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흥보 신부님의 성서 자료실

신약 가톨릭 (공동) 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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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03-02-12 ㅣ No.86

 

 

신약 가톨릭 (공동) 서간

 

 

-백광진 신부님의 인터넷 성서 자료 참조

 

 

 

신약성서에서 바오로의 서간집에 뒤 이어 일곱 편의 서간이 나오는데 4세기 초엽부터 이를 '가톨릭 서간'(letterae catholicae)또는 '공동서간' 이라고 일컬어 온다. '가톨릭'이라는 형용사의 의미가 '보편적'이라는 뜻인 만큼 서간의 성격을 시사하고 있다. 즉 이 서간들은 바오로의 서간들과는 달리 수신인이 지정되어 있거나 특정한 공동체에 보내진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교 신자 전부에게나 일정한 지역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들 전부에게 보내진 것이라는 말이다. 요한의 둘째 편지와 셋째 편지만은 어느 한 공동체와 한 개인을 수신인으로 하고 있다.

 

 

야고보의 편지

초대 그리스도교는 이 서간을 야고보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전수해 주었다. 사도들 중에 야고보라는 이름을 가진 사도가 둘 있다. 사도 요한의 형 야고보(세칭 '長야고보')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세칭 次야고보') 이다(마르 3, 17-18 참조). 그러나 둘 다 '야고보서'의 필자는 아닌 듯하다. 성서학자들은 오히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인물로 바오로가 "주님의 형제"라고 일컬었고 또 베드로와 요한과 더불어 교회의 기둥과 같은 존재로 여겨졌다고 말한 인물(갈라 2, 9)이 이 서간의 필자라고 간주한다.

  그는 예루살렘 교회의 우두머리였으며 예루살렘 사도회의 때에도 베드로에 뒤 이어 발언을 한다. 야고보는 자기 개인은 모세 율법을 세심할 이만큼 철저히 엄수했으나, 이방인으로서 교회에 들어온 사람들에게 율법을 부과해서는 안된다는 견해에 있어서는 베드로와 바오로에게 전적으로 동조하였다.

  그의 이 실천적 태도는 매우 현명하고 지혜로운 것이었다. 야고보 덕분에 유다인들은 예수와 그분의 교리를 따른다고 해서 과거 유다의 전통을 깡그리 거부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안도감을 갖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조상들의 종교가 복음에서 완성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조상들의 종교를 올바로 믿는 길이라고 판단하게 되었다. 유다교의 훌륭한 요소들(기도, 성서공부, 선행,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예수의 제자들도 그대로 준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야고보의 깊은 신심은 아직 개종을 안한 유다인들에게서도 존경을 받았다.

  야고보서의 필자도 기원후 61년 대사제와 의회의 명령으로 피살당하여 순교자가 되었다. 팔레스티나에 로마 총독이 잠시 부재 하는 틈을 이용해서 그를 살해한 것이다.

  야고보서는 극히 실천적 내용을 담은 것으로 "사방에 흩어져 사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게" 보내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편지가 팔레스티나 밖에서 흩어져 살던(디아스포라) 히브리인들에게 쓴 편지라고는 단정할 수 없다. 야고보는 유다교에서 개종한 신자들로서 팔레스티나 국외, 아마도 시리아 일대에 거주하는 신자들을 상대로 이 편지를 썼을 것이다.

  서간 전체가 2, 14-26(행동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을 중심으로 해서 엮어져 있다. 이 대목에서 사도는 그리스도교 신자가 구원받고자 한다면 선행이 필요함을 극구 강조한다. 신앙만으로는 충분하지가 못하다. 몇 가지 진리를 믿으면서 자기의 물질적 이익과 본능에 따라서 이기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매우 편리할 것이다. 예수를 믿는 믿음만 있으면 자기 행실이야 어떻든 자동적으로 구원받으리라는 생각은 매우 안일한 것이다. 야고보가 말하는 믿음은 그리스도교 진리에 대한 지적(知的)인 동의(同意)를 가리키는 것으로 삶 자체에 아직 힘을 미치지 못하는 그런 것이다. 야고보는 "그런 믿음은 죽은 것이다"고 단언한다. 사실 바오로도 산 믿음은 행실이 따르고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이며(갈라 5, 6), 행실과 실생활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보여주는 믿음이라고 하였다.

