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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한국 천주 교회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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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02-11-07 ㅣ No.140

 

 

 

  평신도 교회

 

 

 

  52. 한국 천주 교회사1

 

 

  한국 천주교회는 다른 나라의 교회와는 달리 4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선교사들의 전교에 의해서가 아니라 평신도들이 스스로 찾아 얻은 교회다.

 

  둘째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전에 세례자가 있었다.

 

  셋째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전에 신앙공동체가 있었다.

 

  넷째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전에 순교자가 있었다.

 

  한국 천주 교회는 조선 말기인 1777년 천진암과 주어사에서, 당대의 정치계에서 소외된 남인 학자들이 모여, 이조 시대의 통치원리인 성리학을 연구하던 중, '이벽'으로부터 서학이라고 하는 천주학을 전해 듣고는 이를 더 깊이 연구하기 시작함으로써 태동되었다.

 

  당시 이들이 연구하던 책은 중국에 와서 선교하던 '마태오 리치'의 '천주실의' 등으로서, 그 내용은 보유론(유교를 보완하는 천주학)이었다.

 

  이들 중 '이승훈'은 1784년 정부로부터 중국에 동지사로 파견된 부친을 따라 북경까지 가서 세례를 받고 돌아옴으로써, 한국 최초의 세례자(세례명 베드로)가 되었다. 이로써 선교사가 들어와 선교를 하기도 전에 이미 교회의 모습을 갖추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모든 지역 교회는 외국에서 선교사들이 들어와 교리를 가르치고 신앙 공동체를 건설함으로써 시작되었다(한편 이 시대의 선교는 결과적으로 교회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유럽 강국에서 파견된 선교사의 뒤를 따라 군대가 들어가 그 나라를 식민지로 만드는 동점 서세의 성격을 띄었다).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온 이승훈은, 자신이 보고 온 대로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정약종(아우구스티노), 정약용(세례자 요한) 등에게 세례를 베풀고, 중인 계급인 김범우(토마)의 집(명례방, 현 명동 성당)에서 모여 미사도 드리고 성사를 집전하는 가성직 제도의 교회를 꾸몄다.

 

  그러나 곧 그것이 불법이라는 것을 알고는, 성사 집전을 중단하고 선교 사제를 모시는 일에 충실하였다.

  참고로 당시 고해 성사의 보속을 보면 "가난한 이들에게 자선 베풀기", "어려운 이들을 위해 희생하기" 등으로 그리스도교 정신을 상당히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사회와는 너무나도 다른 교회의 가르침을 수행하려던 신자들의 노력은 박해를 당해야 했다.

1791(신해)년 전라도 진산군의 '윤지충'(바오로)이 모친 장례에 그의 외사촌 형 '권상연'(야고보)와 함께 가족들이 만든 신주를 불살라 버리고 천주교 식으로 장례를 치르려 하자, 가문과 정부에서 패륜아로 사형에 처했다. 이로써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었다.

 

  한국에 처음으로 들어온 중국인 선교 사제 '주문모' 신부와 '이루갈다' 동정 부부, 종교의 자유를 위해 서양에 원조와 지원을 청하는 백서를 쓴 황사영을 비롯한 300여명의 교우가 순교한 신유 박해(1801)가 일어났다.

 

  정부의 척사윤음(천주교를 버릴 것)을 반대하여 상재 상서(재상에게 교리로서 반박하는 글)를 냈던 '정하상'(바오로) 과 우리 나라 최초의 신부 김대건(안드레아)의 부친 '김제준'(이냐시오), 13세의 최연소 순교자 '유대철'(베드로), 조선 교구 2대 교구장인 '앵베르 범' 주교, '샤스탕 정', '모방 라' 신부 등 세 명의 프랑스 성직자를 비롯하여 약 150여 명의 교우가 기해 박해(1841) 때 순교하셨다(이중 79분이 1984년 성인품을 받으신다).

신자들은 박해를 기꺼이 받아들여 순교했으며, 이러한 순교행렬은 오히려 천주교회를 한국 사회에 널리 퍼트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교회 내적으로는 더욱 더 신앙에 충실하도록 자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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