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강론

연중 제15주일 농민주일(가해) 마태 13,1-9(23); ’23/07/16

인쇄

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23-07-01 ㅣ No.5450

연중 제15주일 농민주일(가해) 마태 13,1-9(23); ’23/07/16

 

 

우리는 가끔 옛날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옛날에는 잘 했어요.” “옛날에는 정말 좋았어요.” 그런데~! 옛날은 시간이 지나듯 가버리고, 오늘은? 지금은? 그 옛날의 영화에 어울리지 않게 그냥, 아니 어쩌면 과거 우리의 결과가 오늘의 이 모습이라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우리는 더 약해지고 과거의 영화와는 어울리지 않게 점점 초라해 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독수리의 수명은 70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모든 독수리가 다 70년을 사는 것은 아니랍니다. 몇 마리만 제 수명을 다 살 수 있답니다. 그 몇 마리는 40년이 지난 후에 아무도 몰래 바위산의 꼭대기로 올라가, 자기 부리로 바위를 찍어 두꺼워진 자기 부리를 다 쪼개 새 부리가 나오게 하고, 새로 나온 부리로 자기 발톱을 찍어 발톱도 새롭게 하고, 새 발톱으로 날개를 다 뜯어서 새로운 날개로 만들어 새로운 생애를 살기 위한 준비를 시작한답니다. 그렇게 자기를 재생시킨 독수리가 70년의 수를 다 누리게 된답니다.

 

독수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어제나 과거의 영화에 만족하지 않고, 오늘도 내일도 매일매일 날마다 우리의 나약해진 육과 안락하고 풍요한 오늘의 내 처지 때문에 더 이상 도전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고, 꾸준하고 충실히 계속 정진하고 단련하지 않는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라야 한다는 것을!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진정한 인생의 길을 안내하고, 생명을 가져다주는 주님의 말씀이라는 씨와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태도와 그 말씀과 함께하는 우리 인생의 역사를 밭에 비유하여 말해주십니다.

 

,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마태 13,3-4) 그리고 이어지는 구절에서 그 비유를 이렇게 풀이해 주십니다. “누구든지 하늘 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19) 결국 예수님의 좋은 말씀을 전해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현실과 어긋나고 심지어는 반대되는 상황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그리스도교 신비의 영역에 대해 인정하지도 못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일 수 있습니다.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5) 그리고 그 비유를 이렇게 풀이해 주십니다. “그는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그러나 그 사람 안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그는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20-21) 결국 성당에 나오는 것이 자기에게 경제적이고도 현실적으로 이익이 되면 나오고, 그렇지 못하거나 오히려 손해를 보면 안 나오는 사람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는 성당에 나와 위로도 받고 좋은 동료들이라도 만나서 함께 하기를 바라고 나왔지만, 자기가 원하는 만큼의 위로를 받지 못했다거나, 좋은 친구를 만나지 못했거나, 아니면 함께 일하다가 오히려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여기고 섭섭한 감정을 간직한 채 떠나는 사람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7) 그리고 그 비유를 이렇게 풀이해 주십니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22) 결국 이 세상에 자기 하고 싶은 일과 실제로 하는 일이 많아서, 성당에 나오지 못하는 사람을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성당에 나오는 사람만이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이라고 할 수 없지만, 마음에만 간직하고 실제 삶에서 행동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사람 역시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8) 그리고 그 비유를 이렇게 풀이해 주십니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23) 즉 주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이고 그 뜻을 깨달아 실제 자기 삶을 통해 주님의 말씀을 이루고 실현함으로써 하늘나라를 시작하고 이미 지금 여기서 벌써 하늘나라의 삶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이제 남은 수를 다 누리기 위해 오늘 자기 부리와 발톱과 깃털을 스스로 짓이겨 새로 만들어내는 독수리처럼, 과거와 옛날이라는 두껍고 무겁기만 한 영예의 옷을 벗어 던지고, 다시 한번 주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 열매를 맺는 좋은 땅’(23)이 되기 위해 “(들을) 귀 있는 사람”(9)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두 번째 독서에서 사도 성 바오로는 로마 신자들에게 피조물이 허무의 지배 아래 든 것은 자의가 아니라 그렇게 하신 분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희망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피조물도 멸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로마 8,20-21) 라고 말합니다. 성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우리의 미래와 구원에 대한 희망을 안겨주시는 주님을 믿고 의지하며, 우리의 희망을 이루기 위해 각고의 인내로 새로 납시다.

 

지금까지의 생애에서 우리가 체험해 왔듯이, 어릴 때나 부모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해주셨지, 성인이 된 지금, 누가 우리의 생애를 대신 살아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누가 대신 채워주지도 않습니다. 주님도, 주님의 은총에 감사드리지 않고, 주님께 찬미를 올려드리지 않고, 불평과 불만 그리고 자기 불만족으로 마치 자해하듯 자신을 깍아 먹고, 주위와 사회를 탓하는 이들에게서는 그 닫힌 마음 때문에 아무 일도 하시지 못합니다. 주님께서는, 주님께 그리고 형제자매들에게 마음을 열고, 생애와 존재 자체로 감사드릴 것을 찾으면서, 그 관계를 되새기며, 함께하고자 하는 이에게 은총과 축복을 주실 수 있으십니다. 아니, 이미 내게 주어진 은총과 축복이, 주님과 형제자매들에게 감사하며 주님의 뜻을 실현하고자 하는 내 안에서 싹트기 시작하고 기지개를 켤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으시려거든 주님께 다가가십시오. 그리고 주님께 청하십시오.

저를 사랑해주시고 축복해주시고 이끄시는 주님,

오늘 제가 이러이러한 일을 하고자 하는데,

이 일을 하고자 하는 제 마음이 주님의 뜻 안에 있다면 받아 주시고,

주님의 뜻 안에 없는 것이라면 수정해 주시어 주님의 뜻에 맞게 변화시켜 주시며,

이 일로 말미암아 저뿐만 아니라 주님과 형제자매들에게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기회가 되도록 허락해 주시고,

축복해주시며,

친히 함께하시어,

이루어 주소서.

아멘.’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3,9)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4 0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