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강론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신심미사 (가해) 마태 10,37-42; ’23/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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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23-06-14 ㅣ No.5436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신심미사

(가해) 마태 10,37-42; ’23/07/02

 

 

  

 

 

 

김대건 신부님이 태어나신 1821년에는 이미 한국 사회에서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고도 20여년이 지난 이후입니다.

18006월 천주교에 우호적이었던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11세에 즉위하자 노론벽파인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는 섭정을 통해 천주교도들과 남인 시파를 없애고자 했습니다.

1801(신유년) 국상이 끝나자, 전국에 '오가작통제'를 통해 천주교인들을 잡아들였습니다. 이때 초기교회 지도자인 정약종, 홍락민, 최창현, 홍교만, 최필공, 이승훈 6명은 참수되고, 이가환, 권철신은 옥사하였고, 정약용, 정약전은 배교로 간주하여 경상도와 전라도로 유배되었습니다. 충청도 `내포의 사도' 이존창도 참수되었습니다.

다음해 한국에 처음 들어온 중국인 주문보 신부가 자수해 참수되고, 주 신부님을 6년간 헌신적으로 도왔던 초대 여성회장 강완숙 골롬바도 아들 홍필주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었습니다. 전주의 유항검 이 누갈다 동정부부와 천주교 신앙의 자유를 위해 서양이 개입해야 한다는 백서를 쓴 황사영도 순교했습니다.

신유박해로 희생된 자들의 수는 처형된 자가 약 100, 유배된 자가 약 400명으로 도합 500명에 달했습니다. 이 박해로 교회의 지도급 인사들이 거의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살아남은 교인들도 유배를 당했거나 생명유지를 위해 산간벽지로 피신험으로써, 외적으로는 무너진 것처럼 보였습니다만, 꾸준히 교회를 이루어 왔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배경을 짊어지신 김 신부님은 1821821일 내포지방 `솔뫼' 마을, 즉 현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에서,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와 어머니 고 우술라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명은 재복 본명은 `지식'이었습니다. 김 신부님은 6세 때 박해를 피해, 경기도 용인군 남곡리 `골배마실'로 이사합니다.

183615세 때 그 곳 `은이 공소'에서, 모방 나 신부님으로부터 안드레아라는 세례명으로 성세성사를 받고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최양업 토마, 최방제 방지거와 함께 중국의 마카오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183767일부터 1842215일까지 마카오에서 신학공부를 하던 중 민란으로 18378월과 183946일 두 번에 걸쳐 필리핀의 마닐라로 피난했습니다. 한편 최 방지거는 18381227일 말라리아에 걸려 병사했습니다. 18442월말 김 신부님은 조선 입국로 개척을 위해 훈춘을 방문했습니다,

김 신부님은 18441217일 당시 조선교구 임시 교구본부였던 만주 소팔가자에서 부제품을 받았습니다. 1845817일 상해 `김가항'에서 고 페레올 주교님께 사제수품을 받았습니다. 1845824일 상해 횡당성당에서 첫미사를 봉헌하고 31일에 라파엘호를 타고 928일 제주도를 거쳐 1012일 강경 나바위를 통해 입국했습니다.

김 신부님은 184511월부터 1846413일까지 경기도 이천의 골배마실과 은이공소를 중심으로 약 1년간 사목생활을 하셨습니다. 김 신부님은 최양업 부제와 다른 신부들을 입국시키려고 배편으로 서해로 나갔다가 순위도에서 체포되어, 고초를 당하시다가 1846916일 군문효수형을 받아, 새남터에서 순교하시고, 1026일 미리내에 안장됐습니다.

신부님은 1857923일에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가경자로 선포되었고, 192575일 교황 비오 10세에 의해 복자품에 오르셨습니다. 19491115일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에서는 김 신부님을 한국 성직자들의 주보로 결정하고, 75일을 축일로 지내기로 했으며, 한국 천주교 창설 200주년의 해인 198456일 여의도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 되셨습니다.

