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흥보신부님의 자료실

59. 견진 성사 생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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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02-04-04 ㅣ No.103

 

 

 

  반쪽짜리 평화

 

 

 

  59. 견진 성사 생활1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성령을 통해서 우리를 당신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시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갈라 5, 5) 우리의 희망은 구원이다. 구원은 우리 모두의 희망사항을 궁극적으로 다 합친 것일 수도 있다. 그 희망사항을 다합친, 보다 근원적인 희망인 구원은 바로 오늘 내게 "너는 죄가 없고 또 훌륭하게 살았기 때문에 내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는 하느님의 인정과 칭찬을 받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죄를 지었다. 그리고 누구 앞에서도 흠 한점 없이 깨끗하거나, 나 자신이 나를 돌이켜 생각해봐도 훌륭하게만 살지 못했다.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온전히 있다고 말할 사람이 없다. 물론 그것은 우리만의 온전한 책임은 아니다. 다만, 우리는 부족하고 나약하지만 그래도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싶어한다.

 

  이런 우리 사정을 아시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죄 없는 아들을 우리 죗값으로 희생시키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셨다.

 

  이렇게 구원은 주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은 것이고, 그것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얻게 되는 은총이다. 성령은 이러한 희망을 우리에게 심어주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지금의 이 은총을 누리게 되었고 또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할 희망을 안고 기뻐하고 있습니다."(로마 5, 2)

 

  그러므로 우리는 마지막날 "너는 죄가 없고 또 훌륭하게 살았기 때문에 내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는 심판의 선고를 받고, 성령의 인도로 하느님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 속에서 살게 되기를 기대한다(이러한 심판의 선고를 바오로 사도는 '의화(義化)'라고 했고 공동번역 성서에는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인다.'라고 번역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오늘, 여기서, 이미, 마지막날에 얻을 구원의 기쁜 소식을 미리 알아서 기뻐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행복한가? 우리의 매일매일이 기쁨에 넘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왜 그런가? 우리가 기쁜 소식을 받았다면 당연히 기뻐야 하는데 기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받아 살기보다는 세상의 흐름에 따라 살고 있기 때문이다.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들은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고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영적인 것에 마음을 씁니다.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죽음이 오고 영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생명과 평화가 옵니다."(로마 8, 5-6)

 

  세상은 우리에게 우리의 믿음을 버리도록 유혹하고 있다. 세상은 우리에게 말한다. "이것을 보아라. 이것을 가져라. 그러면 행복해질 것이다." "이것을 배워라. 그리고 내 말을 들어라. 그래야 네가 살 수 있고 네 미래가 보장될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한번 세상의 흐름을 따라가 보자. 세상이 주는 평화는 이웃을 밟고 올라서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경쟁사회! 다른 이의 희생을 전제로 하고 그 희생이 나의 이익으로 합쳐질 때 비로소 내 행복이 보장된다. 자기 이익을 우선으로 삼는 자본주의 경제사회! 세상이 요구하는 대로라면 다른 사람의 아픔이 나의 기쁨이 되고, 다른 사람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 된다. 그러나 그것은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기쁨보다는 씁쓸함과 비애를 안겨준다. 그리고 내가 빼앗았던 그것을, 언제 다시 다른 이에게 빼앗길 지 몰라 불안해한다. 또 그것을 지키기 위해 이웃을 적으로 경계해야 한다. 그것이 경쟁과 경제사회 안에서는 미덕과 성공이 될지 모르지만, 인간사회 안에서는 죽음과 공포이다. 이것이 육체적인 세상에서 주는 평화이다. 반쪽자리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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