  로마서(3, 28)와 갈라디아서(2, 16)에서 바오로는 인간이 하느님 대전에 의로워지는(올바른 관계에 놓이는) 것은 선업을 통해서가 아니라 신앙을 통해서라고 선언한다. 여기서 이방인의 사도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회개, 죄의 상태에서 은총의 상태로 건너감이 사람의 공적으로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은총은 본질상 '거저 주시는 것'이다. 그렇지만 은총은 사람에게 새 생명과 활력의 원리가 되어서 그리스도교 신자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살게 만든다. 신앙이 우리의 초자연적 생명의 씨앗이요 우리의 영원한 구원의 뿌리임이 사실이라면, 그 씨앗과 뿌리가 나무로 자라고 열매를 맺지 못할 때에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것을 생활에 옮겨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된다(야고 1, 22-27 참조; 마태 7, 21-27).

  야고보서는 이 핵심사상을 위주로 하여 전개되며 서간에 나오는 훈계들이 그리스도교적 의미를 띠는 것도 이 핵심사상 덕분이다. 서간에는 다음과 같은 교훈이 나온다.

 

  1) 시련과 어려운 생활 중에 인내를 다 하라는 훈계(1, 2-12; 5, 7-11).

  2) 혀를 잘 쓰라는 훈계. 혀를 잘 놀리기는 쉽지가 않으며 자칫하면 굉장한 악의 불씨가 된다(3, 1-12).

  3) 부자와 가난한 자를 차별대우하지 말라는 경고. 이 세상의 부와 명예가 하느님의 눈에는 하찮은 것임을 상기시킨다(2, 1-13; 5, 1-6). 아울러 만민이 하느님의 똑같은 자녀임을 일깨운다.

  4) 자기의 욕정을 제어하며 그리스도교적 지혜를 터득하라는 훈계. 그리스도교의 지혜는 인간적 완덕 이기도 하다(3, 13-4, 17).

 

  야고보서는 다른 면에서도 중요한 문헌이다. 신약성서 가운데 '병자에 대한 도유'(途油)를 언급한 유일한 성서이기 때문이다(5, 14-15). 야고보가 몇 마디로 지나쳐 가는 이 이야기는 선도들에게 생소한 것이 아닌, 그들이 익히 알고 교회 내에서 종전부터 실천되어 오던 것임에 틀림없다. '병든 신자들의 영적 유익뿐 아니라 육체적 유익도 가져오는, 그리스도의 은총의 가견적 표지'(可見的 表識)인 병자성사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이어서 야고보는 '죄의 고백'을 권유한다(5, 16-18). 이것은 성사로서의 고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집회에서 서로 자기 잘못을 집단적으로 고백하여 형제들이 자기를 위해 기도하도록 요청하는 관습을 일컫는 듯하다.

  이 서간은 진리와 신자다운 생활에서 멀어진 형제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도록 충고하는 말로 끝맺는다.

 

 

베드로의 편지들

사도단의 으뜸 베드로는 서간 두 편을 남겼다. 첫째 서간으로 알 수 있듯이 소아시아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앞으로 쓴 것이기는 하지만 말하자면 최초의 '회칙'(回勅)인 셈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이 지역들은 바오로가 거쳐간 곳이고 제2차, 3차 전도 여행 중에 바오로가 복음을 전한 곳이다. 그러니 이 지역에 오는 편지라면 의례 바오로의 서명이 있어야 할 것이다. 몇몇 학자들의 추측에 의하면 바오로가 제1차 수인생활에서 풀려나서 로마를 떠나 스페인으로 가고 없는 사이에 소아시아 신자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소식이 로마에 전달되었던 것이다.

  로마에는 바오로가 없는 대신에 베드로가 상주하고 있었다. 사도들의 으뜸이요 교회의 첫째 기둥인 베드로인 만큼 신자들에게서 바오로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어 알고 있었을 것이다.

  또 베드로는 소아시아 신자들에게 따로 소개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바오로가 예수께서 당신 교회를 세우신 반석인 게파에 대해서 교회마다 이야기를 했을 테니까 말이다.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바오로의 편지를 보더라도 소아시아 신자들에게 베드로는 잘 알려진 인물이었음이 분명하다.

 

베드로의 첫째 편지는 주위의 적대감 때문에 고통을 받는 신자들에게 보낸 것이다. 그곳 신자들은 조롱과 경멸을 받고 심지어 무고하게 고발을 당하고 있었다. 온 세상의 교우들이 다 그렇듯이 말이다(5, 9). 그래서 베드로는 그들을 격려해야 했다.

  서간의 제1부(1, 3-2, 10)는 그리스도교적 희망을 주제로 하고 있다. 희망은 현세생활에서 기쁨을 주고(1, 6) 고난 중에서 힘이 된다. 불이 황금에서 불순물을 털어 내듯이 고난은 우리 신앙을 단련하고 정화하고 굳세게 만든다(1, 7).

