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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야고보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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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03-02-12 ㅣ No.87

 

 

신약 야고보의 편지 해제

 

 

-진 토마스,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 신약성서12 야고보서 베드로 전 후서 유다서, 분도출판사, 1987

 

 

 

1. 문학적 성격

1) 문학유형

본서는 외관상 편지 같지만, 1,1의 인사말 외에는 서간다운 특징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본문 안에 구체적인 소식을 전하는 말이 한마디도 없고, 끝을 마무리하는 인사말도 없다. 따라서 본서의 문학 유형을 이해하려면 모든 선입견을 배제하고 그 내용만 살펴야 한다. 본서의 내용은 신앙생활에 관한 훈계다. 1,2부터 마지막 대문까지 이 훈계에 속하지 않는 구절은 하나도 없다. 다시 말해서, 이 소책자에는 사도행전 같은 보고도 없고, 바울로의 서간 같은 신학적 고찰도 없다. 비록 신학적 고찰이 약간 있다 하더라도(예컨대 2,14-26)그것은 순전히 훈계를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본서를 설교집이나 교훈서로서 특징지을 수 있을 것 같다.

 

2) 구성

이와 같이 본서는 내용상으로는 놀라운 일관성을 보여 주고 있으나, 구성상으로는 연결성이 없음을 첫눈에 알아볼 수 있다. 논문, 보도, 소설 같은 글들에 친숙한 현대의 독자는 의아스러운 느낌이들 정도로 단절된 토막 구절들을 나열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의도적으로 문단을 조리 있게 연결시켜 나간 일정한 구조를 발견 할 수 없다.

  그러나 이렇게 일정한 순서 없이 훈계 구절들을 나열하는 것이 그 당시 교훈문학(그리이스어로 "바라이네시스")의 특색이었다. 본서는 주제가 서로 다른 명제들을 나열하기도 하고, 때로는 서로 비슷한 단절어(토막 구절)를 연결하기도 한다. 신약성서 가운데는 바울로의 편지와(예컨대 1데살 4,1-12; 로마 12-13장; 히브 13장) 복음서에(예컨대 마태 6,19-7,27; 루가 6,27-49) 그런 부분이 있으며, 특히 구약의 지혜문학 가운데 이와 같은 문학유형이 자주 나온다. 그 중에서도 집회서는 내용상으로 야고보서와 유사한 점들이 많다.

  순서가 없다는 것은 되는대로 아무렇게나 썼다는 뜻이 아니다. 우선 필자가 사료를 사용했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필자는 전승된 사료 내용의 순서를 그대로 따른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리고 한 주제에서 다른 주제로 넘어갈 때 흔히 양쪽에 나오는 공통적인 낱말을"연쇄어"(連鎖語)로 삼아 문장을 연결한 경우도 많다. 그 예로서 1,4-5의 "부족함"; 1,12-13의 "시련-유혹"(그리이스어로는 같은 난말); 2,12-13의 "심판"; 3,17-18의 "열매"; 5,9-12의 "심판-단죄"(그리이스어로는 같은 낱말)등을 들 수 있다. 이 밖에 가끔 같은 주제의 구절들을 한자리에 모은 경우도 있다(예컨대 1,2-4의 인내; 1,9-11의 가난한 자와 부자: 1,21-25의 말씀의 실천; 5,1-6의 부자에 대한 경고).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본서 중심부분에서 세 가지 주제를 비교적 장황하게 거론하고 있는 점이다. 세 가지 주제는 1) 부자와 가난한 자의 차별 문제(2,1-13),  2) 믿음과 실천의 문제(2,14-26),  3) 말실수에 관한 경고(3,1-13)등이다. 필자는 이상의 문제들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고, 문체상으로도 이 부분은 특이하다. 단지 명제들을 나열한 것이 아니라, 교훈과 토론과 명령을 뒤섞은 대인논법(對人論法, 디아트리베)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야고보서는 편지라기보다 세 가지의 짧은 설교와(2,1-3,13) 많은 단절어의 집성문으로 구성된 교훈서이다.

 

3) 문체

야고보서는 세련된 그리이스어로 씌어져 있다. 필자는 다양한 수사학적 방법을 능숙하게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어의 영향을 받아 그리이스어의 문체와 잘 어울리지 않는 표현도 있다.

