 했지만, 다시 회개하고 돌아와, 주님과 주님의 교회를 위해 일하다가, 결국 주님의 뒤를 따라 십자가에 거꾸로 못박혀 죽었고, 하늘에 올라 주님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오늘도 우리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그럼,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예수님께서 우리 인생에 무엇을 가져다 주셨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 인생에 언제, 어떻게 함께해 주셨습니까?

그리고 이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의 모임인 이 교회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교회가 우리에게 무엇을 줍니까?

우리는 이 교회에 무엇을 기대합니까?

그런데 그렇다면, 과연 누가 교회입니까?

주님을 믿고 따름으로써, 여기 이렇게 주님께 찬미와 영광을 돌려드리기 위해 모인 우리가 교회가 아닙니까?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기대합니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아차리고 고백한 것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17) 우리는 예수님을 잘 알고, 예수님을 믿어서 교회를 찾아온 사람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주어야 할지, 그 즉시에는 잘 모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마음을 모아 주님께 믿고 청하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일러주십니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18-19)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가 주님께,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고 청할 때, 주님께서는 짓궂으시게도, 그때 그때, 바로 바로 알려주시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마치 주님께서 우리 교회가 실패를 통해서 깨우치도록 하시기라도 하시는 듯이, 뒤늦게 깨우치고 회개하여 제 자리를 찾도록 해주십니다. 그런 면에서, 어쩌면, 교회에 나오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그리스도처럼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주님께서 주님의 뜻을 정확히 알려주시지 않을 때, 교회는 실패도 하고 흔들리기도 하고 혼란스러운 상황속에 헤매기도 합니다. 그런 교회와 세상의 관계라는 특성의 연장선 안에서, 교회는 어떤 한 사람을 대신해 줄 수도 없고, 사회의 문제들을 쉽게 해결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죄악 앞에서, 우리 인간과 함께 수난하시고, 우리 인간의 죄악으로 인한 벌을 대신 짊어지시고 돌아가신 주님을 꾸준히 믿고, 주님의 가르침을 때로는 유혹에 빠지고 실패를 겪으면서도 따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주님을 찾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묻고 또 물어, 변화하며 복잡하고 이해관계에 가득 찬 이 세상 안에서, 주님을 따르는 교회로서 제자리를 찾고자 합니다. 그렇게 하여 주님께서 우리 지상 교회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다 실현하려고 노력합니다.

 

오늘 사도 성 바오로는 우리 교회의 이러 복잡하고 어려운 사랑을 드러냅니다. “!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정녕 깊습니다. 그분의 판단은 얼마나 헤아리기 어렵고 그분의 길은 얼마나 알아내기 어렵습니까? “누가 주님의 생각을 안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누가 그분의 조언자가 된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누가 그분께 무엇을 드린 적이 있어 그분의 보답을 받을 일이 있겠습니까?” 과연 만물이 그분에게서 나와,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그분께 영원토록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로마 11,33-36)

 

오늘의 세상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교회인 우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확연히 훌륭해서가 아니라, 다른 어느 누구보다도 주님의 뜻을 매 순간 정확히 다 알고 있어서가 아니라, 세상의 문제들을 주님의 힘으로 그 즉시 다 이룰 수 있어서가 아니라, 주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 공동체인 교회로서, 지금까지 우리 인생에서 나 개인에게 그리고 세상의 역사 안에서 교회에게 베풀어주신 주님 은총의 신비를 드러내고 증언하며 교회를 이룹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겪고 있는 어려움과 우리를 찾아와 고민을 털어놓는 이들에게 교회의 이름으로 그 어려운 하소연을 들어주고, 어려움을 감싸 안아주고, 가정과 사회의 짐을 함께 짊어지고, 주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주님의 도우심을 찾으며 함께 기도하고 함께 갈구하면서, 성령의 이끄심과 도우심으로, 주님과 함께 주님의 뜻을 이루어 나갑니다. 이렇게 어리석고 죄많은 우리를 통해서, 주님의 뜻을 이루시고자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께, 찬미와 영광을 돌려드립니다. 아멘.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5,19)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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