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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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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원진 [weirdo] 쪽지 캡슐

2000-09-09 ㅣ No.1130

첫마음

 

-박노해-

 

한번은 다 바치고 다시

 

겨울나무로 서있는 벗들에게

 

저마다 지닌

 

상처 깊은 곳에

 

맑은 빛이 숨어있다.

 

첫 마음을 잃지 말자

 

그리고 성공하자

 

참혹하게 아름다운 우리

 

첫마음으로

 

 

 

 신학교에서 동기들과 함께 마음을 모아  글모음을 묶어 냈는데, 그때 표지에 사용했던 박노해 시인의 시 입니다.

 

 첫 마음. 불교에서는 초발심이라는 말을 쓰기도 하는데, '첫 마음'이라는 말이 제게 주는 의미는 단순한 시작 그 이상입니다.

 

 첫영성체때 손바닥에 놓인 하얀 성체를 보면서 다리가 떨렸던 그때

 첫 고백을 준비하면서 죄에 대해 느낀 두려움과 후회

신학교로 가는 날 짐을 꾸리면서 느낀 생각들

미사를 보며 처음으로 눈물을 흘릴때 저 자신에게 했던 말들

친형처럼 지내던 선배 신부님의 첫미사에서 복사를 서면서 했던 생각들

막상 혼자이며 외롭다고 느꼈을 때 나를 내려다보는 십자가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그 느낌

 미사 중에 하느님의 사랑을 정말 온 몸 가득히 느끼며 흘렸던 눈물들

 

 

 이런 것들을 다시 떠올려 보면서 그때의 첫마음들, 그리고 제가 가지고 있던 첫마음들이 시간이라는 핑계속에 닳아 희미해지거나 없어져 버리는 것을 의식하며 씁쓸해지고 아쉽고, 저 자신에게 실망스럽기도 합니다.

 글쎄요, 인간은 망각의 존재이기 때문에 잊는 것은 당연하고 망각이 있어야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들 하지만, 첫 마음이 희미해진다는 것 만큼 슬픈 것도 많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제 미사를 보면서 성체를 영할때는 영하지 않으면 찜찜하니 그냥 의식적으로 일어나 행렬에 끼게 되고,

 고백 성사를 볼 때는 그냥 습관적으로 죄를 생각하고, 배운 대로 너무나도 익숙하게 고백소에 들어갔다 나오고

 새로 서품받은 새신부님의 미사를 드릴때는 빨리 시간이 흘러 나도 첫미사를 봉헌해야 겠다는 생각 뿐이고

  신학교에서 잠을 자거나 짐을 꾸리거나 하는 것들은 그냥 일상 생활의 일부분이고

  십자가를 올려다 볼때는 성물이 아닌 그냥 성미술품으로 보게 되는

 그 익숙함과 닿아버림에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첫 마음

 오늘 미사를 드리며 생각해 봤습니다.

 

 

 

 

 

첫 마음을 잃지 말자

 

그리고 성공하자

 

참혹하게 아름다운 우리

 

첫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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