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예식과 연도-old

천주교 장례예식의 변천과 교회의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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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윤석 [drhur] 쪽지 캡슐

2002-09-28 ㅣ No.4

3. 천주교 장례예식의 변천과 교회의 가르침

 

 로마 라틴 교회의 장례 예식은 죽은 자에게 성수를 뿌리고 향을 드리고 흙은 떠서 무덤에 넣음으로서 끝났다. 죽은 자를 위한 청원기도는 초창기 그리스도교에서도 시행되었다. 4세기 이후부터 청원기도가 미사에 삽입되었고, 7세기경에 위령미사에 고유한 텍스트를 갖고 시행되었다. 위령미사는 옛 로마와 희랍 문화권의 풍습에서 죽은 자의 장례날이나 기념일에 사제 밥상 또는 위안상을 차려 놓으며 죽은 자를 위한 빈 자리를 마련해 놓고 시행되었다. 현재 본당에서 추석 합동미사때 제단앞에 추석상을 차려놓은 것과 같다. 조상을 기리는 음식을 차리는 문화는 이미 로마교회의 토착화된 제례예식으로서 시작된 것이다.

 위령미사가 처음엔 장례일에 거행된 것이 아니라, 위령 기념일인 죽은후 3일 7일 30일에 거행되었다. 후에 이를 교회적 의미를 부여하여 받아들였다.

예) 3일- 예수 부활, 7일 - 야곱의 성조에 대한 7일 동안 슬퍼함 등

이후 장례일에 장례미사를 지냈고, 장례미사가 장례식의 중심이 되었다. 미사 끝에 로마예식은 사도예절이라고 하여 성대한 기도를 하였다.

12세기 이후에 각 지역 풍습이 가미되어 과도하게 비대하여졌다.

16세기 에 걸쳐 기쁨의 성격을 띄는 어린이들을 위한 고유한 장례미사 예식이 생겨났다.

그후 트리덴틴 공의회의 전례쇄신과 통일화의 일환으로 1614년에 출간된 로마예식서는 복잡화된 예식을 간소화시켜 본래의 윤곽에로 거의 복귀시켰다.

1742년 7. 11 교황 베네딕또 14세의 회칙발표로 중국의 상제례 예식이 금지된다.

중국에 들어온 예수회, 프란치스코회, 도미니꼬회 등의 중국의 상제례 논쟁이 심화되어 우리나라도 상제례 금지로 인한 박해의 원인 제공 및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1936년 5. 26 포교성성은 일본이 제출한 천황숭배, 신사참배 등을 그 나라의 풍습의 차원으로 받아들임으로써 1742년 금지되었던 일부가 해제되었다.

1939년 12. 8 신앙 포교성성은 중국이 제시한 공자의 화상(畵像)이나 위패에 대한 존경, 시신이나 죽은 사람의 사진 앞에서 절을 하거나 경의 등 예의표시를 그 나라 풍습으로 받아들임으로써 1742년의 금지령의 일부를 해제시켰다.

 1966년 초안을 작성 여러 민족과 지방의 실험을 거쳐 1969, 8. 15 경신성성은 표본적 장례예식서를 최종적으로 공포하였다. "신자들의 장례식을 거행함에 있어서 교회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강조하기에 힘써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은이들에 대한 그 시대와 그 지역 사람들의 정신과 풍습을 무시해서는 안되겠다. 그러므로 가문의 전통이나 지역적 풍습이나 장례위원회등에서 좋은 점이 있다면 다 받아들이도록 하고 혹 복음정신에 위배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장례에 있어서는 빠스카 신비에 대한 신앙과 복음의 정신을 표현할 수 있도록 그것을 변경시키도록 노력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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