그 원인은 필자의 그리이스어 문장력이 미숙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이용한 구약성서와 유대계 전승사료의 영향을 받은 데 있을 것이다. 짤막한 문장에 직설적 표현을 구사하고, 많은 비유와 명령법(108절 가운데 54절!)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본서의 중요한 특색이다. 이로 미루어 필자가 정열적이고 분명한 결단을 요구하는 설교자임을 알 수 있다.

 

2. 필자 문제와 정경성(正 性)

본서의 필자는 "하느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라고 자기 소개를 하고 있다(1,1).

1) 세 명의 야고보

신약성서에는 "작은 야고보"(마르 15,40)를 제외하고도 야고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세 명이나 등장하는데 그 중에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열두 제자 단에 속한다. 그리고 예수와 동기간인 야고보가 있다(마르 6,3; 갈라 1,19). 사도행전과 갈라디아서를 보면 예수와 동기간인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로 등장한다(갈라 1,19; 2,9-12; 사도 12,17; 15,13; 21,18). 교회 전통에서는 이 야고보를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동일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예수와 동기간인 야고보는 제자 또는 사도로 보기 어렵다. 그 이유는  1)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의 형제들은 예수 생전에 그분을 믿지 않았고(마르 3,21ㆍ31; 요한 7,5),  2) 신약성서에서는 제자 및 사도들과 예수의 형제들을 언제나 구별하고 있기 때문이다(사도 1,13-14; 1고린 9,5; 15,5-8).

  세 명의 야고보 가운데 우선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는 본서의 필자일 수 없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그는 이미 44년경에 헤로데 아그리빠의 명령으로 처형되었다(사도 12,2). 그런데 본서는 50-60년대에 활약한 바울로의 신학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2,14-26 참조). 그리고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역시 본서의 필자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인사말 가운데 사도라는 명칭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의 동기 야고보가 본서를 집필했을 가능성만 남는다.

 

2) 야고보서의 친서 가능성

본서의 내용에도 앞의 견해를 뒷받침해 주는 점들이 있다. 필자는 바울로의 신학 혹은 적어도 그 신학의 일방적인 해석을 반대한다(2,14-26). 갈라 2,11-13을 보면 율법을 지키는 문제에 있어서 야고보는 바울로와 다른 입장을 취했다(사도 15,13-21; 21,17-25참조). 바울로가 율법에 대한 완전한 자유를 주장한 것과는 달리 야고보는 율법을 열심히 지킴으로써 유대인들에게 존경을 받았던 것이다. 본서에서는 율법의 중요한 관례들(할례, 안식일, 음식 가림 등)을 지키라는 말은 하지 않지만, 전체 분위기를 보면 유대교적 전통을 벗어나지 않고 있다.

  한편 현대 성서학자들 중에는 야고보 아닌 어느 성명 미상의 필자가 본서를 썼다고 보는 사람도 많다. 다시 말해서, 후대의 어떤 사람이 자기 작품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예수의 동기인 야고보의 이름을 도용했다는 것이다. (가명작품 혹은 위 서에 관해서는 200주년 신약성서, 사목서간 해제, 16면을 보라.) 그들이 내세우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본서는 상당히 세련된 그리이스어로 씌어져 있다. 그런데 갈릴래아에서 자라난 유대인 야고보가 과연 이 만큼 능숙하게 그리이스어를 구사할 수 있었는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야고보가 본디 아람어로 쓴 것을 다른 사람이 그리이스어로 번역했다고 가정하더라도 이처럼 부드러운 문장이 나오기는 어렵다. 그리고 필자가 70인역 그리이스어 구약성서를 사용한 사실도 고려해야 한다.

  (2) 디벨리우스 같은 학자들은 본서의 내용 자체도 갈라디아서나 사도행전 등 초대교회의 문헌에 보이는 야고보의 사상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예루살렘의 야고보는 모세의 율법을 열심히 지켰다고 하지만, 본서의 필자는 율법 문제에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예수를 믿게 된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아야 하느냐, 또한 예수를 믿는 유대인들이 계속 모든 율법 규정을 지켜야 하느냐 등의 문제가 교회에서 이미 논란의 대상이 되지 않은 시대, 그러니까 바울로보다 훨씬 후대에 본서를 집필했다는 것이다.

  또 한편 어떤 학자들은 본서를 야고보와 연관시키기 위해, 후대의 필자가 야고보의 말들을 수록한 전승을 사용했다고 추론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공관 복음서의 저자들이 예수의 어록을 사용한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본서의 필자 문제는 명확하게 해결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우리가 예수와 동기간인 야고보에 관해 정작 아는 바가 적으니, 그가 본서를 집필했다고 단정할 수도 없고, 집필하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도 없는 것이다. 막연히, 그리이스어에 능통한 어느 유대계 그리스도인이 집필했다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겠다.