  고난은 이르든 늦든 우리 모두가 겪어야 할 것이다. 슬픔과 고통의 순간에 하느님과 낙원을 생각한다면 우리 마음에 생기가 나서 신앙을 새롭게 하고 세상살이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며 오히려 그 일부에 불과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세상살이가 우리 운명에 결정적인 비중을 갖는 것만은 수긍해야 한다.

  그리스도교적 희망은 하느님의 사랑, 예수의 죽음에서 생생하게 입증된 사랑에 바탕을 둔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자기네가 무슨 값을 치르고 구속된 몸인가를 늘 유념해야 하겠다(1, 17-21). 사도 베드로는 우리를 위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이 어디까지 나아갔는지 가리켜 보인다.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은 우리를 악에서 풀어주는데서 그치지 않고 우리를 변모시켜 새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게 만든다. 하느님은 단지 우리의 은인이 아니시고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 대전에서는 언제나 갓난아이들이며 또 마땅히 갓난아이로 처신해야 할 것이며, 전혀 악의가 없이 안심하고 살아가야 하며, 서로 형제간처럼 위할 것이며. 세상이 끝나고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영광이 완전하게 나타나리라는 기대를 안고 살아갈 것이다(2, 1-2; 4, 13). 그리스도교 신자는 이와 같은 신뢰감과 안도감을 품는 외에도 바로 하느님의 가족이라는 품위를 느껴야 한다. 신자는 선택된 민족이고 거룩한 겨레이고 하느님의 소유가 된 백성으로서 자기의 일상생활을 제사로 바쳐 참 하느님을 섬기고 예배한다. 따라서 그들은 전례의 제사를 바치는 사제들이기도 하다(2, 9-10).

  제2부(2, 11-5, 11)는 실천적 성격이 더 강한 대목으로서 각자의 신분에 따라서 본분을 다하라고 훈계한다.

  여기서 특히 유의할 점 하나는 신자들이 명성과 좋은 평판을 받도록 처신하라는 교훈이다. 신자들의 행동거지가 멸시와 징계와 형벌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2, 12; 3, 16; 4, 4-5; 4, 14-16).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하신 이상,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몰이해와 멸시와 온갖 고통을 당하리라는 것은 모르는 바 아니다. 그렇지만 베드로는 우리가 잘못함으로써 이교도들이 우리를 넘보고 박해할 구실은 주지 말라고 충고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고난만이 그리스도의 행복을 나누어 받으리라는 보증이 된다. 사도는 이 점을 신자들에게 누누이 일러준다(4, 14; 마태 5, 11; 루가 6, 22 참조).

  서간에는 두 군데 다소 모호한 대목이 나온다. 3, 19-20과 4, 6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사이에 지옥에 내려가셔서 죽은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알리셨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아무도 예수보다 먼저 영원한 행복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이 교회의 가르침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업이 있기 전에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낙원에 들어갈 권리는 얻었겠지만 실제로는 들어가지 못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희생제사로 하느님의 아들들에게 하늘 문을 열어주셨다는 것이 베드로의 주장이다. 3, 18의 "그리스도께서는 몸으로는 죽으셨지만 영적으로는 다시 사셨다"는 구절에서 '몸'은 예수께서 우리처럼 생활하시고 죽음을 맛보신 인간조건을 가리키는 말이고, '영'은 부활하신 뒤 누리고 계시는 영광을 받은 신적 조건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신적 조건을 누리시면서 그리스도께서는 구속을 기다리던 의인들의 영혼을 해방하여 낙원으로 데리고 가셨다. 베드로는 특히 노아 시대의 사람들로서 하느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던 이들을 머리에 두고 있다. 그들의 구원의 '기쁜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은 홍수라는 대재앙을 당하여 제 정신이 돌아와서 자기네 죄를 뉘우쳤으리라는 전제를 두고 있다. 베드로는 대홍수의 물을 생각하며 좀 특이한 각도에서 관찰한다. 그 물이 방주를 떠올려 노아와 그의 집안이 다른 사람들처럼 빠져 죽지 않은 사실을 회상한다. 노아의 집안을 구원한 이 물이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멸망에서 구하는 세례의 물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4, 6은 앞의 생각을 다시 부연하여 하느님의 판단이 인간의 판단과는 다름을 상기시킨다. 인간적 판단에 의해서는 믿지 않은 죄인으로(노아 시대의 사람들처럼) 단죄 받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구속사업으로 하느님의 자비와 구원을 실제로 입었다는 것이다.

