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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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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03-02-12 ㅣ No.85

 

 

신약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 해제

 

 

-이홍기,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 신약성서11 히브리서, 분도출판사, 1991

 

 

 

신약성서 27권 가운데 히브리서처럼 많은 수난을 겪은 책도 드물 것이다. 그만큼 이 책은 이미 초 세기부터 경전의 위치를 확보하는데 어려움이 많았으며 현대까지 계속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다.

  히브리서가 순조롭지 못한 역사를 밟았던 주된 이유는 그 저자가 누구인지 확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책이 전통적으로 사도 바오로의 작품으로 간주되어 왔고, 그 인연으로 바오로의 편지 계열에 배치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미 초 세기부터 서방교회에서는 바오로의 친저성에 대하여 의혹을 품었고 그것은 곧 경전으로 인정받는데 큰 장애 요인이 되었다. 교회는 사도의 저서라는 점을 경전성의 첫째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밖에 후대의 독자들에게는 매우 생소하고 복잡한 구약의 제사나 예식, 또는 신앙 배반자들의 회개를 불가능하다고 선언하는 엄한 경고 등의 내용도 부수적인 장애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히브리서를 문학적으로나 사상적으로 좀더 깊이 연구하면 이 책이 그토록 숱한 난관을 겪으면서도 신앙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었던 까닭을 알게 된다. 사실 문학적으로 보아서는 히브리서가 신약성서들 중에서 단연 첫 자리를 차지한다. 또 그 내용 면에서도 그리스도의 제관직과 그리스도인의 생활 지침 등 교회의 신앙진리를 구약성서와 초대교회의 전승을 바탕으로 명쾌하게 밝힌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이 책을 성서 주석의 표본이라고까지 말한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이 비록 한때는 푸대접을 받아 왔지만 이제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사랑 받는 책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 책이야말로 중재자요 대제관이신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진리와 실천해야 할 교훈을 알려 주는 살아 있고 힘찬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1. 교회 전승상의 히브리서

초 세기 교부들의 저서 중에서 우리에게 알려진 히브리서에 대한 첫 기록은 로마의 클레멘스가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번째 편지(95∼96년경)이다. 그런데 이 편지는 히브리서의 필자나 독자 등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는 전혀 제공하지 않는다.

  초 세기의 히브리서에 대한 태도는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완연히 다르다. 동방교회에서는 판테누스(180∼200년경),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3세기 초), 오리게네스(3세기 초) 등 알렉산드리아 학파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교부들이 이 책을 바오로의 작품으로 여기고, 그에 따라 별다른 반대 없이 경전으로 받아들였다. 물론 이 교부들도 히브리서의 독특한 문체와 사상, 또는 바오로의 편지들과는 달리 집필자를 명시하지 않은 점 등 다소 특이한 요소를 발견하긴 했지만 크게 문제시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와 에우세비오스는 바오로가 원래는 히브리서를 히브리어로 적었는데, 후에 루가가 그리스어로 번역하였다고 해명한다. 오리게네스도 이와 비슷하게 사상은 바오로의 것이로되 문체나 표현은 그의 제자인 로마의 클레멘스나 루가의 것이라고 추정한다.

  이와는 달리 서방교회는 히브리서를 바오로의 작품으로 간주하지 않았기 때문에 경전으로 받아들이기를 매우 꺼렸다. 테르툴리아노(220년경)는 바르나바를 필자로 내세우면서도 경전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이점에 있어서는 이레네오(에이레나이오스, 202년경)와 로마의 히폴리토(200년경)도 견해를 같이한다. 무라토리의 경전목록(200년경)에는 히브리서가 아예 빠져 있다. 에우세비오스는 당대의 히브리서에 대한 서방교회의 태도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어떤 로마인들은 오늘날까지(히브리서를)사도의 편지로 인정하지 않는다."

  서방교회의 이러한 태도는 동방교회와의 교류가 활발해지기 시작한 350년 이후부터 차츰 바뀌기 시작한다. 루치펠(370년경), 프리칠라(4세기 말), 암브로시오(397년)등 많은 교부들이 이 책을 바오로의 저서로 대하면서 자주 인용한다. 제3차 카르타고 공의회(397년)는 히브리서를 바오로의 13통의 편지와는 별도로 취급하면서도 그의 저서로 인정하여 경전목록에 넣고 있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비록 예로니모(히에로니무스), 아우구스티노 등 일부 교부들이 의혹을 드러내지만 별 논란 없이 지나간다.

  바오로의 친저성 문제가 재론되기 시작한 것은 중세 종교개혁 전후부터이다. 먼저 에라스모가 바오로 친저설에 의혹을 품기 시작하며, 루터는 처음에는 바오로의 작품으로 여기다가 후에는 그 내용에 회의를 느껴 저자 문제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리하여 야고보서와 묵시록 등과 함께 신약성서의 끝자리에 배치하며 경전으로 대우하지도 않는다. 트리덴티노 공의회는 히브리서의 필자가 누구인지 명시하진 않지만 바오로의 편지록에 포함시킴으로써 사실상 바오로의 작품으로 간주한다.

  16세기말부터는 다시금 가톨릭이나 개신교나 상관없이 대부분의 학자들이 이 책을 바오로의 작품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다가 19세기 후반부터는 다시 많은 개신교 학자들이 전통적인 바오로 친저설을 부인한다. 이러한 현상을 우려한 교황청 성서 위원회는 1914년에 바오로가 저자임을 공식으로 선언하지만 현재의 책과는 다른 형태로 집필하였을 가능성은 시사한다.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가톨릭 학자들도 바오로를 넓은 의미의 필자임은 수긍하지만, 그가 직접 집필했다는 전통 견해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2. 필자

바오로의 다른 편지들과는 달리 히브리서 자체는 그 저자가 누구인지 전혀 밝히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오로의 편지라는 전통적 견해가 유지되어 온 것은 바오로의 편지와 히브리서 사이에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1) 히브리서의 결론(13,22-25)이 전형적인 바오로 편지 양식(권고, 소식, 문안, 기원)으로 되어 있고,     그 어휘마저 비슷하다. 게다가 이 결론에는 바오로의 가까운 협조자인 디모테오도 등장한다        (13,23).