  어쨌든 필자 문제는 본서를 이해하는데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이 "편지"가 성령의 영감에 의하여 엮어진 초대교회의 귀중한 문헌이라는 사실이다.

 

3) 정경성(正 性)

야고보서는 비교적 늦게 성서 정경에 수록되었다. 이것은 초대교회에서 본서를 사도 혹은 예수와 동기간인 야고보의 친서로 보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야고보서는 2세기말에 작성된 무라또리 경전목록에도 없다. 3세기초에 오리게네스가 처음으로 본서를 성서로서 언급한 일이 있으나, 4세기까지도 정경으로 간주하지 않은 교부들이 있었다. 그러나 4세기 말경에는 온 교회가 야고보서를 신약성서의 한 경서로 인정했다. 그러다가 16세기에 와서 마르틴 루터가 다시 야고보서의 필자에 관해 이의를 제기하고 신랄히 비판했다. 그 까닭인즉, 루터가 일방적으로 추종한 바울로 신학에 비해서 야고보서는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담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믿음보다 선행을 너무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야고보서를 아예 배제한 것은 아니었다. 오늘날 개신교의 모든 종파에서도 본서를 정경목록에 넣고 있다.

 

3. 집필 배경

1) 수신인

1,1에 의하면, 본서는 야고보가 "흩어져 사는 열두 지파에게" 보낸 편지이다. 그러므로 본서는 어느 특정의 개인이나 집단에 보낸 편지라기보다 일종의 공한 혹은 회람문서라 할 수 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문학 유형 상으로는 본서를 편지로 볼 수 없다. 따라서 수신인의 문제도 퍽 막연하다. 본디 "열두 지파"라는 말은 이스라엘 민족을 가리키고 "흩어져 산다"(그리이스어로 "디아스포라")는 말은 팔레스티나 본토를 떠나 해외에서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초창기 교회는 참된 새 이스라엘로 자처하였으니(갈라 3,7-9; 6,16 참조), 야고보가 염두에 둔 독자는 세속을 초월하여 영적 나그네 생활을 하는 현세의 모든 그리스도인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본서의 내용을 보면 아무래도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회람문서 같다. 왜냐하면 이방인들의 과거 생활을 암시하는 말도 없고, 이방인들이 빠지기 쉬운 우상숭배에 관한 경고도 없기 때문이다. 뒤에 집필 동기를 살피는 항에서 본서의 수신인들에 관하여 좀더 구체적으로 밝히기로 한다.

  현대의 독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자처하는 필자가 왜 이렇게 유대교적 분위기를 풍기는 글을 썼는지 궁금할 것이다. 1,1을 제외하고는 오직 한 번 2,1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에 관한 말도 없고, 그 외에 그리스도인만이 사용하는 표현도 아주 드물다. 그래서, 야고보서는 본래 유대교의 저술이었는데 어떤 그리스도인이 1,1; 2,1에 예수의 이름을 덧붙여 그리스도교의 저술로 만들었다는 학설도 나왔던 것이다. 그러나 비록 본서를 위 서로 보더라도 처음부터 그리스도교의 저술이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2,14-26은 그리스도인이 본서를 썼다는 증거가 된다. 왜냐하면 이 대목은 바울로 사도가 다룬 믿음과 행업의 문제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그리스도교의 주요 교리에 관한 말이 의아스러울 만큼 빈약하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그 이유는 우선 문학유형에 의거해서 설명할 수 있다. 윤리적 훈계란 본질적으로 보편적이고 초교파적인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어떤 학자들은 야고보가 해외 유대계 그리스도인들뿐 아니라 일반 유대교인들도 독자로 생각했을 것이라고 본다. 다시 말해서, 필자는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공통점을 내세움으로써 유대교인들 가운데 특히 가난한 사람들의 환심을 사서 그들을 교회로 인도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 공통점으로는 윤리도덕을 위한 열성, 청빈의 이상화, 종말을 그리는 고대, 구약에서 계시된 유일신에 대한 믿음 등을 들 수 있다.