 

베드로의 둘째 편지는 첫째 편지와는 달리 격렬한 정도로 논쟁적이다. 여기서는 이교세계와 함께 생활하는데서 초래되는 소아시아 교회의 외적 문제들을 거론하지 않는다. 그 교회 내부의 위험들,  거짓 교사들 또는 신자들의 어리석음을 이용하여 실속을 차리는 자들이 신자들의 신앙을 무너뜨리는 위험을 두고 이야기한다.

  제2장 전체는 갈라디아서나 고린토 후서의 격렬한 부분에 필적할 수 있겠지만 베드로의 저돌적인 성격을 두드러지게 나타내고 있다. 게쎄마니 동산에서 칼을 뽑아 휘두르던 기질로(요한 18, 10 참조) 이제는 교회 우두머리로서 말로써 그리스도를 옹호하고 있는 것이다. 베드로는 신자들이 사도들의 설교를 전수 받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격려하는 뜻에서 예수를 모시고 살던 시절의 가장 인상깊은 사건을 든다. 예수의 영광스러운 변모, 신적 영광을 찬연히 드러내시고 모세와 엘리야 사이에 서 계시던 스승을 뵙던 저 추억의 순간을 회상한다(마태 17, 1-8; 마르 9, 2-8; 루가 9, 28-36 참조).

  거짓 교사들은 신앙과는 거리가 먼 자들로서 그리스도께서 곧 재림하시리라 던 약속이 당장 실현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시비를 걸면서 복음을 불신케 하려고 애쓴다. 그 어리석은 자들에게 베드로는 하느님이 우리 인생의 짧은 간격으로 시간을 재는 분이 아니심을 주지시킨다.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 우리로서는 하느님이 허락하시는 마지막 순간까지 시간을 잘 쓰는 도리밖에 없다(3, 1-10).

  하느님은 당신이 적당하다고 보시면 언제라도 개입하시어 악한 자들을 벌하신다는 것이 성서의 교훈이다. 반역한 천사들에게, 노아 시대의 인간들에게, 소돔과 고모라에 내린 가공할 사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일단 믿고 따르기로 했다가 그분을 저버린 사람들에게 하느님이 내리실 재앙을 표상하는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유다에게 하신 말씀을 본떠, 그런 자들은 "차라리 올바른 길을 알지 못했던 편이 더 나았을 것이다"(2, 21)라고 신랄한 한마디를 던진다.

  그런데 자기 사상을 옹호하려고 함부로 성서를 인용하는 자들을 두고서 베드로는 성서란 인간의 서책처럼 사람마다 마음대로 알아듣고 풀이할 수 있는 책이 아니라고 경고한다. 성서는 성령과 예언자들의 협력으로 이루어진 책인 만큼, 성서를 올바로 이해하려면 성령의 보우(保佑)를 입은 사람들, 하느님이 계시하신 바를 세상에 전파하기 위해서 파견 받은 사람들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1, 20-21). 베드로가 바오로의 서간을 두고 한마디 비평한 구절(3, 15-16)은 매우 귀중한 것이다. 바오로의 서간에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 더러 있어서 거짓을 가르치는 교사들은 성서의 다른 부분들을 곡해하듯이 그것도 악마적 목적에 악용한다는 것이다. 이 구절을 주의 깊게 읽어본다면, 바오로의 서간들이 이미 베드로에게 알려져 있었을 뿐더러, 교회의 우두머리인 베드로가 그 서간들을 다른 성서들과 동등하게 간주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대 성서학자 일부는 이 두 서간을 베드로의 저작으로 인정하는데 곤란이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둘째 서간은 사도시대 이후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 서간은 초기의 세례 예식에서 들려주던 교훈이나 묵상하던 사상들을 모은 것으로서 후대에 서간 형태로 엮어졌다고 본다. 알다시피 이 본문이 감도를 받았다고 해서 꼭 처음부터 서간으로 씌었다는 보증은 안 된다. 이미 구약 후기 작품들만 해도 성서저자들이 쓴 작품을 위인에게 돌려 그의 이름으로 한 예는 많았다. 예컨대 '지혜서'는 기원전 1세기 중엽에 쓰인 책인데 그보다 9세기 전에 생존했던 솔로몬의 작품으로 되어 있다.

  그 저서의 저자로 명기된 사람이 실제로 그 책을 쓰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는 성서의 정전성(正典性)이나 감도(感導)를 조금도 약화시키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초대교회가 그 성서에서 사도의 음성과 증언을 인정했고 그것을 교회의 유산으로 받아들이고 보존하고 전수했다는 사실이다.