  2) 히브리서와 바오로 편지에만 나오는 표현(싸움, 신앙고백 등)이 65개 단어나 된다.

  3) 그리스도론을 비롯한 몇몇 주요 사상이 일치한다(특히 바오로의 옥중서간과): 하느님의 아들이시     며 죽음을 통하여 높이 올려지신 그리스도(1,2-3. 4-14; 2,8; 10,13; 필립 2,9; 1고린 15,25.27), 속죄와 구원을 가져다 준 그리스도의 순종과 죽음(5,8-9; 10,10; 로마 5,19; 필립 2,8), 율법을 반대하는 논증(7,12.16.18-19.28; 10,1.8-9; 13,9-10; 갈라 2,16-21; 3,19-25; 로마 4,14-15; 5,20; 8,3)등. 그 외에 양자는 그리스도를 통해 실현된 새로운 계약, 신앙의 가치 등을 강조하는 면에서도 일치한다.

 

반면에 양자는 문학적으로나 사상적으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1) 히브리서에는 신약의 다른 저서는 물론이려니와 바오로의 편지(친필 서이건 가명 작품이건)에도      전혀 나오지 않는 단어가 124개나 된다.

  2) 바오로의 문체는 생기 있고 사실적이긴 하나 반복, 단절, 비약이 많으며, 직관적이고 직설적이다.     이에 비해 히브리서는 정교하고 세련된 언어를 사용하며 그리스의 수사학적인 규칙을 따라 차분하면서도 리듬을 지키고 그 구조가 대단히 조직적이다. 또 논리 전개가 부드럽다.

  3) 바오로의 편지는 흔히 전편이 교리 부분이고 후편이 교훈 부분인데 히브리서는 교리와 훈화가 필요에 따라 번갈아 나온다.   

  4) 히브리서에는 바오로의 통상적인 편지 서론(인사, 감사기도)이 없고, 필자와 독자도 밝히지 않는다.

  5) 성서 인용방법도 다르다. 바오로는 흔히 "기록되기를" 또는 "성서에 기록되어 있기를"등의 관용적인 인용법을 쓰는데 비해 히브리서는 단순하게 "말하기를"또는"성령께서 말씀하시다"등의 표현을 쓴다. 그리고 바오로처럼 기억에 의존하면서도 대체로 70인 역을 그대로 인용하는 편이다.  

  6) 양자는 사상적으로도 큰 차이를 보인다. 바오로가 즐겨 쓰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 안에"등의 칭호나 표현이 히브리서에는 없고, 그 대신에 "대제관이신 예수", "대제관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2,9; 3,1; 4,14; 6,20; 7,22; 12,2.24)등의 복합칭호를 잘 쓴다. 그리고 이 칭호에서 나타나듯이 히브리서가 책의 주제로 삼고 있는 그리스도의 제관직에 관해 바오로는 전혀 다루지 않는다. 나아가서 히브리서는 바오로처럼 율법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하지만 어디까지나 예배 적인 차원에서 논한다.

  7) 히브리서의 저자는 바오로처럼 자신을 사도로 내세우지도 않고 사도적 권위를 강조하지도 않는다(갈라 1,1.12; 2고린 11장 참조).

 

위에 열거한 제반 요소를 종합 분석하면 적어도 바오로는 직접적인 필자는 아니라는 결론에 이른다.

  바오로 외에 필자 물망에 오른 인물로는 루가(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의 설), 바르나바(테르툴리아노), 로마의 클레멘스(오리게네스)를 비롯하여 아폴로(루터), 브리스킬라와 아퀼라 부부, 실바노, 마르코, 디도, 베드로, 사제 아리스티오레 등 상당히 많다. 심지어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까지 등장하는 형편이다. 이들 중에서 아폴로가 가장 유력시되고 있다.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유대인으로서 뛰어난 구변술과 성서에 대한 해박한 지식 등 사도행전(사도 18,24-28; 참조 1고린 3,5-6)이 전하는 그의 능력과 전교 열성 등이 히브리서를 쓸 수 있는 적격자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폴로 역시 아무런 근거 사료가 없는(고대 전승에서 한번도 그를 필자로 지적하지 않는다) 이론상의 저자일 뿐이다. 결국 히브리서의 필자는 앞으로도 계속 탐구해야 할 미지의 인물이다. 그런 면에서 "히브리서의 저자에 대한 실상은 하느님만이 아실 뿐이다"라고 한 오리게네스의 말은 아직까지는 그대로 들어맞는다.

  히브리서 자체의 내용, 사상, 문학적인 특성 등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알아본 필자의 내력은 다음과 같다. 그는 사도시대 다음의 제2세대에 속하는 유대계 신자로서 당대의 유대계 학자인 필로와 비슷하게 알렉산드리아 교육을 받은 듯하다. 또 어떤 형태로든지 바오로의 영향을 받은 제자 그룹이나 공동체에 속하였을 것이며 디모테오와도 친분이 있었을 것이다. 그는 성서에 정통한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초대교회의 전례 전승과 신앙고백 전승 등 제반 전승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의 신앙은 굳건  하였고, 신학 역시 뚜렷한 개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자기 사상을 설득력 있게 체계적으로 전개할 줄 아는 문필가였다. 게다가 그는 풍부한 사목 경험과 열성을 겸비한 사람으로서 신자 공동체를 권위 있게 지도하고 가르칠 수 있는 지도자의 위치에 있었을 가능성이 짙다. 독자들과도 친분이 두터웠지만 직접적인 지도자는 아니었던 것 같다(13,24참조).