 

2) 집필 연대와 장소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예수의 동기 야고보는 서기 62년에 당시의 대제관의 명령으로 처형되었다. 그를 야고보서의 필자로 본다면, 본서는 62년 이전에 집필되었을 것이다. 한편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본서는 분명히 바울로의 활동과 가르침을 전제하고 있다. 로마 3,28의 "실상 우리는 사람이 율법의 행업과는 상관없이 신앙으로 의롭게 된다고 판단합니다"와 본서 2,24의 "사람은 행함으로 의롭게 되지 믿음만으로는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행업"과 "행함"의 그리이스 원어는 같음)를 비교해 보면 그런 전제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바울로가 그런 주장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 당시 종교계에서 야고보서와 같은 식으로 문제를 제기하지는 않았겠기 때문이다. 유대교에서는 본시 행업과 신앙을 대립시킨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야고보가 바울로의 편지를 알고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가 바울로의 저술을 알고 있었다면 자기 글에 바울로의 말을 정확하게 인용했을 것이다. 본서에서 야고보가 논박하고 있는 견해는 바울로의 견해가 아니라, 그 바울로의 가르침을 왜곡하여 일방적인 해석을 하고 있던 사람들, 곧 사이비 바울로파의 견해이다. 그들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바울로의 가르침을 빙자하여, 아예 선행이 필요 없다고까지 주장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사실 바울로 자신도 "그래서, 우리가 모독당하고 있듯이, 그리고 어떤 자들이 우리가 그런 말을 한다고 헐뜯고 있듯이, 우리는 과연 선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악이라도 행하자는 것입니까? 이런 자들은 심판을 받아 마땅합니다"(로마 3,8; 6,1 참조)라고 하면서 자기 사상의 왜곡을 강력히 반박한 바 있다. 그러므로 본서의 논지(論旨)는 바울로의 가르침 자체를 직접 반대한다고 불수는 없고, 다만 바울로와 관련해서 일어난 논쟁을 전제로 하여 선행을 무시하는 자들을 공박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본서를 예수의 동기 야고보가 집필했다고 보는 학자들은 그 집필 연대를 60년 전후로 추정한다. 그리고 본서를 가명작품으로 보는 학자들은 연대를 80년 후로 내려 잡는다.

  본서를 야고보의 친서로 본다면, 집필 장소는 예루살렘이다.

 

3) 집필 동기

훈계의 내용이 너무 일반적이고 다양해서 본서의 집필 동기를 정확하게 밝히기는 어렵다. 그러나 자세히 읽어보면 본서의 내용에는 주목할 만한 점이 몇 가지 있다.

  첫째로, 야고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교회의 신자들간에 빈부의 격차가 심했던 것 같다. 교회 안에는 가난한 사람들도 있었고(1,9; 2,5-7), 장사를 하여 부자가 된 사람들도 있었는데(4,13-5,6), 그 생활수준에 따라 사람들을 차별해서 대우하는 풍조가 생긴 것이다(2,1-4). 이런 상황에서 신자들이 사회의 세속적 가치관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일 위험이 컸으므로, 야고보는 신자들의 경각심을 일깨워 주며 순수한 신앙심과 겸손한 몸가짐을 강조한다(1,27; 3,13-18; 4,4-10) .

  둘째로, 야고보는 관념적 신앙생활을 경계하고 실천을 강력히 요구한다. 아마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이 바울로의 신학을 남용한 사례가 있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했을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마치 새로운 철학처럼 이해하여 영지주의자(靈知主義者)들과 비슷한 입장을 취하고 실천을 무시했던 것이다. 신앙만으로 의롭게 된다는 핑계로 선행을 소홀히 하는 그들을 반박하기 위해 야고보는 2,14-26의 설교에서 행함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그밖에 몇 군데서도 말씀의 실천을 당부하고 있다(1,22-25ㆍ27; 3,13).

  셋째로, 야고보가 신자들 상호간의 화목에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 그가 훈계를 주고자 하는 교회들 안에서 다소의 파쟁이 생겼던 것 같다. 이 파쟁은 앞에서 말한 빈부의 격차와도 관련이 있었을 것이고(4,1-2), 또 신앙에 관한 쓸데없는 논쟁과도 연 관이 있었을 것이다(3,1ㆍ13-18). 어쨌든 야고보는 수다스러운 농 설과 남을 가르치려는 교만과 지혜의 자랑을 경고하고 있다.

  이상 몇 가지 점으로 미루어, 본서의 목적은 세속생활의 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이념에만 정신이 팔릴 위험이 있는 몇몇 지방 교회의 신자들에게 하느님의 뜻에 맞는 신앙생활을 가르치려는데 있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 대상은 시리아와 그 주변의 유대계 그리스도 교회가 아닐까 생각한다. 야고보가 제안하여 작성했다는 예루살렘 사도회의 결의문도 그쪽 교회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참고해야 할 것이다(사도 15,23).