 

어찌보면, 김대건 신부님은 자신이 관헌에 잡혀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그야말로 악착같이 귀국하여, 그 다음 해인 1846년 병오박해 때 순교하셨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생애를 되돌아보면서 느끼는 것은 '사제 생활 1', '사목 생활은 겨우 5개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9년 동안 고생 고생 공부하고 1년여 남짓한 사제생활을 하고 당신 생애를 마감하셨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참으로 안타깝고 아쉬움이 가득합니다. 조금만 더 사셔서 커다란 업적을 남기실 수도 있었는데,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분은 금방 데려가시는 것만 같아 야속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김대건 신부님의 생애를 되돌아보면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신부님께서는 한평생 오직 하나 '하느님을 사랑하고 또 그 하느님의 사랑을 형제들에게 전하는 일에 일생을 바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주님께 흔들리지 않는 굳은 믿음으로 죽기까지 신뢰하고 의지하셨습니다.' 실제로 그분은 수차에 걸친 귀국행에서 죽음의 순간을 여러 번 맞았지만, 의식을 잃으면서까지 주님과 성모님께 기도하셨고, 그 덕분에 다시 살아서 돌아가실 수 있었고, 마침내 사제가 되어 순교의 영광에까지 이르셨습니다. 김대건 신부님께서 한 번은 우리나라에 들어오려는 포교여행 중에 배가 표류하게 되었을 때, 신부님은 성모님께 간절히 기도하셨고, 구사일생으로 살아서 중국으로 되돌아가셔서는, 한국 교회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님'께 봉헌하셔서, 우리 교회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님'을 주보성인으로 모시고 매년 128일 축일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아울러 장상과 스승님들께는 깍듯한 존경과 순명을, 최양업과 동료 사제들에게는 부모님을 대신 돌보는 형제적인 사랑을, 평신도들에게는 참 목자로서 순교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은 단지 선교뿐만 아니라 신자들이 일상에서 겪는 갖가지 어려움에 깊이 동참하고 배려하심으로써 아버지다운 사랑으로 사목하셨습니다. 그분은 서울 한양에서 1845327일 외방전교회 대표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열 번째 편지에서, “조선에서는 어린 아기들의 대부분이 반점으로 얼굴이 흉해지는 병(즉 천연두)으로 죽어 가는데, 그 병을 퇴치할 수 있는 처방을 저에게 명확히 적어 보내 주시기를 스승님께 청합니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분은 박해의 순간에도 교리전달 뿐만 아니라, 신앙의 생활화로 성숙된 신앙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사실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이며 죽는 것이 이득입니다. 그러나 내가 육신을 입고 살아야 한다면, 나에게는 그것도 보람된 일입니다. 그래서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이 둘 사이에 끼여 있습니다. 나의 바람은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편이 훨씬 낫습니다.”(필립 1,21-23)라고까지 말합니다. 그러므로 지상에서 볼 때 죽음은 하나의 낭패요 마침으로 보이지만, 거꾸로 하느님 나라에서의 탄생이라는 시점에서 본다면, 죽음은 새로운 탄생의 순간인 것입니다. 특별히 순교를 하느님의 뜻을 따른 예수님의 희생제사와 연결시켜 생각할 때 더더욱 그렇습니다.

순교자들의 전기를 접할 때마다, 고개가 숙여집니다. 그리고 과연 무엇이, 순교자들을 이렇게 죽음에 이르기까지, 신앙에 충실하도록 했을까하는 궁금증이 생깁니다. 그리고 그런 신앙의 힘이 부럽기까지 합니다. 먹고 사는 데 도움이 안 되면, 얼른 버리는 것이 생존의 법칙인데, 그 본능적인 방법을 버리고, 기꺼이 죽을 수 있는, 아니 그 죽음을 그리워하기까지 하며, 앞다투어 죽어 가는 순교자들의 신앙은 무엇인가?

우리는 주님께 자신을 바치고 이웃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고귀한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꿈을 가졌었습니다. 순교자들은 죽음으로 자신의 신앙을 증거하기까지 자신의 꿈을 실현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꿈을 실현해 가고 있는가? 아니면 무엇이 우리의 꿈을 실현하지 못하게 하는가? 성찰해 보게 합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순교라는 것은 인간의 의지와 힘만으로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느낌이 듭니다. 순교자들은 주님의 도우심이 있었기에,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기꺼이 순교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심어주신 고귀한 꿈이 이루어지기 위해, 우리에게도 같은 주님의 도우심이 있기를 청합시다. 그리고 우리의 현실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잊혀져간 꿈들을, 다시금 내 인생의 이정표로 떠올리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헌신하도록 합시다. 비록 우리의 육체와 현실이라는 장벽 앞에서 구조적이고 물질적인 소유나 채움은 아니더라도, 거룩함에 이르는 순교자들의 정신과 순교에 이르기까지 몰두하고 충실했던 신앙의 고귀함을, 우리 생으로 채우고 완성시켜 성인의 삶을 살도록 합시다.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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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신심미사 꽃꽂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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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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