 

3. 문화적ㆍ종교적 배경

이제 필자 문제와도 직접 관계되는 본서의 문화적 내지 종교적 배경을 살펴보자.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학자들은 히브리서를 일반적으로 해외(그리스 세계)유다이즘의 문화 영역에서 씌어진 작품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꿈 란 에서 발견된 유적지와 사본에 대한 연구가 진척되면서 부분적이나마 공통점이 나타나자 사정은 달라졌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히브리서의 문화적 배경이 팔레스티나의 유다이즘일까, 아니면 헬레니즘계의 유다이즘일까 하는 문제가 크게 대두되고 있다.

  1) 꿈란 영역과의 관계

꿈란 사본의 일부는 그 표현이나 사상에 있어 히브리서와 비슷한 점이 다소 있다. 그 중에서도 새 계약이나 종말 시기에 내림 할 사제 적인 메시아 사상 등이 일맥 상통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히브리서를, 메시아를 기다리면서도 아직 예수를 메시아로 믿지 않는 꿈란 공동체 소속의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메시아이심을 증명하기 위하여 씌어진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최근의 연구 결과 양자 사이에는 사실상 직접적인 관계가 없음이 밝혀졌다. 부분적인 유사성의 이유는 양자가 똑같이 구약성서를 기초로 사상을 전개하기 때문이다.

  2) 영지주의와의 관계: 히브리서는 그리스도론

하느님의 백성의 안식(4,1-11), 순례하는 하느님의 백성 등 일부 사상과 표현에 있어 영지주의 적인 요소가 엿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유의할 점은, 우리에게 전해진 영지주의 계통의 문헌들은 시대적으로 보아 히브리서보다 후대의 것이다. 따라서 직접 영향을 받았다고 보기는 어렵고, 차라리 관계가 있다면 이른바 선(先)영지주의와 관련시키는 것이 옳다고 본다. 또 비록 저자가 영지주의 적인 요소를 이용했다 할지라도 그러한 안목으로만 히브리서를 해설하는 것은 부당하다. 영지주의 적 요소는 극소 부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3) 그리스 계 유다이즘과의 관계

히브리서는 그리스 문화권의 유다이즘의 특성을 띠고 있다. 즉, 이 책은 우의적이고도 예형적인 성서주석방법, 상반 개념의 빈번한 사용(그림자와 실체, 지상과 천상, 과거와 미래, 지나가는 것과 길이 머무는 것 등), 또는 그 형식이나 내용 등에 있어 그리스 문학과 사상에 매우 접근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유대의 묵시적인 요소, 랍비 사상 및 유대인 특유의 구체적이고도 사실적인 묘사 등 유다이즘의 색채가 강하다. 히브리서는 어느 면에서 헬레니즘의 옷을 입은 유다이즘 정신의 책이다. 그만큼 이 책은 유다이즘과 헬레니즘 문화 요소를 적절히 융화시키고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히브리서는 헬레니즘의 시나고가 강론 양식에 속하는데 그 대표적인 예는 제4 마카베오서와 필로의 저서들이다. 그러한 이유로 히브리서의 필자는 필로의 영향을 받았다는 학설도 있으나 그의 사상은 필로와 다를 뿐 아니라 복음 전승을 토대로 하고 있기 때문에 필로의 영역을 훨씬 앞지르고 있다.

  이상의 진술을 간단히 종합하면, 유다이즘과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을 동시에 받은 필자가 이들 문화적인 요소를 살리면서 그리스도의 신비를 설명한 책이 히브리서이다. 따라서 이들 문화들의 영향을 수긍하면서도 어느 특정 문화에 편중하는 것은 반대한다. 히브리서는 어디까지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완성된 성서적 계시와 이를 확인하는 초대교회의 신앙 전승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책이다.

 

4. 집필 연대와 장소

집필 연대와 장소는 필자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에 결론부터 말한다면 이 책이 언제 어디서 씌어졌는지에 대해서도 막연한 추측밖에 할 수 없다.

  학자들이 내세우는 연대는 바오로의 세번째 선교여행 직전인 50년대 초반에서부터 70년 이전,

80∼90년, 1세기 말 그리고 2세기초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 중에서 성전이 파괴되기 직전인 70년 이전 설과 그 이후인 80∼90년 설이 가장 유력시되고 있다.

  1) 70년 이전 설: 성전 파괴에 대한 암시가 전혀 없을 뿐 아니라 성전 예배에 관한 서술이 실제 체험을 묘사하는 듯이 매우 생동적이다(8,4-5; 9,9.25; 10,1-3.11). 게다가 성전 제사의 중단을 순전히 가상적인 예로 들고 있으며(10,1-3), 새로운 환난에 대한 말(12,1 이하)은 66년부터 계속된 유대 독립 전쟁을 암시하는 것 같다.

  2) 80∼90년 설: 흔히 연대 측정의 기준으로 삼는 성전 예배에 관한 생생한 묘사는 논의 대상이 안된다. 저자는 당대에 실시되고 있던 성전 예배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구약성서, 특히 율법서에 수록된 장막 예배를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9,2-5). 그리고 저자가 암시하는 새로운 박해는 유대전쟁이 아니라 도미치아노 치하(81∼96년)의 대 박해일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독자들은 이미 오랫동안 신자생활을 해 왔을 뿐 아니라(5,12) 제2 세대의 신자들이다. 그들의 지도자들은 이미 세상을 떠났으며(13,7), 그들은 디모테오를 잘 알고 있었다(13,23).

  이러한 요소들을 종합해 보면 70년 이후에 집필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90년 이후가 아닌 것은 거의 확실하다. 95∼96년경에 씌어진 클레멘스 1서가 분명히 히브리서를 인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집필 시기를 80∼90년 사이로 잡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집필 장소 역시 확실하지 않다. 편지 결문의 "이탈리아에서 온 사람들"(히브 13,24)이라는 말과 디모테오(히브 13,23)를 거론하는 것을 보면 필자가 그들과 함께 있었거나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렇다고 필자가 로마나 이탈리아에 있었다고 단정은 못한다. "이탈리아에서 온 사람들"이라고 해서 그들이 집필 시기에도 계속 이탈리아나 로마에 있었다는 말로만 알아들을 수는 없다. 브리스킬라와 아퀼라 부부(사도 18,2; 1고린 16,19)처럼 이미 이탈리아를 떠난 사람들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로마, 에집트, 에페소, 안티오키아 등이 거론되고 있으나 아무런 근거가 없다.