 

4. 내 용

1) 청빈사상

야고보는 세 번이나 가난한 사람들을 옹호하면서 부자들을 공박한다(1,9-11; 2,5-12; 5,1-6). 그리고 가난한 이들에게 각별히 따뜻한 관심을 보여 주고 있다(2,2-4와 2,15-16의 실례와 1,27의 훈계). 그밖에, 현세생활의 어려움을 참고 견디며 종말을 기다리라는 권고도(1,2-4ㆍ12; 5,7-11) 가난한 사람들에게 걸 맞는 말이라 하겠다. 이와 같이 야고보는 무엇보다 먼저 어려운 처지에 있는 약한 사람들을 생각한다. 반면에 그는 부귀를 혐오하고 대단히 위험한 것으로 본다. 이러한 사상은 이미 구약에서 두드러지게 부각된바 있고, 예수의 가르침 가운데도 강렬하게 드러나고 있다.

  구약성서에 의하면, 하느님은 땅의 주인으로서 모든 사람이 골고루 땅의 재물을 이용하기를 바라시는 지극히 공평한 분이시다. 그래서 모세 오경에는 소유의 균형을 유지하고(예컨대 레위 25,8-55; 신명 15,1-18), 가난하고 약한 동포들을 보호하려는(예컨대 출애 21,20-26; 레위 19,9-10ㆍ13; 신명 23,20-21ㆍ25-26; 24,10-15ㆍ17-22)법률이 많다. 한편 유목민의 가축이 늘어나는 것도 하느님의 축복으로 간주되었다(창세 24,35; 32,11; 33,11; 욥 1,1-3; 42,12등). 이에 반해 정착민들간의 경제적 불균형은 바로 죄악의 결과로 여겨졌다. 예언자들이 줄기차게 고발하고 규탄한 두 가지 죄악은 우상숭배와 이런 사회ㆍ경제적 불의였다. 그것은 가난한 이들의 보호자이신 야훼를 모독하는 중대한 범죄였기 때문이다. 유배시대 이후 구약 말기에 이스라엘의 권력층이 가끔 이방인 지배자들과 결탁하여 순수한 유대교 정신을 저버리게 되자, 가난한 사람들은 스스로 참된 선민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모든 희망을 하느님께 걸었다. 다시 말해서 "야훼의 가난한 이들"은 어려움을 참고 견디면서 자기들에게 해방의 기쁨을 안겨 줄 하느님의 심판을 고대했던 것이다. 그래서 가난하다는 것은 곧 온순하고 겸손하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이런 청빈 사상은 시편에 두드러지게 표백되어 있다(시편 9,13-19; 10〔9〕,2-18; 37〔36〕; 49〔48〕; 73〔72〕등). 예수는 바로 이런 사조를 더욱 승화시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하느님 나라의 상속을 약속하였다(마태 5,3=루가 6,20b; 마태 11,5=루가 7,22; 루가 4,18; 12,33). 반면에 그분은 재물에 대한 욕심을 경고하고(마르 10,23-25; 마태 6,19-21ㆍ24-34=루가 12,22-34; 16,13),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적극적인 도움을 요구한다(루가 10,25-37; 16,9ㆍ19-31등).

  야고보의  청빈 사상을 이런 예수의 사상 및 입장과 비교해 보면 아주 비슷하다. 양자가 다 가난한 이들을 천국의 상속자로 보며, 그들의 현재의 낮춤을 장래의 들어 높임에 이르는 길로 본다. 그리고 양자가 똑같이 탐욕스러운 부자의 멸망을 예고하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웃에게 구체적인 도움을 베풀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다만, 실례를 들고 대인논법을 구사하고 있는 야고보의 훈계에 비하여, 예수의 가르침은 좀더 부드럽고 부자도 포함한 하느님의 보편적인 사랑을 한결 뚜렷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야고보는 이와 달리 모든 부자들을 통틀어, 가난하고 악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죄인으로 간주하는 듯한 인상을 풍긴다. 그 이유는 야고보가 구약의 전통적 청빈 사상에 입각하여 교회 내의 우려할 만한 현상에 대해 강력한 충고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데 있을 것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서인석 지음,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 분도 출판사, 1979년 참조.)