  베드로의 첫째 편지를 세례식의 '설교집'으로 간주하고서 읽노라면 특정한 구절들이 보다 생동감 있고 뜻이 분명해진다. 그리스도교 생활과 관련된 훈계들은 모두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그리스도적 실존'에 근거를 둔 것들이다. 따라서 이 서간들을 읽고 묵상하노라면 우리의 세례를 회고하고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생명을 받아 다시 태어나던 신비를 되새기게 된다.

 

유다의 편지

이 짧은 서간(전문 25절)은 차야고보의 동생(마르 6, 3; 마태 13, 55)인 유다 타대오(Juda Thaddaeus)이다(루가 6, 15). 유다에 관해서는 그 이상 알 길이 없다.

  사도는 일단의 그리스도교 신자들 앞으로 편지를 썼는데 유다교에서 개종한 신자들로 추측할 수 있다. 서간에서 유다교 전형적인 비유들을 쓰는데 이방인들에게는 낯선 비유들이기 때문이다. 처음 16절은 교회 안에 들어와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대로 늑대처럼 노략질하며 양떼들을 흩어 버리는 자들을 엄중히 단죄하고 있다. 그자들은 신자들이 전수 받은 신앙에 상반되는 교리들을 내세우고(3절) 부도덕한 관습을 퍼뜨림으로써 그 신앙을 부패시키고 비뚤어지게 만들고자 한다.

  그자들은 신앙의 진리를 계시하셨고 당신을 따르려는 이들에게 생활의 규범을 내리진 "오직 한 분이신 지배자시며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4절)를 인정하지 않는다.

  베드로의 둘째 편지처럼 유다서도 반역하는 무리들이 타락한 천사들로부터 비롯해서 하느님께 벌받는 사례를 계속 열거한다. 그리스도교 신앙과 관습을 부패시키는 자들에게도 같은 운명이 닥친다는 것이다.

유다서에서 내용이 다소 모호한 부분은 8-11절이다. 사도 유다는 여기서 진리에서 완전히 이탈한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질책하고 있다. '헛소리'를 곧잘 하고 자기네 사설(邪說)을 진리로 착각하며 짐승들처럼 무엇이든지 본능으로만 이해하는 자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자들은 십계명과 복음서에서 명확한 행동규범을 내리신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을 짓밟는다. 그리고 '영광스러운 천사들'에게 욕설을 퍼부어 자기네가 저지른 죄과를 그들에게 돌리면서 탓을 면하려고 한다. 여기서 유다는 그 상대가 반역한 천사냐 아니냐는 따지지 않고 자기 죄과를 천사들에게 돌리는 어리석고도 위험천만한 풍조를 경고하고 있다.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유다는 극단의 예를 들고 있는데 그 예는 영감을 받지 않은 책으로 유다 전설들을 모은 책에서 따온 것이다. 그 전설에 의하면 모세의 시체를 장사지내는 일을 두고 천사들과 악마들이 대판 싸움을 벌였다는 것이다. 그 싸움 중에서도 대천사 미카엘은 악마에게 수치스러운 언사를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전설이 실화냐 아니냐는 유다 사도의 관심 밖이므로 따지지 않는다. 자기 생각을 설명하기 위해서,  비록 성서는 아니나 당대 유다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책에서 이 예를 들었을 따름이다.

  에녹서를 인용한 대목(14-15절)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겠다. 그 당시 유다인들에게 널리 알려지고 읽혀지던 책이었다. 사도 유다가 이 책을 인용했다고 해서 에녹서가 감도 받은 성서로 간주되는 것도 아니고 인용한 그 대목이 사실로 단정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유다가 편지를 쓰던 당대의 신자들의 사고방식이나 환경에 익숙하지 못하기 때문에 유다서를 대하면 약간 당황할 수가 있다. 사도로서는 당대의 환경에서 통용되던 것들을 십분 이용하여 신자들을 그릇된 교리와 행실에서 보호하려고 했던 것이다. 부도덕한 행실을 하면서 그릇된 교리를 내세워 정당화하려는 자들에게도 사랑에서 우러나온 동정을 보아야 하고 같은 잘못을 거듭하지 못하도록 현명하게 다스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줏대가 서지 못한 사람들이나 설득 당할 염려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자들의 과오를 분명히 지적하여야 마땅한 것이다(17-23절).

  유다의 이 현명한 태도는 오늘날에도 통용되는 것이다. 오늘날 그릇된 사상과 부도덕한 현실을 정당화하려는 자들이 천사들을 내세우지는 않겠지만 그 대신 다른 논리들을 내세우는데 그것들은 앞뒤가 안 맞고 유치한 구실뿐 아니라 사람을 교묘히 설득시키는 그럴 듯한 핑계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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