 

5. 독자

히브리서의 제목은 "히브리인들에게"인데, 이 제목대로라면 그 독자들은 히브리인들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이 제목을 붙인 사람은 필자 자신이 아니고 2세기 말경의 어느 신약성서 집성자이다. 아마 그 집성자는 책의 내용을 보고 독자들이 유대인들이었으리라 추측하고 이러한 제목을 붙인 것 같다. 이 제목을 처음으로 증언한 사람은 200년경의 판테누스이며, 그 이후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고대 필사본 중의 하나인 파피루스 46호 그리고 테르툴리아노 등도 이 제목을 사용하고 있다.

  제목을 떠나서라도 고대로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히브리서의 독자는 유대계 신자들이라는데 별 이의를 달지 않았다. 대제관, 제사, 그리스도와 모세의 비교, 계약 등 유대적 요소와 폭넓은 성서 인용과 해설 방식 등이 유대인들에게 가장 알맞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만일 독자들이 유대인들이었다면, 그들은 팔레스티나 본토(또는 예루살렘)에 살던 유대인들이었거나 본토 밖에서 살던 유대인이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고대 알렉산드리아 교부들과 현대의 일부 학자들은 독자를 본토(또는 예루살렘)에 거주하던 신자들이라고 한다. 최근에는 에세네파의 사제들, 또는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은 꿈란 회원들로 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미 위에서 설명한 대로 히브리서의 독자는 꿈란 공동체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또 그들은 예루살렘 신자들도 아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가난하여 타 교회의 도움을 받는 입장이었는데, 이 독자들은 오히려 이웃 신자들을 자주 도와주었다(6,10). 그리고 사도시대에 예루살렘 교회가 겪었던 박해와 이 책의 독자들이 겪었던 박해는 상황이 매우 다르다.

  본토 밖에 살던 유대계 신자라는 가설도 그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 이 책에서는 흔히들 주장하는바 독자들이 유다이즘으로 되돌아가려는 움직임을 경고하는 내용이 없다. 오히려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나 구원에 대한 적극적인 자세를 촉구하는 등 모든 신자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오늘날에는 독자를 이방계 신자, 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가리지 않고 단순하게 신자 공동체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무엇보다도 저자는 "유대인", "히브리인", "이스라엘", "이방인"등의 용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유대계 신자들의 관심사인 할례에 대한 말도 없다. 저자는 구약성서를 많이 활용하고 있지만, 당대의 신자라면 누구 나가 사도들의 가르침과 구약성서를 진리의 원천으로 삼았기 때문에 굳이 유대인이 아니라도 그만한 정도의 성서 지식은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참된 이스라엘, 선택된 백성, 구원 약속과 축복의 상속자(갈라 6,16; 1고린 10,1.11; 1베드 2,9; 로마 15,4)임을 자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독자들을 꼭 유대계 신자들로 보아야 할 결정적인 근거는 없다. 오히려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가리지 않은 일반 신자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이미 오래 전에 하느님께 대한 믿음, 회개, 세례, 안수, 부활, 영원한 심판 등의 기초적인 교리를 배워(6,1-2) 신자가 되었다. 그리고 신앙생활 초기에는 박해와 환난을 겪었지만 모든 어려움을 굳은 신앙으로 인내로이 극복하였으며 성도들에게 선행과 사랑으로 봉사하는 등 열성적이고도 착실한 신앙생활을 하였다(6,10; 10,32-34).  

  그런데 히브리서 집필 당시에는 이미 오랜 신앙생활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초보적인 교리 지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5,12) 선행과 사랑을 멀리하는 등 열성까지 식어 있었다. 따라서 신자들의 모임에 참석하는 것도 싫어하는 등 일종의 신앙 권태기를 맞고 있었다(10,25.35; 12,3-4.12-13). 더구나 박해의 위험까지 닥치고 있어서(12,1 이하) 지치거나 낙심할 우려도 있었다(12,3). 결국 "히브리인들에게"라는 명칭은 새로운 이스라엘이요 새로운 히브리인이기도 한"그리스도인들에게"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다고 본다.

  독자들이 살고 있던 장소로는 팔레스티나, 예루살렘, 고린토, 에페소, 안티오키아, 키프로스, 로마 등 여러 곳이 제기되고 있지만 정확한 정보가 없어 감을 잡을 수가 없다. 최근에 자주 거론되는 이탈리아(13,24)나 로마도 애매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단지 로마의 클레멘스가 이 책을 인용한 점으로 보아 로마일 가능성은 있다. 그 당시에 로마에는 크고 작은 신자 공동체가 여럿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한 공동체였을는지도 모르나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하다.

 

6. 문학 유형

고대교회의 전통을 따라 현대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히브리서를 편지라고 부른다. 그런데 정작 히브리서에서 편지 형식을 띤 곳은 책의 마지막 부분(13,18-25 또는 22-25)밖에 없다. 아마 이 마지막 부분과 바오로의 저서라는 통념 때문에 편지로 보았던 것 같다.

  편지 형식의 결론이 있으면 편지 형식의 서론도 있게 마련인데 이 책의 첫 부분(1,1-4)은 어느 모로 보나 편지 서론이라고 할 수 없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편지 서론이 중도에 떨어져 나갔거나, 아니면 누군가가 일부러 없애 버렸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하지만 서론의 내용과 문체를 분석ㆍ검토하고 본론과 연결시켜 보면 현재의 첫 부분이 그 자체로 훌륭한 서론이며, 다른 서론이 더 있었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또 일부 학자들은 저자가 집필을 끝내면서 독자들에게 보낼 때에 편지 결론을 덧붙였거나 아니면 제삼자가 덧붙여 일종의 인위적인 편지 내지 서간으로 만들었다고도 한다.