 

2) 실천주의

본서가 복음서 또는 바울로나 요한의 서간처럼 우리에게 별로 큰 감동을 주지 않는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1,2에"기뻐하라"는 말이 있지만, 본문 자체는 기쁜 소식의 새로움 같은 것을 느낄 수 없다. 그 까닭은 본서의 목적과 문학유형에 있다. 사실 복음서나 바울로의 서간에서 그 윤리적 훈계만 발췌한다면, 야고보서의 내용과 별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야고보는 복음선포와 기본적인 교리교수를 주지의 사실로 전제하고, 신도들이 이미 배우고 익힌 신앙에 상응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는 점만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가장 혐오하는 것은 관념적인 신자생활이다(2,14-26). 그래서 그는 말만 하고 행동이 따르지 않는 신앙태도를 경고하고(1,19-25; 3,13 등), 또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는데에 신중을 기할 것을 요구한다(1,26; 3,1-12; 4,11-12). 야고보가 강조하는 행동은 무엇보다도 먼저 가난한 이웃을 돕는 구체적인 배려이다(1,27; 2,15-16ㆍ25).이점에 있어서도 그는 구약에서 사회 정의를 부르짖은 예언자들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

  행함을 중요시한 야고보의 실천주의는, 신앙으로 의롭게 된다고 주장한 바울로의 가르침과 결코 상반되는 것은 아니다. 2,14-26에서 그런 인상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야고보와 바울로가 각기 반박하고 있는 오류들이 서로 다르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바울로는 유대인들을 상대로 인간이 율법 준수로 하느님의 구원을 사들일(買入)수 없다는 진리를 증명하려고 한 반면에, 야고보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지 않는 신앙은 쓸데없는 사이비 신앙이라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신앙의 실천을 요구하는 점에서는 야고보와 바울로 양자가 완전히 일치한다(로마 2,6-13; 6장; 갈라 5,6등 참조). 이론과 인식에 치우치기 쉬운 헬라인들에 비해 유대인들은 언제나 신앙을 하느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와 하느님의 뜻에 대한 순종으로 이해해 왔다. 현대인들은 정통 신앙에 관한 논쟁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교파로 갈라지는 비극을 보아 왔기 때문에 교리의 순수성 주장에 회의를 느끼기 쉽다. 그래서 오늘의 신학자들은 진정한 신앙〔正信〕보다 진정한 행동〔正行〕을 종교의 시금석으로 보려고 한다. 이런 견해는 야고보의 사상이나 또한 산상설교에 드러난 예수의 사상과도 일치하는 것 같다.

 

3) 예수의 가르침과 야고보

야고보서의 분위기는 복음서의 분위기와 아주 다르지만, 그 가르침은 예수의 가르침과 일치한다. 가난한 이들의 행복과 실천적 신앙 생활을 역설하고 자상하게 훈계하는 구절마다 공관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말씀을 상기시킨다. 무스네르에 의하면, 야고보서와 복음서의 내용이 병행되는 대목은 27군데나 되는데, 그 대부분이 산상설교에 들어 있는 내용들이다. 그러나 직접 인용한 대목은 없으니, 야고보가 복음서를 입수하여 읽었다고 볼 수는 없다. 아마 그는 복음서의 전승과 비슷하게, 예수의 윤리적 교훈들을 수록한 어떤 전승을 이용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앞에서 말한 청빈 사상과 실천주의 외에도, 예수의 가르침을 상기시키는 다음 몇 가지 점을 지적할 수 있다.

  - 세말을 고대할 것과(1,12; 5,7-9) 거기에 요구되는 인내심(1,2-4ㆍ12; 5,7-11).

  - 온순함과 화목과 겸손함(3,13-4,2ㆍ6ㆍ10).

  - 맹세의 금지(5,12).

  - 기도의 중요성(1,5-8; 5,13-18).

  야고보는 예수의 말씀 외에 유대교의 지혜문학과 헬레니즘의 윤리사상을 다각적으로 활용한다. 이런 집필 태도는 모든 문화 전통의 숭고한 교훈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려는 현대 교회의 노력과도 상통한다. 야고보는 아직 그리스도교와 유대교를 명확하게 구별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어쨌든 그의 폭넓은 포용정신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는 교회 일치운동의 시대, 토착화의 시대, 그리고 도처에서 빈부의 격차가 날로 심해 가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러나 새것과 옛것을 아울러 간직한 보고( 庫)와도 같은 그의 훈계가 예수의 가르침과 또한 그분에 대한 믿음 안에 뿌리박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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