  이런 식의 이론은 고대 서간 법칙을 기계적으로 적용시킨 것에 불과하다. 마지막 부분의 편지 결론만으로 작품 전체의 문학 장르를 바꾼다는 것은 좀처럼 납득하기 어려운 설명이다.

  그 외에 신학 논문으로 보는 사람도 있지만 별 호응을 못 받는다.

  엄밀히 말해 이 책은 대부분의 학자들이 주장하듯이 편지나 서간이 아닌 강론집이다. 저자는 비록 그의 강론을 문서화하였고, 또 편지 형식의 결론을 삽입하긴 하였지만 독자들에게 글을 통해 강론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었음이 분명하다. 그는 독자들의 사정을 감안하면서(5,11 이하; 6,9-10; 10,25.32 이하; 12,4-5)초대교회의 대중 강론, 유대 랍비들의 교육방법, 알렉산드리아 웅변술 등 여러 방법을 응용하여 교회 사상 첫번째의 완전한 강론집을 만들었다.

  고대 강론에는 교리와 훈화 내지 사목적 권고가 번갈아 나오는데 히브리서는 바로 이런 강론 양식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2,1-4; 3,7-4,16; 5,11-6,12; 10,19-39; 12,1-13,17). 그리고 신약성서의 서간 등 편지에서 흔히 나오는 "쓴다"라는 표현이 없는 대신 강론의 전형적인 표현인 "말한다"라는 표현이 자주 나온다(2,5; 5,11; 6,9; 8,1; 9,5; 11,32). 나아가 이 작품에서 계속 쓰이는 "나", "우리", "너희"등의 표현도 일정한 청중을 의식한 강론 용어들이다. 저자 자신도 책 끝에 그의 글을 편지라고 하지 않고 "권유의 말"(13,22)이라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라기보다는 <교우들에게 보낸 강론>이라고 할 수 있다.

 

7. 언어, 문체, 구조

히브리서의 언어는 바오로의 편지와는 달리 매우 정확하고 정선되었으며 그 어휘도 매우 풍부하다. 문장이나 항목의 구성도 매우 조직적이어서 내용상 다소 어려운 면은 있지만 논리가 정연하다.

  전통적인 유대 성서 주석방법을 따라, 성서의 인물이나 사건 등을 통해 신앙의 진리와 생활 지침을 가르치는 예형법과 우의법을 잘 쓴다. 그 외에도 질문, 언어 유희, 상반 개념 등을 사용하여 논리를 설득력 있게 전개시킨다. 이러한 문체는 알렉산드리아의 유다이즘의 특징적인 문체이다.

  히브리서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는 그 특별한 구조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성서 본문의 전체나 부분의 의미를 올바로 파악하는데는 그 구조 파악이 매우 중요하다. 특히 히브리서의 경우에는 그 조직적인 구조 때문에 특별히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오늘날 학자들이 제시하는 히브리서의 구조를 집약하면 책의 의미와 내용을 중심으로 설정된 논리적 구조(또는 사상적 구조)와 문학적인 표지를 중심으로 한 문학적 구조로 양분할 수 있다. 물론 논리적 구조라고 해서 문학적 특징을 배제한다거나, 문학적 구조라고 해서 의미나 사상을 도외시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단지 그 경향을 따라 구분했을 뿐이다. 여기서는 본문 이해에 도움이 되겠기에 양편의 대표적인 구조를 함께 제시하겠다.

 

1) 논리적 구조

과거에는 일반적으로 바오로 편지 형식을 따라 히브리서를 크게 교리부분(1,1-10,18)과 교훈 부분(10,19-13,21)으로 나눴다. 그러나 이러한 단조로운 구분법은 강론 형태로 된 히브리서에는 맞지 않음이 판명되었다. 이미 위에서 지적한 대로 교리 부분 사이사이에 그에 상응하는 교훈 부분이 나오기 때문이다(2,1-4; 3,7-4,11; 4,14-16; 5,11-6,12; 10,19-39; 12,1-13,17).

  그래서 최근에는 독일어 계통의 학자들은 개별적인 차이는 있지만 히브리서를 그 내용과 사상에 따라 세 항목으로 나눈다.

 

 Ⅰ. 1,1-4,13    천사와 모세보다 높은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들읍시다.

 Ⅱ. 4,14-10,31  천상 성소의 대제관께 나아가 그분께 대한 믿음을 굳게 간직합시다.

 Ⅲ. 10,32-13,25 믿음의 시작이요 마침이신 예수 그리스도안에 굳건히 머무릅시다.

 

이 논리적 구조의 특징은 보는 바와 같이 각 항목의 주제가 뚜렷하며 각 주제는 거기에 알맞은 교훈과 연결되어 있다. 교훈은 대개 항목의 처음과 끝에 나온다. 그리고 일부 반대는 있지만 이 구조에서는 교훈이 각 항목과 책 전체의 절정을 이룬다. 그러니까 이 구조대로 하면 필자가 신앙 권태기를 맞은 위에 새로운 환난에 직면한 독자들에게 믿음의 내용과 독자들의 신분과 직무를 밝혀 그들이 다시금 활기 있고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도록 독려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이 논리적 구조론 자들은 히브리서의 문학적 구조의 일면을 인정은 한다. 그리고 문학적 구조가 필자의 의도를 아는데 큰 도움이 된다는 사실도 수긍한다. 그러나 이들은 히브리서의 구조를 기계적으로 그리고 수학적으로 계산하여 설정한다는 것은 지나치게 인위적일 뿐 아니라 저자가 사용한 구조방법을 확대 적용한 것이라고 평한다.

 

2) 문학적 구조

불어권을 중심으로 영어권 학자들로부터도 널리 호응을 얻고 있는 문학적 구조에서는 히브리서를 그 안에 내포된 각종 문학적 표지들을 철저히 분석하여 다섯 항목으로 나눈다.

  Ⅰ.       1,1-4        서론

           1,5-2,18      천사들의 이름과 온전히 다른 이름

  Ⅱ.  가   3,1-4,14      성실한 대제관이신 예수

      나   4,15-5,10     자비로운 대제관이신 예수

  Ⅲ.  ⊙   5,11-6,20     시작 교훈

       가   7,1-28       멜기세덱의 본을 따른 대제관

       나   8,1-9,28     완성에 이름

       다   10,1-18      영원한 구원의 원인

       ⊙   10,19-39     끝 교훈

  Ⅳ.   가   11,1-40     옛 조상들의 믿음

       나   12,1-13     필요한 인내

  Ⅴ.        12,14-13,19  올바른 길의 열매

  Ⅵ.        13,20-25     결론

 

이 문학적 구조의 특징은 히브리서에 나타난 모든 문학적 표지들을 세밀히 분석하여 그 표지에 따라 구조를 설정한 데에 있다: 주제 예고(1,4; 2,17-18; 5,9-10; 10,36-39; 12,13), 항목의 특징을 나타내는 단어(천사, 믿음 등)나 문장, 문학 유형(교리, 교훈)의 변화, 항목 구분을 나타내는 단어나 문장의 반복(항목이나 세부 항목의 처음과 끝에 나타남: 1,5.13; 12,1.13 등), 균형적인 배열(가 나 또는 가 나 다).

  이들 표지는 주제와 밀접히 연결되어 주제를 정확히 파악하게 하고, 각 항목간의 구분 점과 연결점, 진술 내용의 진행과정과 강조점 등을 명확히 제시하기 때문에 본문 전체와 부분 해설에 큰 도움을 준다. 그리고 이러한 작품 기법은 히브리서 저자만의 독특한 방법이 아니라 성서 문학 전승(특히 지혜서), 그 중에서도 알렉산드리아의 유대 문학 전승에서도 가끔 발견되는 방법이다.

  그러나 큰 단점이라면 이러한 방법을 터득하여 모든 문학적 표지들을 정확히 찾아내고 증명하기가 매우 까다롭고 또 실수할 위험성이 크다는 점이다. 또 반대자들이 말하듯이 과연 필자가 설계도를 작성하듯이 전체 구성은 물론이요 문장이나 단어에 이르기까지 자로 잰 것처럼 작품을 구상하고 집필하였겠는가 하는 의문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학자들로부터 호응을 받는 것은 그토록 철저한 고증과 분석을 통해 단순히 인위적인 구조가 아님을 증명하였고, 또 그만큼 본문 이해에 큰 도움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1. 당신의 아들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느님(1,1-2,18)

   1) 서론: 하느님이 아들을 통해 말씀하심(1,1-4)

   2) 천사들보다 위대하신 하느님의 아들(1,5-14)

   3) 구원의 말씀을 명심함(2,1-4)

   4) 인간의 형제이신 그리스도(2,5-18)

2. 성실하고 자비로운 대제관이신 예수(3,1-5,10)

   1) 모세보다 더 성실하신 예수(3,1-6)

   2) 하느님의 안식에 들어가기 위한 자세(3,7-4,13)

   3) 대제관이신 예수께 대한 확신(4,14-16)

   4) 인간을 동정하는 대제관이신 예수(5,1-10)

3. 그리스도의 대제관직 이해에 필요한 예비 훈화(5,11-6,20)

   1) 성숙한 신앙생활에 대한 권고(5,11-6,12)

   2) 하느님의 확실한 약속과 이에 대한 희망(6,13-20)

4. 멜기세덱의 본을 따른 대제관이신 예수(7,1-28)

   1) 대제관 멜기세덱(7,1-10)

   2) 완전하고 영원한 대제관이신 예수(7,11-28)

5. 대제관이신 예수의 봉사(8,1-10,39)

   1) 새롭고 더 좋은 계약의 대제관으로서의 봉사(8,1-13)

   2) 옛 계약의 제사(9,1-10)

   3) 새 계약의 제사(9,11-28)

   4) 한 번이자 절대적인 효력을 갖는 제사(10,1-18)

   5) 착실한 신앙생활(10,19-39)

6. 믿음과 인내(11,1-12,13)

   1) 조상들의 믿음(11,1-40)

   2) 시련중의 인내(12,1-13)

7. 참다운 그리스도인의 생활(12,14-13,17)

   1) 하느님의 은총과 소명에 맞갖은 생활(12,14-29)

   2)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봉사 적인 삶(13,1-17)

8. 맺음말(13,18-25)

   1) 기도 요청과 축복(13,18-21)

   2) 마지막 권고와 인사(13,22-25)

 

8. 주요 신학

히브리서의 신학은 크게 신앙의 진리에 관한 교의적인 요소와 그리스도인의 실생활에 관한 지침인 훈화적인 요소로 나뉜다. 저자는 교의를 가르치면서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교의 설명을 멈추고 그에 상응하는 그리스도인의 길을 제시한다. 교의와 훈화 두 요소는 서로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히브리서에는 그리스도교의 주요 교의가 많이 포함되어 있지만 그리스도론, 특히 대제관이신 그리스도론이 책의 주제를 이루고 있다. 그 외에도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 그분의 죽음의 의미, 속죄의 제사, 새 계약 등이 가끔 거론되지만 대부분 그리스도의 제관직을 설명하는 보충 요소들이다. 그리스도론과 긴밀히 연결되는 훈화는 대제관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된 그리스도인이 걸어가야 할 신앙의 길을 제시한다(2,1-4; 3,1-4,11; 4,14-16; 5,11-6,20; 10,19-39; 12,1-13,17).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자세, 믿음의 생활, 고통중의 인내, 선행, 사랑, 공동체와의 친교, 거룩한 생활 등이 그 주요 내용들이다.

 

1) 자비롭고 성실한 대제관이신 그리스도

  (1) 히브리서를 읽으면 "구약시대에는 대제관이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 신약의 그리스도께서도 과연 그러한 대제관이셨던가?" 라는 질문에 대한 상세한 해답서 같은 인상을 준다. 그만큼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스도께서 대제관이시며 중재자이시라는 논증으로 일관되어 있다. 신약성서의 어떠한 책도 그리스도의 제관직을 이토록 본격적으로 다룬 책은 없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제관 또는 대제관이라는 단어는 복음서 등 신약성서에 드물게나마 가끔 나오지만 예수를 지칭하는 경우는 한번도 없다. 바오로의 편지에는 아예 하번도 나타나지 않는다. 이에 비해 히브리서는 이 단어들을 빈번히 사용할 뿐 아니라(제관 14번, 대제관 17번), 거의 매번 그리스도의 고유 칭호로 쓰고 있다.

  저자가 그리스도의 대제관직을 책의 주제로 삼은 이유는 신앙의 권태기를 맞은 당대의 독자들을 훈계하고 격려하는데는 대제관으로서의 그리스도가 그분의 참 모습과 역할을 가장 훌륭하게 드러낸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히브리서는 저자가 독자들이 대제관으로 믿고 고백하는 예수를 깊이 생각하고 본받도록 마련한 강론집이다(3,1).

  당대의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속죄의 죽음이며, 그분의 희생제사가 성전의 속죄제사를 종결시켰음을 잘 알고 있었다(1고린 15,3-5; 갈라 1,4; 로마 3,25 등 참조).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리스도를 대제관이라 부르기엔 어딘가 석연치 않다고 느꼈다. 그분은 가문에 속하지 않았고(7,14), 율법에 따라 제관으로 임명된 적도 없으며(8,3-4), 또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한번도 제관 직무를 수행하시지 않았다. 그래서 저자는 구약의 대제관과 그리스도와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열거하고 이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참되고 영원한 대제관이심을 밝힌다.

  (2) 제관이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사람들 가운데서 뽑히어 사람들을 위하여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며 그분을 섬기는 사람, 곧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이다(5,1-5). 이러한 제관의 본질과 역할을 두고 그리스도를 고찰하여 볼 때 그분이야말로 참되고 완전한 대제관이시다.

  먼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보면,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과 똑같은 살과 피를 가진 사람으로 사셨다(2,14). 그분은 죄를 제외하고는(4,15)모든 점에 있어서 사람들 가운데 한 분이셨고 참된 사람이셨다(2,17). 나아가서 사람들이 흔히 겪는 온갖 시험과 유혹도 겪으시고(4,14) 심지어 극심한 죽음의 고통까지도 겪으셨다(2,9; 5,7-8). 이렇게 온전한 인간으로서 모든 나약, 시험, 고통 등을 다 체험하신 분이기에 인간의 처지를 사실 그대로 이해하고 동정하며 함께 아파하시며 도와주실 수 있는 분이다(2,18). 그분은 연약한 인간을 대변하는 자비로운 대제관이시다(2,17).

  한편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보면, 그리스도는 하느님과 똑같은 본질을 갖고 계신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온 세상을 창조하셨고 보존하시며, 만물의 상속자이시다(1,2-3).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대제관의 영광스러운 자리를 스스로 차지하지 않으시고(5,5) 그 직분에 필요한 절차를 다 밟으셨다. 이스라엘 백성의 인도자 모세와 같이 하느님께서 맡기신 인류 구원사업에 끝까지 성실하셨다(3,2.6). 하느님의 아들이셨지만 고난과 죽음을 통해 복종하는 것을 배우셨다(5,7-8). 구약의 제관들은 짐승의 살과 피로 속죄제사를 거행하였지만, 그리스도는 당신 자신의 살과 피를 속죄의 제물로 바치셨다(9,26). 이와 같이 단 한번 당신 자신을 바치심으로써 인류의 죄를 없애 주시고 그들의 양심을 깨끗하게 씻어 주셨으며 영원한 구원을 마련하여 주셨다(9,11-14,27-28). 이렇게 고통과 복종과 희생제사를 통하여 완전하게 되신 후에 하느님으로부터 멜기세덱의 본을 따르는 대제관으로 임명되신 것이다(5,6.10). 그분은 하느님의 절대적 신임을 받는 성실한 대제관이시다(3,6).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하느님 및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볼 때, 그분은 제관으로서의 자격과 요건을 완전무결하게 갖추신 완전한 대제관이시다. 그분은 이제 영원한 천상의 대제관이자(7,24) 새 계약의 중재자로서(9,15) 전능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아 계시다(1,3). 그리고 항상 살아 계시면서 당신에게 복종하는 모든 사람들을 참된 지성소인 하늘나라에까지 안전하게 인도하는 중재자의 일을 하고 계시다(7,25).

 

2) 대제관이신 그리스도를 본받는 그리스도인의 길

  히브리서에서 훈화는 책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내용도 교의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그 만큼 이 책에서 훈화는 교의 못지 않게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히브리서의 목적이 교의냐 훈화냐 하는 문제를 두고 학자들이 상반된 주장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저자가 이토록 훈화를 중요시한 것은 그가 이 책을 집필할 때에 그의 독자들은 이미 신앙생활의 권태기에 접어들어 처음에 가졌던 확신과 열성도 없었고 멀지않아 닥칠 시련을 두려워하고 있었으며 미래의 영광에 대한 확고한 희망도 없었다. 이러한 현상을 직시한 저자는 독자들을 올바로 훈계하고 격려하려면 대제관이신 그리스도의 모습과 역할을 상세히 설명하고 그분을 본받게 하는 것이 가장 필요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1)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얼마나 고귀한 신분을 부여받았는지 똑바로 알아야 한다. 그들은 대제관이신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와 죽음으로 완성된 희생제사의 힘으로 죄의 사함을 받고 깨끗한 양심을 지녔으며(9,14-15.26-28; 10,12) 죽음의 세력에서 해방되었다(2,15). 그리고 천상 선물, 특히 성령을 받아(6,4) 거룩하고 완전한 사람이 되었으며(10,10.14),하느님의 좋은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미리 체험하였다(6,5). 그들은 먼저 하늘 성전의 지성소에 들어가시어 생명의 길을 열어 주신 그리스도(6,19-20)의 중재로 미구에 천상 성소에 들어가(10,19-20) 하느님이 당신 자녀들에게 약속하신 영광에 참여하고(2,10), 영원한 유산을 얻을 확고한 희망 속에 사는 사람들이다(9,15). 그들을 이 구원에 참여케 한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는 한 번이자 영원한 효력을 가진다. 그러나 그들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아직까지 완전하게 구원에 이르지 못하였기 때문에 최종 목적이 달성되는 날까지 구원의 창시자요 모범이신 그리스도를 굳게 믿고 성실히 따라야 한다.

  (2) 먼저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올바른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그들은 주님께서 선포하시고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전해 준 구원의 말씀을 듣고 믿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2,3). 하느님께서는 당신 말씀의 위력과 가치를 표징, 기적, 권능, 성령의 선물 등을 통하여 확증해 주셨다(2,4). 이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을 속속들이 알고 옳게 판단하고 인도한다(4,11-12).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말씀을 항상 명심하여 듣고 복종하며 구원에 이르도록 노력해야 한다. 불행히도 그들이 이 말씀을 소홀히 한다면 무서운 징벌을 피할 수가 없다(2,2-3). 모세의 인도로 광야 여행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말씀을 불신하고 그분께 반역한 탓에 약속된 안식을 누리지 못하였다(3,7-11.16-19).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인 그리스도인들도 하느님의 약속의 말씀을 듣고 믿어 과거의 그릇된 생활을 청산한 사람(4,2)답게 살지 않으면 무서운 심판과 뜨거운 불의 형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6,6).

  (3) 그리스도인들은 진리의 말씀을 들어 깨닫고(10,26)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확신하여 희망 속에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들이다(11,1-2). 그들은 믿음의 대상이요 모범이신 예수께서 당신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위하여 끝까지 하느님을 신뢰하고 충성을 다하셨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3,1-6).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 바를 꼭 이루어 주신다는 확고한 믿음과 희망을 가지고 약속의 상속자가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임무이다(6,10-12). 그들은 아브라함, 이사악 등 성조들과 모세, 다윗 등 영도자들과 기드온, 삼손 등 판관들과 예언자들 같은 믿음의 조상들이 보여 준 표양을 본받아야 한다(6,13-15; 11장).

  믿음을 굳게 간직하려면 많은 고통이 따른다. 그렇다고 고통을 못 이겨 낙심하거나 쓰러져서는 안 된다(12,5). 공통과 환난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보여 주시는 사랑의 표지이다(12,6-7). 고통은 인간을 정화시켜 하느님을 닮은 거룩한 존재로 만들어 준다(12,10). 비록 현재는 고통을 참기 어렵겠지만 이를 이겨내면 멀지않아 반드시 평화의 열매를 얻게 될 것이다(12,11).

  믿음의 근원이시며 완성 자이신 예수께서도 많은 고통을 겪으셨다. 그분은 장차 누릴 기쁨을 생각하며 부끄러움도 상관하지 않고 십자가의 고통을 견디어 내셨기에 지금은 하느님의 옥좌 오른편에 앉아 계시다(12,2-3; 1,3). 독자들도 신자가 된 후 초기에는 온갖 고난과 모욕과 환난을 당하면서도 미래의 보상에 대한 약속을 굳게 신뢰함으로써 인내하였다(10,32-36). 그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믿음을 가지고 어려움을 인내로이 극복하여야 한다(12,5-7).

  (4) 저자는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복종과 믿음의 생활을 강조하면서 독자들의 윤리 생활, 사회 생활, 공동체 생활 등 실생활상의 자세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그 가운데서 그가 특히 강조하는 요소는 선행과 사랑의 실천이다(6,10; 10,25; 13,1.16). 형제들에게 선행을 베풀고 꾸준히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나그네를 후대하며(13,2) 감옥에 갇히거나 학대받는 사람들을 성실히 돌본다(12,3). 그는 모든 사람과 함께 평화를 추구하고(12,14) 형제들의 모임에 적극 참여하여 그들과 사귀고 격려하며(10,25)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다(13,16).

  그리스도의 피로 거룩하게 된 사람들(10,29)은 자신들의 거룩한 신분에 위배되는 음란(12,16; 13,4), 불경(12,16), 돈에 대한 애착(13,5)등 모든 종류의 죄스런 생활을 피하여 거룩한 주님을 뵈올 수 있도록 처신해야 한다(12,14). 또 올바른 신앙공동체 생활을 영위하기 위하여 형제들의 모임에 부지런히 참석하고(10,25)지도자들을 따르고 그들의 말에 복종하여야 한다. 지도자들은 신자들의 영혼을 책임지고 장차 하느님께 자기들이 한 일을 아뢸 사람들이다. 따라서 그들이 맡은바 사명을 기쁘게 또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적극 협조하여야 한다(13,17).

  저자는 그밖에 올바른 신앙생활을 독려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와 성서의 위인들 외에도 그들을 신앙으로 이끌어 주었던 죽은 지도자들(13,17)과 신자 자신들의 과거의 열성적인 생활(6,10-12)도 상기시키다. 나아가서 이 모든 교훈을 종합하는 뜻에서 하느님을 충실히 섬기라고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께 참다운 제사를 바친 대제관이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경건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하느님을 찬양하고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예배를 드려야 한다(13,15).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 주시는 제물이란 그분의 뜻을 따르고, 당신 몸을 제물로 바치신 그리스도처럼 깨끗하고 거룩한 생활을 하며 선행과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13,15-26).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살면 선구자로 하늘 성전의 성소에 들어간 영원한 대제관이신 예수(6,20)께서 그들도 안전하고 확실하게 그곳으로 돌아가도록 인도해 주실 것이다(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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